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6:08:32

황병관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황병관
黃柄寬[1] | Wang Byung-kwan[2]
파일:아쉐아뤠슬링췜픠온.png
현존하는 황병관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
출생 1919년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사망 1952년 (향년 33세)
경상남도 부산시
(現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종목 레슬링
체급 웰터급 -73kg
학력 중앙고등보통학교
메이지대학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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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레슬링 선수다.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레슬링 선수로 활동했으며, 보통학교 시절에는 투포환 선수로 활동했다.

2. 생애

평양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운동을 하다가[3] 광복 후 이화룡 정팔과 함께 월남하였고, 서북청년회에 활동하여 반공투쟁을 펼쳤다. 제28회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웰터급 경기에서 우승하고, 1948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다. 하지만 메달권에는 근접하지 못하고 16강에서 탈락했다. 이후 대한레슬링협회 이사를 지내면서 한국체육관 레슬링부를 창설해 후진양성에 힘썼다.

1952년, 부산에서 대한청년단 동단부 특공대장[4]으로 마사이찌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조직폭력배 고영목 적산가옥 문제로 패싸움을 벌이는 도중에 마사이찌 패거리들이 패배하려던 차 고영목이 발사한 권총탄에 흉부를 맞아 함께 있던 이화룡의 부하들이 춘해외과로 급히 이송했으나 숨졌다. 이때 황병관은 겨우 33살이었다. 그후 고영목은 헌병대에 넘겨졌으나, 레슬링계의 열화와 같은 엄벌 청원에도 불구하고 정당방위 비슷무레하게 풀려나서 꽤나 오랫동안 부산의 어둠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황병관이라고 하면 보통은 김두한의 증언으로 김두한 빠들에게 유명해진 면이 있으나, 실제 인물이 김두한과의 관계성은 김두한의 증언 외에는 객관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 오히려 그 옛날 국가대표들의 이야기를 다룬 모 책에서는 식당에서 김두한과 시비가 붙은 황병관이 김두한을 쓰레기통에 쳐 넣었다면서, 김두한인 줄 모르고 그랬는데, 알았으면 더 심하게 패줄걸 운운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썰도 있다.[5] 어쨌던 김두한이 목숨을 구해 준 헌병대 사건은 따지고 들어가면 말이 안 되는 면이 많으니 그렇다 치고, 황병관을 죽인 고영묵은 대한청년단 소속으로 김두한과 친분이 있는 관계였다. 김두한 패거리와 명동패거리가 연합해서 노동자들 착취를 막으려고 고영묵과 싸우다 황병관이 죽었다는 건 그냥 야인시대의 설정일 뿐이다. 실제로는 적산가옥 문제로 싸우다가 황병관에게 따귀를 맞고 개털린 고영묵이 빡쳐서 권총을 들고 쐈고, 그 옆에 있던 이화룡이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6]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황병관(야인시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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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몇 기사들에서는 황병권(黃柄權)으로 표기한 곳도 있다. [2] 1948 런던 올림픽 등록명. # [3] 아세아 레슬링 챔피언 이야기가 아주 뻥은 아닌게, 매일신보 1940년 7월자 신문에 보면 아세아 레슬링 대회에서 필리핀 선수를 누르고 쾌승을 했다는 기사가 있으며, 그 전에는 웰터급 전 일본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4] 직책은 그럴 듯 하지만, 실상은 쉽게 말해서 그냥 깡패다. [5] 다만 고영묵이 실제로는 김두한과 싸움 실력이 비슷했고 고영묵을 실제로 힘으로 누른 적도 있었으니 싸움 실력 자체는 김두한보다 위였을 수 있다. 엘리트 투기선수와 건달의 경우 요새는 투기선수와 건달이 비교가 안 되지만 대한민국 건국 이후 초창기만 해도 건달이 투기선수를 이겼니 투기선수가 건달을 이겼니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6] 황병관은 춘해병원에서 숨을 거뒀는데 원수인 고영목도 훗날 괴한들에게 습격받고 춘해병원에 입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