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7:05:46

호랑이 선생님

1. 개요2. 설명3. 주제가4. 여담5. 등장인물6. 참고 자료

1. 개요

MBC 어린이 드라마이자 한국 어린이 드라마계의 전설. 1981년 3월 16일부터 1986년 10월 31일까지 5년 7개월 여에 걸쳐 방송되었다. 장기 방영작이니만큼 극본진에 이홍구, 이금림, 이유정, 박리미, 강철수, 이상화, 송지나, 권현숙 등이 숱하게 거쳤고, 현직 교사이던 홍석관도 집필에 참여했다.

연출은 1기 초기에 김승수 PD였다가 1982년부터 김승수의 해외연수로 인해 정문종으로 바뀌었고, 1983년 12월 12일에 김승수가 다시 맡다가 1984년 이후 황인뢰, 장두익 PD 등이 거쳤다. 나머지 스탭들의 경우 1981년 기준 기술감독은 강영선, 미술감독은 김건일, 타이틀은 이승문, 음악은 조문형 등이 각각 맡았으며 1984년 여름방학 시리즈 및 가을 판타지 편에선 왕준기 작곡가가 참여했다.

제목 그대로 호랑이란 별명을 가진 덩치 큰 초등학교 교사 허봉수( 조경환 분)를 중심으로 해서 허봉수가 담임을 맡은 5학년 5반의 어린이들이 만들어가는 일상과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2. 설명

1980년 11월에 국보위는 신문-방송겸영을 금지시켜 TBC와 DBS, 서해방송, 전일방송을 KBS로 강제통합시킨 동시에 컬러 TV 방송을 개시하고 1981년 들어서 KBS의 상업광고를 재개하고 컬러TV 수신료를 종전 800원에서 2500원으로 날강도질 무려 3배나 확 올리는 결정[1]도 하고, 1973년 이후 폐지되었던 아침방송을 재개하는 등의 등 방송 개편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였다. 이때 정부에선 가급적 일본 애니메이션만 방영하지 말고 어린이 드라마를 만들어서 방영하란 지시를 내려보냈다.[2] 이에 MBC는 1980년 <달려라 내 풍선> 종영 후 끊긴 어린이 드라마를 되살리고자 초등학교 한 반의 교사와 어린이들의 일상을 담는 형식으로 만들어낸 게 이 작품이다.[3]

방영 초기부터 무지막지한 인기를 불러왔는데, <주간경향> 1982년 제685호 88쪽 기사에 따르면 당시 담당 PD 측은 방영 초기만 해도 '아이들이 되바라지고 건방지다'는 일부 시청자들의 의견이 있던 터라 거부감을 주지 않고 발전적이고 바람직한 어린이들로 사실성 있게 그리면서 현실에도 적용되도록 신경써야 했다고 한다. 애초 기획이 기획이다 보니 계몽적인 내용이 많긴 했으나, 그럼에도 한국의 티비를 통해 방영된 여러 영상물들 중 호랑이 선생님만큼 당대 한국 어린이들의 일상과 밀접한 내용을 담고 있던 작품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 거기다 청소년 드라마도 변변한 게 없던 판이라[4] 호랑이 선생님을 즐겨 보던 중고등학생들도 많았다.

호랑이 선생님을 만들게 한 정부의 지시 때문에 KBS 역시 어린이 드라마를 만들었고 호랑이 선생님이 인기를 끌자 호랑이 선생님의 컨셉을 따라한 드라마를 만들기까지 했지만 그리 큰 반응은 얻지 못하고 사라졌고, 그 때문에 한때 호랑이 선생님은 방송 중인 유일한 어린이 드라마로 군림하기까지 했다.

드라마의 엄청난 인기 덕에 선생님 역을 한 조경환은 1981년 MBC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1982년 6월 서울시교육위원회로부터 명예교사 자격증을 수여받기까지 했으며,[5] 조경환 자신도 전술한 <주간경향> 기사에서 방송이 거듭되는 동안 "교권 확립에 대한 공헌이 크고 교사들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해 줬다"는 격려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책임이 커진다고 술회했다. 아무튼 드라마는 1200화가 넘는 방영횟수를 기록하면서 6년여간 평일 MBC의 오후 시간대를 책임졌다. 하지만 장기 방영 속에 약발이 다했는지 후반으로 가면서 초기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고, 결국 1986년 10월을 끝으로 드라마는 종영되었다. 이후로 90년대까지 꾸러기나 댕기동자 같은 여러 MBC 어린이 드라마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 작품은 이금림이나 송지나 같은 당시 젊은 드라마 작가들이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을 단련하는 무대가 되었으며, 1984년부터는 강철수가 드라마 작가로 각본을 맡았다. 물론 강철수 각본 때부터 약발이 다했다는 평이 있기도 했다. 작품의 질과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일선 교사 6명과 시 교육위원회 장학사 1명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한 후 매주 1회마다 모임을 열어 평가 및 소재 제공을 받았고, 여름 및 겨울방학마다 '농어촌 이동 여름/겨울교실' 특집 명목으로 농어촌에서 매 4주간 현지녹화를 했다. 촬영은 서울종암초등학교 및 용강초등학교에서 했고, 교실 세트장은 MBC 스튜디오 내에 차렸다. 촬영은 매 주말마다 진행하며 토요일엔 야외, 일요일엔 실내 식으로 각각 해서 후시녹음까지 거쳤다.

김승수 PD가 연출을 맡았던 시절인 1982년에는 '꽃과 나비' 편 #을 통해 당시로서는 민감한 소재이던 10대 성 문제를 선구적으로 다룸으로써 일선 학교에서 성교육 교재로 애용됐고, 어린이들의 시선으로 성교육 외에 체벌, 불량식품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고발하여 어린이들의 의식 성장을 꾀하기도 하는 식으로 교육 및 오락성을 동시에 잡아내기도 했다. 1983년부터 연출을 맡아 온 황인뢰는 어린이 드라마란 틀 속에서 온갖 실험을 더해가며 자신의 재능을 펼쳐냈다. 이런 실험이 가능했던 건 당시 호랑이 선생님이란 드라마가 방학 때만 되면 특집 형식으로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도 용인했기 때문. 이 때문에 호랑이 선생님은 방학 때만 되면 모험물도 되고 공포물[6]도 되고 SF도 되는 식으로 변신했다. 특히 미래의 대한민국을 소재로 한 가상 역사물[7]에서는 소년잡지에서 흔히 볼수 있는 미래 설정에 비윤리적이고 위험해서 폐기처분된 유전공학 기술을 훔쳐서 자기에게 주사한 친구가 퍼렇게 생긴 괴물[8]로 변하는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고 (주인공은 자기 반 친구를 시켜서 자신에게 주사를 놓으라고 했고, 친구는 시키는대로 주사를 놓아줬는데 괴물이 되고 말았다. 친구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고 자기 모습을 모르는 주인공은 난데 왜 그렇게 놀라느냐며 두려워한다. 친구가 거울을 비추어주자 주인공은 경악하며 울부짖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친구는 몸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약을 주사해줄테니 빨리 달라고 하는데 주인공은 거기다 대고 말한다. "그건 아직 발명 안했어...")[9] 1986년 2월 3일부터 1주 동안 했던 혹성탈출을 패러디한 겨울방학 특집 시리즈 제4탄 '서기 2020년' 편에서 한국 드라마 최초로 라텍스를 이용한 얼굴 전신 분장을 통해 원숭이 인간을 드라마에 등장시키기까지 했다.

<MBC 가이드> 1986년 2월호 기사에 따르면 이 작업을 주도한 분장사는 김성옥, 유승태, 최영호 등이며 먼저 배우들의 얼굴을 석고로 본뜨고 양각 작업을 한 후, 석고가 빨리 굳어지기 위해 김성옥은 집에서 전자레인지를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석고본을 캐릭터의 특성에 따라 골격대로 조각하고 턱을 뾰족하게 하기 위해 석고를 붙이고 공업용 라텍스로 만든 스킨 피스를 붙인 후 피부색에 맞춰 수염을 붙였다. 특히 이마~눈썹, 코~윗입술, 아랫입술~턱으로 각각 3분할한 스킨 피스를 만들었는데 실제 피부 질감을 재현코자 1/10mm 두께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특수분장에 대한 노하우가 충분하지 않아 기본 분장 서적 몇 권과 외국 드라마에 나온 특수분장을 관찰하고 제작기법을 상상해서 작업했다고 한다.

위 분장기법 역시 당시 한국에서 아직 초보라 그런지 분장 한 번 하려면 배우 1명에 분장사 1명이 2시간을 매달려 있어야 했고, 특수분장한 배우들은 혹여나 스킨 피스가 떨어질까봐 녹화가 끝날 때까지 음식을 제대로 못 먹고 야외 촬영 시 추위로 인해 턱에 물이 고여서 가끔 물을 빼고 다시 부착하다가 김이 서릴만한 부위는 솜이나 휴지로 메웠다. 위에서도 얘기했듯 스킨 피스의 재료가 공업용 라텍스라 장시간 녹화 후에는 피부가 따끔거리는 고생을 겪었다.( #1, #2, #3)

그 외에 1983년 12월 12일부터 8주간 '83~84 어린이 문제작 시리즈'를 편성했는데, 특히 19~23일에는 겨울방학특집 'TV시대 아이들'에선 가수 조용필, 코미디언 서세원 등 당대 인기 스타들이 까메오로 출연한 일도 있다.

3. 주제가

오프닝 영상[10]

작사 및 노래는 아역 배우들이 모인 '호순이들', 작곡 및 편곡은 김도향이 각각 맡았다. 단, 회차에 따라 호순이들 말고도 '호돌이와 호순이들'로 나온 경우도 있었다.

4. 여담

기본적으로 시추에이션 형식이지만 사자에상 시공이 아니라, 작중 시간과 외부 시간이 일치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방영 후 시간이 지나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초반부터 5학년 5반 어린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1982년부터 아역 배우 10명을 갈아가며 6학년 6반으로 진급시켰다. 1983년에 1기 등장인물들이 극중 졸업에 돌입하다 보니 그런 식으로 드라마를 끝내기에는 호랑이 선생님의 인기가 너무 좋았는데, 조경환 혼자서 극을 꾸려나갈 수 없는 노릇인 데다 다른 아역들을 출연시켜봤자 시청자들 입장에서 난생 처음 보는 아이들인지라 극의 분위기를 흐릴 염려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종전의 주연급 아역들 중 절반은 졸업, 나머지는 그대로 출연시키자는 묘안도 있었으나 당시 담당 PD이던 정문종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이에 제작진이 자문위원들에게 향후 극의 진로를 일임했으며 자문위원진 측은 수 차례의 회의 끝에 허봉수 교사를 전근시키자고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동년 2월 28일부로 서울 근교 지역의 학교로 전근을 가 새로운 반의 담임을 맡는다는 식으로 물갈이를 하고[11] 드라마가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출연진 교체가 이어지면서 호랑이 선생님은 결과적으로 시즌제 드라마 비슷한 형식을 원조급으로 시도한 작품이 되었다.[12]

아역들은 대체로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생까지의 연령대로 구성됐는데, 이들 중 최연장자는 당시 대학생이던 김형중[13]이었다. 당시 담당 연출자였던 김승수 PD의 증언에 의하면 아역들은 자사의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어린이합창단, 외부 연기학원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스카웃해서 오디션을 통해 30명 정도를 선발해냈으며 이들 중에서 대사 전달력이 미진하면 뺐다. 또한 계층 간 위화감을 조장시키지 않기 위해 아역들로 하여금 부모 동반 없이 스스로 나오도록 했고, 학업에도 충실할 것을 강조시켰다. 일부 멤버들은 네이버에 카페까지 차렸지만 가입은 출연자 외엔 안 된다.

1기 때의 멤버들이 인기가 좋은 편이었으나 1기 아역들 중 성인 연기자로도 어느 정도 자리잡은 사람은 윤유선, 강문희 정도고, 천동석은 1983년 11월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연예 활동을 중단하고 이라크에서 'CDS 그룹'을 세워 기업인이 되었다.

2기 멤버 중 안정훈, 주희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으나 주희는 후술하듯 1991년 KBS <사랑이 꽃피는 나무>를 끝으로 연기 활동을 접고 일본 유학을 거쳐 엣나인필름 기획마케팅총괄이사를 역임하는 등 영화 기획과 마케팅 업무에 종사 중이다. 갑자기 은퇴하는 바람에 잊힌, 이후 복귀했지만 아직 제자리를 못 찾은 유경아는 3기였다. 그리고 1기 때 인기 멤버였던 황치훈은 1988년 정규 1집을 내고 가수로 데뷔하여 <추억 속의 그대>라는 노래를 히트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에 모친 사망 후 불운이 생겨 군 생활을 거쳐 1992년 2집, 1998년 3집을 각각 냈으나 별 히트를 못 쳐 가수 활동을 중단한 후, 온갖 직종을 전전하다 2005년부터 브리티시모터스 영업사원으로 자리를 잡던 황치훈은 2007년 결혼한지 2년도 안돼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중이란 사실이 알려져 황치훈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는데 세상을 떠나기까지 11년간 식물인간 상태였다. 2011년 김진만, 안정훈, 윤진영, 정혜욱, 신양희 등 30년전 호랑이 선생님 주역들이 동창회를 가져 입원한 황치훈을 면회가기도 했다. #

황치훈을 진료한 의사조차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사실상 숨만 쉴 때 거의 사망 상태라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2017년 10월 16일 새벽에 뇌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그 외 출연자 중 강기선은 성인이 되면서 MBC FD가 되어 1990년대 초~중반 < 뽀뽀뽀> 등 어린이 프로그램 녹화진행, 자료수집 등을 맡았다.

어린이 소설이 붐을 이루던 1986년에 현암사를 통해 소설화되어 책으로 나온 일이 있다. 저자는 만화가 강철수 화백이었다.[14]

당대 드라마 작품들이 그렇듯 비디오테이프 재활용 탓에 대다수 회차들이 소실되어 MBC 영상자료실엔 '꽃과 나비(1982년 4월 14일)' 및 전술한 1983년 'TV시대 아이들' 등 일부 회차만 보존돼 있고, 1992년에 나온 방송사 내부 자료 <MBC 소장 프로그램목록집> 1권 163쪽에 따르면 258~260회 분량만 소장되었다고 나온다. 이 중 '꽃과 나비' 편은 2000년대 중반 MBC 홈페이지에서 유일하게 VOD 서비스를 한 바 있고, 2020년 5월 15일 스승의 날 특선으로 MBC ON에서 방영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고 나서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느정도 일반명사화되어 덩치크고 엄격한 남성 교사를 일컫는 용어로 자주 쓰였으나, 90년대가 지나고 나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유명 만화가 정훈이가 재밌게 본 드라마라고 한다. 그 당시 어린이들은 다 좋아했다.

5. 등장인물

6. 참고 자료



[1] 이 때문에 수신료를 40년 넘게 올리려고 하는 게 번번히 무산되고 있다.물론 40년이나 지났다고 항변하지만 KBS의 각종 논란으로 인하여 계속 수신료 올리려는 게 번번히 막히고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2] 그런데 이런 지시가 내려왔어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계속 방영되었다(...). 이유는 국산 TV 만화영화를 만들기에는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때문(...) 시청료를 2500원씩이나 올리고 광고수익도 매년 큰폭으로 올랐음에도 만화영화 제작도 안하고, 자료 보관도 제대로 안하고, 낮방송도 안 하는 등 그야말로 돈이 아까운 날강도 방송사였던 시절이다. 이러니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튜브라는 대체재가 생겨서 공영방송을 안 보지. 일본제 로봇 애니메이션의 경우엔 저런 지시로 인해 방영이 배제된 혐의가 짙지만. 다만 애니매이션 제작이 생각보다 넘사벽으로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당장 만화가 박재동의 오돌또기도 사실상 엎어져 버렸고 이건 신경쓰면 지는 거다. 당대 기준은 물론 현재도 한국과 일본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넘사벽 수준으로 차이가 나는데 아케이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킹 오브 파이터즈를 내는 동안 한국에서 낸 게 왕중왕에 불과했다. [3] 따지고 보면 이런 컨셉도 TBS 테레비에서 방영됐던 《 3학년 B반 킨파치 선생님》 같은 일본 학원드라마의 영향을 배제할 수가 없긴 하다. 물론 메인이 되는 유소년 배역 나잇대(설정상)의 경우 킨파치는 중학생들, 이쪽은 초등학생들(당시 국민학생)이라는 차이점도 있긴 하다. [4] 그나마 시간이 좀 지나면서 고교생 일기같은 청소년 드라마들이 방송되기는 했다. [5] 참고로 조경환은 수사반장의 엄청난 인기로 경찰공무원의 이미지를 매우 긍정적으로 바꿔놓은 일로 인해 형사 역할의 배우 전원이 명예 경찰관으로 임관했을 때 명예 경위가 되었다. 이로서 철밥통 양대산맥인 경찰과 교사를 획득했다. [6] 죠스까지 나온 바 있다. 물론 상어 다큐멘터리를 무단 삽입하고 정작 상어 모형을 조경환이 칼로 찔러버리는 허무한 최후로 나오지만 [7] 작중 대사를 통해서 90년대 공산주의는 몰락했고, 김일성은 사망, 김정일은 공산주의 몰락 때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군에서 수감 중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근데 공산주의 몰락은 맞잖아? [8] 영화배우 조춘이 표범가죽 쓰고 열연했다. [9] 잘만 끌면 괜찮은 시리즈가 될뻔했으나 어른의 사정인지 괴물이 반을 때려부수는 곳에서 갑자기 끝난다. 그리고는 해당 에피소드의 출연진들이 여의도광장에서 자전거타면서 해맑게 노는 현재의 모습으로 끝난다 [10] 1982년 3월 12일 방송분 [11] 동료 교사진 역시 나성균, 송기윤, 조남석 등에서 임현식, 김주영, 조한려, 이은경 등으로 변경되었다.(이하 출처: <TV가이드> 1983년 제85호(3월 12일) 기사 '전근가는 호랑이 선생님(전의식 기자)' p42~43. <MBC 가이드> 1983년 3월호 24~27쪽 기사( #1, #2)에서도 다루어졌다.) [12] 훗날 사춘기 1기도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학교 시리즈는 애초 미니시리즈로 출발할 때는 후속 시리즈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그냥 2학기 말로 시간대를 잡았지만 주간 단막극으로 정착하면서 극중 시간과 외부 시간을 맞추게 된다. [13] 아역 시절 <호랑이 선생님> 외에 <별하나 나하나(1977)>, <특파원001(1977)>, <우주탐험대(1979)> 등지에서 맹활약했으며, 모여라 꿈동산에서는 퉁퉁이 역할로 나왔다. 당시 퉁퉁이의 소원을 들어주거나 마법을 거는 못난이 인형 삼총사가 있었는데 세명이서 "퉁퉁이는 퉁퉁이 퉁퉁퉁" 하고 소원을 이야기 하면 이루어지는 그런 식이였다. 호랑이 선생님 촬영 때 이미 성인이였기에 촬영이 끝나고 퇴근하면서 연출과 술도 한잔 하고 조경환 배우와도 한잔하고 이런 식이였다 한다. 아역 배우(?)를 그만 두고 성인 역할을 맡게 된 1990~2000년대 초반 즈음까지 주로 조연이나 단역을 맡았다. 2012년 10월 3일 KBS2 <여유만만>을 통해 당시 92세 된 노모를 보살피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에 돌입하게 되는 근황이 나왔다. [14] 강철수 화백은 한동안 호랑이 선생님의 극본을 썼으니 따로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A] 2기에서도 등장. [A] [A] [18] 항상 하늘색 롯데자이언트 어린이 야구회원 유니폼을 입고 다녔다. [19] 위의 이준성과 형제 관계이다. 금테 잠자리 안경 혹은 뿔테 잠자리 안경을 끼고 나왔다. 도라에몽의 비실이 같은 역할. 이후 내일 뉴스, 맥랑시대 2기 등에 출연하였고 군 복무 시절 국방 홍보영화 <사나이 특공대>에 이휘재, 최진영과 함께 특공대원으로 출연했다. [20] 고등학생이었지만 알아주는 동안으로 김수겸처럼 캐스팅되었다. 이후 푸른교실과 각종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맹활약 했다. [21] 1972년생, 삼선초등학교 재학 중 캐스팅. 거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포지션이었다. 가장 많은 에피소드에 주인공 역할도 했고 나중에 성장해서 불량한 학생 역할로도 나왔고 군 복무 시절 해마 란 영화에서 최진영, 감우성과 함께 등장했다. 군 전역 후 식당 사업을 시작했으나 말아 먹고 현재는 쥬얼리 사업을 하고 있다 한다. 가끔 뮤지컬에도 출연하나 언론에 노출되지 않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 [22] 원래 1기 멤버 였으나 2기가 시작되면서 1기와는 다른 인물로 재 출연한다. [23] <뽀뽀뽀>의 '뽀숙이'로 알려진 아역 배우. [24] 당시 고교생으로 2기 아역 출연진들 중 최연장자였으며, 1986년 후속작 <꾸러기>에도 주연으로 나왔다. [25] <전원일기> 일용이 역 배우와 동명이인. [26] 1990~1991년까지 KBS <사랑이 꽃피는 나무> 2기에서도 맹활약했으나 1992년 MBC <분노의 왕국>을 끝으로 배우 생활을 접은 후 일본 니혼대학 영화학과로 유학가서 석사학위를 따고 예술전공 박사 과정까지 이수했다. 2005년 귀국 후 씨너스로 입사해 2007년 '핑크영화제'를 창안했고, 같은 해부터 엣나인필름으로 이직해 기획마케팅총괄이사도 역임했다. [27] 1969년생. 83년 KBS 날개달린 아이들, 꾸러기 합창 등 KBS아역 배우로 얼굴을 비췄다. 그 후 수많은 CF에 출연하였고 대표적인 건 오리온 도르리, 오리온 오징어 땅콩이고 유경아와 함께 등장한다. KBS 맥랑시대 시즌 2에서 이치열 역으로 등장했다. 이후 자절한 조연으로 자주 출연하다 근황이 뜸해진 배우. [28] 후술할 <TV가이드> 1984년 제178호 기사에 따르면 동년 10월 말 하차. [29] 당시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정신과장. [30] <TV가이드> 1984년 제178호 p4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