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8:24:27

황룡(동음이의어)

1. 황금색 2. 중국 쓰촨성의 관광지3. 역사적 지명
3.1. 원삼국시대 고구려의 주변 국가3.2. 고구려(高句麗)를 지칭하는 용어3.3. 북연(北燕)을 지칭한 용어3.4. 평안남도 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3.5. 요나라(遼) 때 두었던 부명(府名)
4. 인명
4.1. 실존인물4.2. 가공인물
5. 대한민국의 지대지 무유도 시험 로켓

1. 황금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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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쓰촨성의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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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적 지명

3.1. 원삼국시대 고구려의 주변 국가

27년(8)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解明)이 옛 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있고 매우 용감하였다. 황룡국(黃龍國)의 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하였다. 해명이 그 사신을 마주하여 그것을 당겨 부러뜨리고 말하기를 “내가 힘 센 것이 아니라 활이 굳세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황룡국왕이 부끄럽게 여겼다. 왕이 이를 듣고 화를 내며 황룡국왕에게 알려 말하기를 “해명이 자식으로서 효도를 하지 않았으니 과인을 위해서 그를 죽여주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 27년
3월에 황룡국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건의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지금 이웃나라가 이유도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마침내 갔다. 황룡국왕이 처음에 모략을 꾸며 죽이려고 하였으나 만나서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삼국사기》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 27년
28년(9) 봄 3월에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기를 “나는 도읍을 옮겨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자 하였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 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으니, 자식의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하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자살하려고 하자 혹자는 말리며 말하기를 “대왕의 장자가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제 사자가 한 번 온 것으로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태자는 말하기를 “지난번에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지 의심되어 활을 당겨 부러뜨려 보복하였던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듣게 되었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다. 마침내 여진(礪津)의 동쪽 들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땅을 일컬어 창원(槍原)이라 하였다.
《삼국사기》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 28년

황룡국은 고구려 초기에 있었던 국가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편에서 언급된다.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평안남도 용강군이 고려의 황룡성이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용강군설이 주장되었지만 당시 낙랑군이 존속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해당 지역에 황룡국이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3.2. 고구려(高句麗)를 지칭하는 용어

  • 북위 효문제가 보낸 대고구려조서(對高句麗詔書)에는 고구려를 ‘황룡’이라고 표현한 문장이 있다. 또한 ‘황룡’은 광개토왕비와 문무왕릉비에도 등장한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를 뜻하며, 문무왕릉비에서는 국가나 지역이 아니라 상서로움을 의미한다.

3.3. 북연(北燕)을 지칭한 용어

  • 송서, 남제서 뿐만 아니라 북위의 최홍이 편찬한 십육국춘추에서도 북연을 황룡국이라고 부른다.
    • (원가)15년(438) 여름 4월 황룡국 사신이 (공물을) 바쳤다.” 북연(北燕)을 지칭하여 황룡이라고도 표현한 사실이 있다.
    • (탁발) 도(燾)가 서쪽으로는 농우(隴右)를 평정하고 동쪽으로는 황룡(黃龍)을 멸하였다.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가 함께 조공하였다.
    • 황룡국주가 우리나라(宋)의 정삭(正朔)을 받았다.
    • “이에 앞서 선비(鮮卑) 모용보(慕容寶)가 중산(中山)을 다스렸는데 삭로(索虜)에게 패하여 동쪽의 황룡(黃龍)으로 달아났다. 의희(義熙) 초에 보(寶)의 아우 희(熙)가 그 부하 풍발(馮跋)에게 살해되었다. 발(跋)은 자립하여 군주가되었다. 스스로 연왕(燕王)이라고 불렀다. 황룡성(黃龍城)을 다스렸는데 그런 까닭에 황룡국(黃龍國)이라 부른다.” 라고 연(燕)나라를 황룡국이라 불렀다는 내용이 송서에 등장한다. 고구려와 연은 동일하게 새의 깃털을 머리에 꽂는 조우관 형식이 매우 비슷하다. 또한 국가가 인접해 있다. 장비가 스스로를 "연인(燕人) 익덕이다"라고 했듯이 이미 나라가 망했어도 그 지역 명칭으로 쓴 경우다.

3.4. 평안남도 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

  • 고려사에서 용강(龍岡)은 평안남도 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시대에는 황룡성(黃龍城) 또는 군악(軍岳)이라 하고 영(令)을 두었으며, 후에 용강이라고 고쳐 현령(縣令)으로 하였다. 이는 전승되는 과정에서 평양 일대에 전해져오는 기자전승을 참고한듯 싶다.[1]

3.5. 요나라(遼) 때 두었던 부명(府名)

  •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는 본래 발해(渤海)의 부여부(扶餘府)[2]이다.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평정하고 돌아와 이곳에 이르러 죽었는데, 황룡이 보이자 이름을 고쳤다.

4. 인명

4.1. 실존인물

  • 마쓰다이라 요리히로(松平賴寬)[3]

4.2. 가공인물

5. 대한민국의 지대지 무유도 시험 로켓

파일:20120420104901_3.jpg

한국의 지대지 무유도 시험 미사일이다.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어네스트 존의 무단 복제품이다. 그리고 최초로 국산화한 군사용 로켓인데, 비록 전력화는 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개발한 기술들로 NHK-1 백곰을 완성했다. 1978년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서 백곰 미사일과 함께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능1호 라고도 불린다.


[1]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2] 오늘날 길림성 농안~ 장춘 일대. [3] 호(號)가 황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