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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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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
2.1. 단점2.2. 장점
3. 총평4. 유럽 진출 시 성공 가능성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인 홍명보의 플레이 스타일을 정리한 문서.

2. 특징

1990년대 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불세출의 재능이자, 유스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구축되지 않은 한국에서 등장한 특이한 유형의 선수.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독특한 스타일의 선수였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까지는 수비형 미드필더였지만 남대식 감독이 홍명보의 남다른 재능을 간파해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피지컬과 스피드, 대인 수비 능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높은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두 스토퍼들을 커버하며 볼을 차단하고, 중앙에서 수비 라인을 리딩하는 스위퍼로 활약했다. 그리고 미드필더 출신으로서 넓은 시야, 좋은 양발 킥력으로 훌륭한 후방 빌드업 능력을 갖췄었다. 이에 따라 클럽팀, 대표팀을 막론하고 백3의 중앙 스위퍼로서 중용되었으며, 강렬한 리더십으로 팀 동료들 사이에서 항상 신망이 두터웠다. 같은 포지션에 유사한 성향을 지닌 프란츠 베켄바워와 비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홍명보의 별명이 '아시아의 베켄바워'였다.

전성기의 홍명보는 스위퍼의 기준을 넘어 리베로에 가까운 경기 조율, 패싱을 보여주었고 이를 가장 잘 보여준 대회가 19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1] 이 대회에서 홍명보는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며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절정의 시기를 달렸다. 2002년에 들어서 점차 노쇠해진 홍명보는 리베로 보다는 기존의 스위퍼 플레이를 하며 대부분의 팬이 기억하는 스위퍼-리베로 사이의 애매한 플레이를 구사했다. 그럼에도 영원한 리베로라는 명성에 걸맞은 번뜩이는 빌드업과 수비로 2002년 월드컵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역대 베스트 11을 뽑으려면 센터백 자리에는 무조건 홍명보가 고정이었다. 그 외의 자리에서 백3 포메이션이냐, 백4 포메이션이냐에 따라 김태영, 최진철 등이 경쟁하는 정도.[2]

2.1. 단점

홍명보는 넓은 시야와 정확한 롱패스를 활용해 클럽팀과 대표팀에서 후방 빌드업을 전담했다. 중거리 슈팅도 제법이었지만, 정작 프로에서 미드필더로 뛸 때에는 피지컬과 볼 키핑 능력, 빠르게 패스를 주고받는 원투터치 플레이 등 미드필더에게 요구되는 기술들에 익숙지 않다는 점들이 여실히 드러나며 실패했다. 게다가 수비수로도 단점들이 명확했는데, 1:1 대인수비에는 오히려 수비형 미드필더들보다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 다른 수비수가 와줄 때까지 시간을 끄는 수준이었으며, 제공권도 약해서 센터백이 둘뿐인 4백에서는 써먹기 힘들었다.

옛날 선수이다보니 볼 다루는 기본기가 떨어진다는 말도 많았는데, 사실 당대 아시아권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발기술이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이는 홍명보가 가장 활약했던 1994년 월드컵 경기영상을 봐도 어느정도 엿볼 수 있는 부분으로 전력상 우위의 팀 수비수들을 간결한 볼터치와 순간스피드로 제치고 패스를 연결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터트린 중거리 골도 가벼운 페인팅으로 저지하던 수비수의 중심을 순간 흐트려놓았기에 슈팅 찬스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애초에 홍명보의 기본기가 좋지 않았더라면 오버래핑을 자주 시도해야 하는 리베로 포지션에서 뛰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홍명보의 대인 수비 능력은 당시 국내 수비수들 평균 수준에 뒤떨어지는 편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국가대표 레벨의 동료 스토퍼들, 더 나아가 유수의 해외 선수들과의 비교에서는 열세가 맞았다. 미국 월드컵 독일전을 보면 홍명보는 시종일관 독일 선수들의 피지컬에 고전했으며 로타어 마테우스와 몸싸움을 할 때도 팔을 써서 마테우스를 잡아 끄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홍명보가 수비수로서 실격 수준의 피지컬과 몸싸움을 가졌다면 빌드업 능력 하나만으로 A매치에서 136경기를 뛸만큼 중용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홍명보는 상대와 거리를 두고 재는 것과 커버링에 능한 선수였지 피지컬을 써서 경합을 통해 볼을 탈환하거나 공격활로를 차단하는 능력까지 잘 갖춘 것은 아니었다[3]. 그리고 2002 때의 홍명보를 보면 1대 1 상황에서 과감한 태클로 공을 뺏어오는 경우가 의외로 꽤 자주 있었다고는 하지만 홍명보도 수비수는 수비수고 아무리 대인 수비 능력이 취약해도 최소한의 것들은 하니, 이것을 보고 홍명보의 스토퍼적 면모가 좋았다고 보긴 어렵다. 2002년 월드컵의 히딩크도 대인 수비 능력이 부족한 홍명보를 중용하기 위해 지역 수비 위주의 4백을 포기하고 3백을 선택해야 했다.[4][5] 게다가 경합 능력이 부족한 홍명보를 보좌하기 위해 유상철, 김남일 등 몸싸움에 능한 미드필더를 필수적으로 기용해야 했다.[6][7]

2.2.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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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홍명보에게도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후방 빌드업 능력이다. 후방에서 경기를 조율하다 어느새 빈 공간으로 롱패스를 뿌리거나, 중원까지 직접 치고 올라와 위협적인 전진 패스를 찔러주고 직접 중거리 슈팅을 때리기도 하는 등[8] 홍명보의 후방 빌드업 능력은 빌드업을 넘어서 가히 탈아시아급이라 할 만한 플레이 메이킹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김태영, 최진철이 갖추지 못한 가장 차별화되는 홍명보의 강점이다.

또한 홍명보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점으로 양발을 모두 사용하는 선수였다는 것. 양발잡이 공격수보다 훨씬 드문 양발잡이 수비수로서 왼발,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태클이 가능해서 순간적인 커버링에 특화된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태클 뿐만 아니라 패스와 슛 역시 양발로 가능했기에 수비 이후 빠른 공격 전환에도 도움이 되었다.

수비에서도, 상술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던 탁월한 예측력으로 패스 차단와 슛 각도 좁히기, 블로킹 등에 능했으며 다른 스토퍼가 먼저 상대를 막다가 뚫리면 귀신같이 나타나 공격을 끊는 커버 능력 때문에 수비진의 전설로 남은 것이다. 그의 결정적인 선방 장면들은 수비적 기본기보다는 예측을 통한 위치 선정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경우가 많다.[9][10] 즉 1:1보다는 다대일이나 막 1:1을 뚫은 상대를 저지하는 능력이 좋으며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동료가 있으면 능력을 발휘하는 선수였다.

따라서 홍명보는 3백에 특화되어있던 선수였다. 4백은 필연적으로 2명의 센터백 직접적으로 상대 공격수와 맞대결하게 되기 때문에 홍명보를 4백의 센터백으로 1명의 파트너만 붙였다간 수비가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커버 능력은 그의 부족한 도전 능력을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로 괜찮았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의 특성 때문이다. K리그로 대표되는 한국 수비수들은 전통적으로 강인한 피지컬과 집요한 투지를 바탕으로 전투적으로 도전하는 수비에 특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두 명만 모아서 쓰리백의 양쪽에 넣어 놓으면 그들의 도전 능력은 최소 2인분 이상~심지어 3인분에 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후방에서 공을 탈취한 뒤 경기를 만들어가기보다는 일단 걷어내는데 특화됐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K리그 팀이 고전적인 3백을 쓰는 경우가 많았으며, 수비리딩과 기술이 되는 리베로를 중앙에 두고, 양 옆에서 스토퍼가 궂은 일을 도맡아하는 구조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겨졌다. 특히 2002년 신화를 이끈 김태영 - 홍명보 - 최진철의 백3 라인은 서로의 세 선수가 서로의 단점을 장점으로 완벽히 커버할 수 있는 조합이었어서 이 분야에서 역대급으로 평가받는다.[11] 따라서 그들의 중앙엔 이들의 도전이 뚫렸을 경우 뒤에서 커버를 쳐 줄 수 있는, 도전 능력은 별로지만 커버에 특화된 스위퍼가 있어도 그렇게까지 압박에 밀릴 걱정이 없었는데다가, 상술했듯 한국 축구계에서 도전 능력이 뛰어난 수비수는 많았지만 홍명보급의 커버 능력을 가진 선수는 드물었고, 심지어 당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12]

거스 히딩크 감독도 2002년을 준비하며 몇 차례나 홍명보를 4백 시스템에 끼워넣으려 했지만 실패했다.[13] 그러나 끝내 히딩크가 홍명보를 버릴 수 없었던 건, 이미 수년간 익숙해진 탈아시아급이라 할만한 홍명보의 딥라잉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버릴 수 없었고 자신에게 알맞은 진형 위에 세워 놓으면 장점을 십분 발휘하며 태극전사들을 이끌어왔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홍명보가 국대의 중앙을 지휘하던 시기 홍명보 못지 않은 플레이메이킹 능력이 있는 윤정환, 신태용, 노정윤등 수많은 K리그 스타들은 국제무대에서 뛰기 부적합한 피지컬 때문에 일찍 배제되었었다. 게다가 홍명보는 90년대 수비수였다. 센터백으로 커맨드와 빌드업까지 갖춘 선수는 전세계에도 얼마 없고 한국에서는 홍명보 외엔 발기술이 좋은 센터백 자체가 없었다.[14][15] 여기에 국제경기에서 2002년 월드컵때 대표팀 중원을 지킨 유상철 김남일은 빼어난 경합능력과 수비력, 활동량으로 유럽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설순 있었으나 홍명보처럼 날카로운 전진 패스를 활용한 빌드업 능력은 없었다.[16][17][18] 따라서 홍명보를 버릴 경우 대표팀의 공격 루트는 투박한데다 성공률도 높지 않은 측면밖에 남지 않으므로 홍명보가 없으면 팀 운영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홍명보에게 어울리는 3백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2002년 국가대표팀은 여러가지 조건이 좋고 경기력과 홈 버프를 받아서 역대 최고의 성과를 내는데 성공했다.[19]

그래서 홍명보는 커리어 내내 클럽에서는 피지컬 압박이 덜한 J리그에서 황제로 군림했고, 국가대표에서는 확실한 자신의 보디가드들을 두고 있어야 능력을 100%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축구의 가장 큰 명제인 압박의 문제로 인해 피지컬과 탈압박이 약했던 홍명보식 한국형 플레이 메이커 즉, 몸싸움과 드리블보다는 패스로 빌드업과 경기 조율을 맡던 자리는 바로 뒷 세대인 윤정환, 이관우에서 한동안 끊어졌다가, 기성용이 이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홍명보와 플레이스타일이 완벽하게 같지는 않다. 기성용 문서에도 설명이 나와있지만, 롱패스를 활용한 빌드업과 넓은 시야 등으로 홍명보와 비교되기도 하고 피지컬과 볼 다루는 테크닉은 되려 우위이다. 다만 예측력과 위치 선정 같은 수비 센스는 비교불가 수준으로 홍명보가 훨씬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20] 기성용이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수비적으로 비판받는 이유는 활동량만 많지 그 활동량을 적시에 써먹을 수 없는 위치 선정의 약점 때문인데,[21] 이 위치 선정에서 홍명보는 정말 탁월함을 보였다. 홍명보는 국가대표 경기에서 그 순간적인 타이밍과 센스로 몇 번씩이나, 그야말로 한 골 막은 것과 같은 수비를 보여주었다.

히딩크가 유상철을 중용하고 박지성이란 유망주를 국대주전으로 깜짝 발탁한 것도 어찌보면 홍명보의 존재 때문이다. 3백에서의 홍명보를 디폴트로 둔다면, 중원은 신태용이나 윤정환처럼 자기가 공을 잡고 경기를 풀어나가는 공격형 미드필더보다는 공이 없는 상황에서의 판단력이 좋고, 이를 몸으로 구현할 체력이 되는 선수가 더 좋다. 홍명보로부터 시작되는 패스를 받으러 내려오거나, 침투하거나, 때로는 홍명보를 지키기 위해 싸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홍명보는 스페인을 상대로 비교적 강한 모습을 보여 줄 때가 많은데[22] 이는 스페인이 우리가 아는 티키타카 전술처럼 드리블과 패스 플레이 위주의 전술을 펴는 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술을 쓰는 일본이 홍명보의 수비망 앞에서 번번히 무릎을 꿇은 것처럼 스페인의 전술도 패스 차단에 도가 튼 홍명보 앞에선 최악의 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홍명보가 비에리의 피지컬 앞에서 상당히 부진한 모습을 보인 이유이기도 하다.[23]

스피드의 경우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지만 절대 느린 선수는 아니었으며 되려 수비 시 순간 스피드와 가속력은 좋은 편이었다. 치달이나 오버래핑을 할 때 보면 기본 주력 자체는 빠른 편이었다.[24]

3. 총평

요약하자면 홍명보는 스피드, 피지컬, 지구력이 부족하여 윙에서는 활약하기 힘든 선수였고, 주로 후방에서 플레잉하며 상황마다 적재적소의 움직임만을 해야만 했던 앵커맨 스타일의 선수였지만, 그 부족한 피지컬을 명민한 오감과 천재적인 수비지능으로 커버해 수비형 미드필더나 센터백의 자리에서도 상대방의 움직임을 묶어놓았으며 고작 이것만으로도 한국을 지휘하고, 경쟁력을 보여주었던 불가사의한 선수라고 할 수 있다.[25] 상대방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나는 스타일이고, 실제로 써먹기도 어렵지만 안 쓰자니 정말 아쉽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유형의 선수였다.

4. 유럽 진출 시 성공 가능성

위에서 서술한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홍명보가 유럽에 진출했다면 성공했을까?'는 축구 팬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논쟁거리였다.

우선 이야기에 앞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과는 다르게 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 배경에는 세계 축구 사정에 어두웠던 국내 축구계의 현실이 있었다.
첫째로 유럽에서 통할만한 에이전트가 없었다. 당시 국내 에이전트들은 이적료와 연봉을 보장받으면서 유럽의 안정적인 팀을 보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1999년 한국은 총 4명의 에이전트가 있었는데 이중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이영중 이반스포츠 대표 였다. 이영중은 국내외 축구팬으로부터 'J리그 빠'라는 비판까지 얻었을 정도로 국가대표 선수들을 고액의 이적료와 연봉을 보장받으면서 J리그로 보내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이반스포츠 소속 황선홍, 홍명보, 노정윤, 유상철, 하석주, 김도훈, 윤정환 등 많은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J리그로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유럽 진출에선 현지 사정을 잘 몰랐던 건지, 협상력이 부족한 건지 하여튼 별 성과가 없었다. 프랑스 르 샹피오나 RC 스트라스부르 서정원,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NAC 브레다 노정윤,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라스크 린츠의 강철, 최성용,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 이동국[26] 등이 이영중의 작품이긴 한데 이동국이 뛰었던 베르더 브레멘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얼마 지나지 않아 2부리그로 강등된 하위팀이나 중소리그의 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990년대 국내에서 가장 실력있다는 에이전트의 능력이 이 정도였다.[27]

둘째, 국내 프로팀들이 해외리그 진출에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 당시 한국의 프로축구팀들은 선수들의 해외진출에 굉장히 폐쇄적이었다. 일단 과거에는 기본적으로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소속 구단, 더 나아가 우리나라 전력의 유출이라는 정서가 있었다.[28] 거기다 1990년대 후반은 K리그 최고의 전성기로서 경기장이 팬들로 가득차던 시기였다. 팀 입장에서는 스타급 선수들이 하나 빠지는 것이 리그 성적 뿐만 아니라 관중 수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그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선수를 좋지 않게 볼 수 밖에 없었다.[29] 홍명보의 자서전 표현을 빌리면 해외팀에 이적제의가 들어와도 소속 팀에 몇년 간 '봉사'를 해야 겨우 허락받아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셋째, 입단 테스트 거부도 한 몫했다. 당시에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최고의 선수라는 자존심 등을 앞세워 선수 본인 또는 소속팀이 입단테스트를 거부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당시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좋지 않게 보던 한국 프로팀들은 100만 달러 이상의 적지 않은 수준의 이적료를 제시했는데 실력은 검증 받지 않겠다고 하니 유럽팀들이 호구도 아니고, 남미와 아프리카의 이적료와 연봉이 낮고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난 선수들 쪽으로 눈을 돌리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해외 진출이 어려웠던 시기에도 입단 테스트에 적극적이었던 서정원[30], 노정윤 같은 선수들이 유럽으로 진출했던 사례를 볼때 국내 축구계가 해외 사정에 조금 더 밝았더라면 차범근, 박지성, 손흥민까지는 못되더라도 유럽 프로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왔을 것이다.

정리하면 우물안 개구리와 다름 없었던 국내축구계의 현실이 유럽으로 진출하고 싶은 선수들의 발목을 계속 잡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2000년 무렵, 축구협회가 설기현 같은 유망주를 유럽으로 보내는 유망주 해외진출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2002년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 이영표 PSV 아인트호벤으로 데려가면서 점차 변화해 가게 된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면 홍명보가 만약에 유럽에 진출한다면 분데스리가 팀에 입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분데스리가는 독일 프란츠 베켄바워, 로타어 마테우스, 마티아스 자머, 옌스 노보트니, 스위스 치리아코 스포르차, 오스트리아 볼프강 파이에르징거 등 ‘리베로’ 유형의 선수들이 많이 뛰던 리그이기 때문이다. 또, 분데스리가는 한 때 심재원 홍정호가 진출했던 적이 있을 만큼 유럽의 다른 리그에 비해 동양인 출신 중앙 수비수를 영입하는데 거부감이 없다.

실제로 홍명보에 관심이 많았던 유럽 프로 팀들 중 분데스리가 팀이 꽤 있었다. 설에 따르면 카를스루어 SC, 헤르타 베를린, 함부르크 SV가 영입할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 카를스루어 SC는 1996년 여름 스위퍼 옌스 노보트니가 이적한 자리를 보강하기 위해 홍명보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타진했다.[31]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같은 독일의 명문구단에 입단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 로타어 마테우스가,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옌스 노보트니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마티아스 자머가 주전 스위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명보가 분데스리가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하면 빅클럽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이나 영입제의를 한 것으로 알려진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했으면 성공했을까? 가능성은 반반이라 볼 수 있다.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루이 반 할 감독의 존재다. 반 할이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있던 97-98 시즌 당시, 팀의 주장 펩 과르디올라는 부상 때문에 한 시즌 가까이 뛰지를 못했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 전술의 핵심이었다. 4백 수비 바로 앞에서 수비라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공격 전개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과르디올라가 빠진다는 것은 기존의 전술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과르디올라가 부상 때문에 경기에 못 나왔던 시즌이 바르셀로나가 홍명보를 영입하려고 했던 바로 그 시즌이다. 반 할은 과르디올라의 부재로 인한 기존 전술의 공백을 아약스의 3-4-3 전술로 보완하려 하였으며 그 3백의 중앙에 뛸 선수로 홍명보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32] 둘째, 홍명보는 앞에 기술된 것처럼 스페인을 상대할 때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33] 2002년 한일 월드컵 스페인전[34]을 기억해보자. 1994 월드컵 스페인전의 경우 직접 프리킥 골을 넣었고, 공격진 바로 뒤까지 올라가 서정원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2002 월드컵 8강 스페인전에서는 독일, 튀르키예, 이탈리아 등 다른 강팀과의 경기와는 달리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는 수비력과 정확한 롱패스를 바탕으로 한 빌드업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패 요인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반 할은 알베르토 자케로니처럼 3백을 고집하는 감독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홍명보가 부진한 모습을 보일 경우 바로 4백으로 전환했을 것이다. 둘째, 동양인 선수가 라리가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았던 적이 거의 없다. 포지션이 다르긴 하지만 한국 이천수, 박주영, 일본 나카무라 슌스케 등 적지 않은 동양인 선수들이 라리가에 진출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다. 현재 시점인 2020년대까지 합쳐봐도 그나마 아시아 선수들 중에서 라리가에서 성공했던 사례가 자바드 네쿠남 이누이 다카시, 현역으로는 쿠보 타케후사, 이강인정도 뿐이다. 또 박지성, 유상철처럼 멀티 플레이가 가능하면 로테이션 멤버로 쓸 수 있지만 홍명보는 오직 3백에서만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선수라서 감독의 성향과 맞지 않으면 벤치 멤버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각설, '홍명보가 유럽에 진출한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질문의 답은 열린 결말이므로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것이 옳겠다.[35]


[1] 사실 이 대회에서 홍명보를 중심으로 한 수비 전술이 아주 성공적이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으며, 홍명보의 수비력에도 몇몇 문제점이 드러났다. 첫번째 경기인 스페인전에서는 주장이자 주축 수비수인 미겔 앙헬 나달의 퇴장이라는 호재를 안았음에도 경기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반전에 두 번의 실점을 하는데, 이 실점 장면에 모두 홍명보의 책임이 있었다. 첫번째 실점 장면에서는 앞에서 공을 몰고 오는 선수 앞에서 제지를 함과 동시에 오른쪽 측면으로 파고드는 윙어를 체크하지 못하여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고, 두 번째 실점 장면에서는 상대 공격수의 개인기에 몸의 중심을 순간 잃어버려 재빨리 대응을 하지 못해 실점 장면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스페인과의 전력차를 생각하면 홍명보의 수비진이 선전한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홍명보가 리베로로서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2] 김민재의 기량의 세계구급으로 인정받으며 점차 김민재로 굳어지는 수순이기는 하지만, 실력에 비해 국가대표팀에서의 성과가 아쉽다는 평 때문에 이견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3] 이는 전성기 시절 이영표와 유사한데 에레디비제와 달리, EPL에선 공격포인트를 많이 올리지 못하는 등 아쉬운 공격력을 보여줬음에도 토트넘에서 꽤 활약했던 건 아시아 역대 풀백 중 손에 꼽히는 수비력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이영표는 피지컬의 한계가 분명해 상대선수와 직접 경합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견제를 하는데 능했다. [4] 실제로 히딩크는 부임 초기에 송종국을 센터백으로 전환해서라도 4백을 시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5] 사실 송종국 센터백을 실험하던 시기가 4백에서의 홍명보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던 때는 맞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이었던 원인은 이 때의 홍명보는 부상 중이었다는 점이다. [6] 올라운더인 유상철이야 말할 것도 없고, 김남일 또한 대인 수비와 경합력 등 전체적인 수비 능력이 매우 뛰어난 미드필더였고, 심지어 센터백에서도 준수한 기량을 보였다. 이 둘은 홍명보의 약점이었던 대인 수비와 피지컬을 커버하기에 제격인 선수들이었다. 이는 김태영 최진철 또한 마찬가지였다. 철옹성같은 스토퍼 둘과, 강인한 미드필더 둘이 뒤를 든든하게 밭쳐줬기에 홍명보는 리베로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7] 이러한 이유로 피지컬이 단점이었던 윤정환은 뛰어난 플레이메이킹 능력에도 월드컵에서 단 한경기도 나오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피지컬이 부족했던 이을용 역시 중앙과 측면 모두에서 활용 가능한 자원이었지만 이영표가 부상일 때 측면 위주로 기용되었다. 물론 다양한 자원을 쓰지 못하게 된 원인이지만 그만큼 홍명보의 존재감이 대단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8] 특히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이란전에서 폭풍 치달 후 노정윤을 거쳐 이동국의 득점으로 이어지는 빌드업은 가히 예술에 가까울 정도. [9] 이는 홍명보가 스피드, 피지컬, 그리고 수비적인 기술은 부족하지만 대신 상대 공격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눈에 띄지는 않지만 활동량이 많다는 이야기도 된다. 위치 선정을 잘 하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공간 선점을 막기 위해 부산하게 뛰어다녀야 하는데, 그래서 활동량이 적은 선수가 위치 선정에 강점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물론, 많이 뛰어만 다녀서는 안 되고 상대편 공격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면서 움직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축구 지능도 지능이지만 체력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10] 홍명보가 1대1 수비경합이 아쉬운 건 사실이고, 커버링만 한다고 폄하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빅리그 수비수들 중에서도 커버링 하나 제대로 못해서 주전에서 밀려난 선수들이 부지기수다. [11] 유럽 최정예 팀을 상대로 홍명보•김태영의 약점인 제공권과 몸싸움은 최진철이 커버가능했고, 최진철•홍명보의 다소 느린 기동력을 발빠른 김태영이 커버했으며, 홍명보의 다소 떨어지는 대인마크 능력은 김태영과 최진철이 커버할 수 있었다. 또한 김태영•최진철의 약점이라고 볼 수 있는 라인 조율과 빌드업은 홍명보가 커버했다. 심지어 설사 이 셋이 뚫려도 최후방에 이운재가 있었으니 당시 히딩크호의 수비력이 얼마나 탄탄했는지는 긴 말이 필요 없다. [12] 홍명보와 동시기에 세계 최정상 수비수로 활약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이에로, 바르셀로나의 로날드 쿠만은 홍명보보다 훨씬 강력한 공격력과 킥력을 갖춘 선수들이었지만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력이 아주 강력하고 소속팀과 대표팀에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들이 있었음을 감안해도 팀 전술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할만한 조율능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리고 모든 포지션의 선수들에게 패싱력과 발 밑 기술을 갖추는 걸 강조하는 2020년대에도 경기전체를 휘업잡을 정도의 조율능력을 갖춘 센터백은 사실상 거의 없다. [13] 아예 포기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히딩크호의 마지막 평가전인 프랑스전에서도 이영표-홍명보-최진철-송종국의 4백을 들고 나왔다. 다만 본선에서는 3백만 사용한 것이 맞다. 그 경기는 1년전 5:0으로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던 우승후보 팀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본선에 대한 기대감을 하늘 끝까지 끌어올린 경기는 맞는데, 결과적으로 수비진은 3실점을 했고 히딩크는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4백 시도를 포기하고 본선에선 안전한 3백을 사용했다. [14] 시간이 흘러 2020년대가 되어서야 김민재가 홍명보 부럽지 않은 빌드업 능력을 갖춘 센터백으로 성장했다. [15] 김민재가 정확한 롱패스와 빌드업 능력을 갖춘건 사실이지만 홍명보처럼 경기를 리딩하는 유형의 선수는 절대 아니다. 다만 홍명보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피지컬과 수비력이 뛰어나기에 수비수로서는 홍명보보다 훨씬 상위 클래스의 선수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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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16강전에서 맞붙은 이탈리아 대표팀도 잘 알고 있었고, 트라파토니는 아주리 10번이지만 터프하고 활동량 엄청난 선수인 프란체스코 토티를 홍명보에 붙여놓고 집중 견제하여 패스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전반전은 한국 대표팀이 공격 전개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선제골을 얻어맞는 등 부진하였다.
[17] 다만 김남일은 2002년 월드컵 이후 패스에 맛을 들인건지 수준급의 패스를 익혀서 소속팀과 국대에서 빌드업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애초에 히딩크가 김남일을 중용한 이유가 다른 한국선수들과 달리 모험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점이었다. 실수를 두려워 하지않는 창의적인 플레이가 그의 장점이었다. 물론 반대급부도 엄청나서, 김남일의 패스 미스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실점 내지는 대형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다. 이 시기 축구팬들은 제발 김남일은 공 잡고 있지 말고 빨리 빨리 딴 선수에게 넘기라고 덜덜 떨면서 관전했을 정도다. [18] 유상철 또한 강한 킥력과 정확한 패싱력을 가진 볼배급에 적합한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였다. 다만 홍명보만큼 경기조율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기에, 또다른 강점인 체력을 이용해 빌드업하는 홍명보를 커버했다. [19] K리그에선 90년대에 발레리 니폼니시의 부천이나 김호의 수원이 이미 한국선수들만으로 지역방어와 4백을 구축해냈다. 단순히 한국선수들이 4백에서 전술 소화능력이 떨어져서 3백을 쓴 것만은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후방 빌드업부터 유려하게 연결하는 건 어려웠고, 뛰어난 공격형 미드필더가 플레이메이킹을 통해 해소했다. [20] 기성용은 선덜랜드 시절 감독이 높은 위치에서 공격을 맡기자 PL수준에서도 상당한 공격 능력을 보여줄 정도로 공격력에 있어서만큼은 홍명보를 훨씬 상회한다. [21] 홍명보는 수비리딩과 커버링 등 자신의 특기는 물론 약점이라던 1대1 대인방어에서도 일단은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반해 기성용은 수비상황에서의 적극성이 상당히 부족했다. [22] 1994년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 당시의 하드캐리 골과 딥라잉 플레이로 무승부로 끝냈다거나 2002년 한일 월드컵 스페인전 당시의 우주방어로 승부차기까지 간 점이 크다. [23] 근데 비에리의 피지컬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게 부진했다. [24] 애초에 포지션이 빠르고 민첩하지 않으면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포지션이다. [25] 몇몇 축구팬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 필리포 인자기의 수비수 버전'이라고도 얘기한다. 그런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필리포 인자기가 당대의 다른 정상급 공격수들에 비해 기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저평가를 받고 있긴 해도 그렇다고 프로 레벨에서 경쟁력을 보장하지 못할 만큼 기본기가 부실한 선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터치가 좋지 못한 선수는 제 아무리 위치선정이 좋아도 효율적인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인자기의 기본기를 무시하긴 어렵다. 홍명보 역시 마찬가지로, 커리어 후반기에는 경험과 노련함을 바탕으로 괜찮은 드리블 센스를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2002 월드컵 폴란드전에서는 후방에서 압박으로 견제하는 두 명의 공격수 사이로 빠른 순간 스피드를 활용하여 제치고 나가 롱패스로 미드필더진에게 연결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이탈리아와의 16강전 경기에서는 일시적으로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위치에서 플레이하면서 공격수들의 견제로부터 준수한 탈압박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러모로 단점이 명확한 선수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중용되었던 건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기본기는 분명히 지닌 선수였기 때문이다. [26] 이적이 아닌 임대. [27] 다만, 반대로 보면 검증되지 않은 아시아 선수를 써줄 만한 구단들은 이 정도였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며, 당시 한국 축구의 수준과 한국이란 나라의 인지도를 생각해봤을 때 한국 축구인들이 유럽 축구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시대상황을 보면 단순히 에이전트의 능력부족만으로 보기에는 너무 가혹한 점이 있다. [28] 차범근의 독일 진출을 공군 축구단이 계약을 어기면서까지 막은 것도 국가대표팀의 주요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최순호 유벤투스로부터 6년간 제의를 받았지만 팀의 핵심 전력이었기 때문에 포항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29] 이는 80년대 한국프로야구도 비슷했다. [30]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였다'는 표현까지 썼을 정도로 입단 테스트에 열심히 임했으며 몇몇 팀과 이적 협상이 진행되는 성과가 있었다. [31] 카를스루어 SC가 '리베로' 헤슬러의 부상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홍명보를 영입하려고 했다는 인터넷 상의 글이 있는데 이는 해당글 작성자가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1996년 당시 카를스루어에 있던 헤슬러는 리베로가 아니라 테크닉이 뛰어난 공격형 미드필더이다. [32] 루이 판 할 감독은 아약스, 네덜란드 대표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에서 재직할 당시 3백을 종종 사용해 왔다. [33] 24강 조별리그 [34] 8강 준준결승전 [35] 한가지 확실한 점은 선수의 기량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홍명보의 주전여부는 팀 엔트리의 공백 여부와 전술 문제 등 외부상황에 많이 좌우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기술적 능력이나 축구지능이 대단히 훌륭하나 기본적으로 피지컬이 약하기 때문에 꽤나 전술을 타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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