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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B3A><colcolor=#FFD700> 출생 | 1848년 7월 7일 |
브라질 제국 상파울루주 과라친게타 | |
사망 | 1919년 1월 16일 (향년 70세) |
브라질 합중 공화국 리우데자네이루 | |
재임기간 | 제5대 대통령 |
1902년 11월 15일 ~ 1906년 11월 15일 | |
경력 |
상파울루주 연방 상원의원 ,(1893~1894, 1897~1900, 1916~1918), 재무부 장관 ,(1894~1896), 브라질 제5대 대통령 ,(1902~1906), 상파울루주 주지사 ,(1912~1916), |
[Clearfix]
1. 개요
브라질 제5대 대통령이다.2. 생애
1866년 과라친게타 시의원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1870년 상파울루 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검사가 되었다. 1872년부터 1879년까지 상파울루주 주지사로 활동했다. 브라질 제1공화국 수립 후, 제헌의원이 되었고 1891년부터 1892년, 1894년부터 1896년까지 두 차례 재무부 장관직을 맡았다.1902년 3월 1일에 열린 대선에 출마하여 91.2%의 득표율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03년, 히우 브랑쿠 남작은 브라질과 볼리비아 간의 4년간 계속된 국경 분쟁을 합의하고 아크리주를 브라질로 편입하는 페트로폴리스 조약을 채결했다. 또한 브라질과 이웃한 프랑스령 기아나, 에콰도르, 페루, 콜롬비아,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사이의 영토 경계도 합의가 이뤄지며 현재의 국경과 유사하게 정해졌다.
1904년 10월 31일, 브라질에서 천연두 백신 접종이 의무화되었다. 이는 수도 정비화 사업의 일환으로 천연두, 흑사병, 황열 등의 공중 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접종을 거부할 시 벌금을 매겼다. 강제 접종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은 11월 10일, 백신 반란을 일으켰다. 11월 16일, 정부는 의무 접종을 폐지했고 반란 관련자들을 아크리주로 추방시켰다.
1906년 2월 26일, 타우바테 협약이 채결되면서 환율조정은 중단되고 커피가격 유지정책으로 방향을 돌렸다. 20세기초, 커피의 과잉공급으로 국제가격이 하락했다. 브라질 정부는 환율조정을 통해 적자를 줄이도록 했지만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브라질 정부가 초과생산분 커피를 구입하고 가격이 오르면 다시 되파는 형식이었다. 문제는 해외차관을 통해 커피를 사들였고 농장주들은 안정된 가격에 커피를 사주는 정부를 믿고 커피 생산량을 더 늘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정부 부채는 계속 쌓이고 공급과 수요 문제는 해결하지도 못했다.
1918년 대선에 다시 출마하여 99.06%의 득표율로 닐루 페사냐 후보를 꺾고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2]되었으나 취임 전 스페인 독감에 걸려 부통령이던 데우핑 모레이라가 대통령직을 대신 수행했다. 결국 1919년 1월 16일 사망하여 제10대 대통령은 모레이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