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5:22:06

주앙 굴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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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제24대 대통령
주앙 베우시오르 마르키스 굴라르
João Belchior Marques Goulart
파일:João_Goulart.jpg
출생 1918년 3월 1일
브라질 합중 공화국 히우그란지두술주 상보르자
사망 1976년 12월 6일 (향년 58세)
아르헨티나 메르세데스
재임기간 제24대 대통령
1961년 9월 8일 ~ 1964년 4월 1일
경력 노동부 장관[1],(1953~1954),
브라질 제14대 부통령 ,(1956-1961),
브라질 제24대 대통령 ,(1961~1964),
서명
파일:주앙 굴라르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정계 입문2.3. 부통령 시절2.4. 대통령 시절2.5. 쿠데타와 실각2.6. 최후

[clearfix]

1. 개요

브라질 제24대 대통령이다. '장고'[2]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일을 많이 남긴 정치인인데,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한게 많은 것도 있다. 바르가스, 쿠비체크 정권에서 노동부 장관과 부통령을 지내며 승승장구했지만 본인의 대통령 임기는 우익들의 견제와 쿠데타로 인해 3년을 채 못 채우고 군사 쿠데타로 쫓겨나고 만다.

2. 생애

2.1. 유년기

1918년 3월 1일 히오그란지두술 상보르자에서 목장주 비센치 호드리게스 굴라르와 마리아 토마스 마르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덜란드계 혈통으로 그의 성씨인 Goulart는 네덜란드 성씨 Gouvaert에서 변형된 것이다.

SC 인테르나시오나우의 청소년 팀에서 수비수로 뛰기도 했지만 왼쪽 다리 문제로 16살 때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2.2. 정계 입문

1945년 10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제툴리우 바르가스와의 친분[3]으로 정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바르가스는 자신이 창당한 브라질 노동당에 굴라르를 영입했다. 굴라르는 1947년 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4,150표를 득표해 5위를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그는 바르가스가 다시 대선에 출마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했으며 1951년 바르가스는 제17대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1950년 총선에서 굴라르는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소속당에서 두 번째로 많은 39,832표를 득표했기에 당 부대표를 맡게 되었다. 1951년 1월 히우그란지두술주의 내무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엔 브라질 노동당의 당대표가 되었다.

1953년 임금문제로 노동자의 파업이 발생하고 우익 정당인 전국민주연합(UDN)이 중상류층과 군인, 언론을 대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기미가 보이자 바르가스 대통령은 굴라르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굴라르는 노동계급의 복지에 관심이 많았고 노동자를 위한 사회보장 우대 법령를 통과시켰다. 또한 노동관련 파업을 강제 진압하지 않고 노사 간의 협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이런 노조 친화적인 행보로 인해 우익 자본가들과 군부 내 극우 장교단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전임 에우리쿠 가스파 두트라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된 정책을 전혀 건들지 않았다. 이에 굴라르는 1953년 말, 최저임금 100% 인상을 단행했고 당시 언론과 군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1954년 2월 22일, 굴라르는 장관직 사직서를 제출했고 다음날 수리되었다.

1954년 10월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허나 1955년 10월 대선에서 굴라르는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파트너인 대통령엔 사회민주당 소속인 쿠비체크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과반 득표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중도우파 정당인 국가민주연합(UDN)이 결과에 불복하며 논란이 발생했다. 게다가 당시 대통령인 카를루스 루스도 이 의견에 동조하면서 사건이 커졌지만 결국 루스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정상적으로 취임할 수 있었다.

2.3. 부통령 시절

굴라르가 속한 브라질 노동당(PTB)은 독재자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정신 차리고 민주화하는 과정에서 창립한 진보 포퓰리즘 정당이었다. 굴라르는 노동당원과 공산당원 간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조 지도자들과 활발한 접촉을 벌였다. 허나 이런 굴라르를 우파 진영에선 파업 찬동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11월 전선'이라는 우파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1960년 대선에서 굴라르는 다시 부통령 후보로 나섰고 대통령 후보로는 전 전쟁 장관인 엔히키 로트를 지명했다. 하지만 굴라르만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작 로트는 당시 우파 진영 등에서 민 자니우 쿠아드루스에게 패배했다. 이는 공화국 출범 후 최초로 여야 간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기도 했다.

하지만 쿠아드루스 대통령은 집권 이후 소속당은 있었지만 어떠한 정당과도 타협하지 않았고 소신대로 정국을 운영하는 독불장군식 행보를 보여, 냉전 시대임에도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고 당연히 우파 진영은 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또한 미인 대회에서 비키니 금지 법안 등을 내놓은 것에 대해 쓸모없는 행동으로 여기며 점점 그의 영향력이 감소했다. 결국 1961년 8월 25일 쿠아드루스 대통령은 1년여만에 사임했다.

2.4. 대통령 시절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하니에리 마질리가 잠시 대통령직을 맡았다가, 2주 정도가 지난 9월 8일 굴라르는 제2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식에서 그는 통합, 민주주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굴라르 정부는 브라질에서 유일하게 내각책임제 체제로 이루어진 정부였다. 이는 군부가 신뢰하지 않는 굴라르의 취임을 거부하자 의회에서 타협안으로 내각책임제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굴라르는 권한이 상당히 축소된 상태로 대통령직에 올랐다.[4]

그의 재임 시절은 전임 쿠비체크 정부의 메타스 계획의 여파로 브라질의 소득성장률이 많이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은 상승한 시기였다. 굴라르는 기획부 장관인 셀수 푸르타두의 조언에 따라 경제 계획으로 3년 계획을 채택했다. 에너지 분야를 강화하고 브라질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1962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전력회사인 '엘레트로브라스'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GDP 성장률도 1961년 8.6%에서 1963년 0.6%로 하락하며 실패로 돌아갔다.

이 연장선상에서 굴라르는 헌법 개혁의 절박성과 안정적인 행정 권력의 행동을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제 회귀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고, 1963년 1월 내각제 유지와 대통령제 회귀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내각제는 압도적으로 반대되었고, 굴라르는 완전한 대통령 권한을 갖게 되었다.

2.5. 쿠데타와 실각

허나 굴라르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되찾자, 당시 브라질 군부 내 극단주의자들은 좌파 성향이 짙은 굴라르 정부가 브라질을 쿠바처럼 공산화시킬까 우려했다. 그리고 무장 행동만이 포퓰리즘적 혼란을 종식시키고 공산주의의 전파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64년 3월 31일, 미나스제라이스 주이스 지 포라의 제4군구 사령관이던 올림피우 모랑 필류 장군의 주도로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다. 굴라르는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연방 상원의장인 아우르 안드라지는 군사 쿠데타에 대한 의회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5] 결국 굴라르는 포르투알레그리로 피난했고 안드라지는 대통령직이 공석이라고 발표 후 하원의장인 하니에리 마질리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한다.

결국 굴라르는 1964년 4월 4일 우루과이 망명했다.

2.6. 최후

1973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1976년 12월 6일 아르헨티나 코리엔테스주 메르세데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00년 4월 26일 전직 정치인이자 굴라르의 사위관계였던 레오네우 브리졸라[6]는 굴라르가 사실 암살당한 것이라는 주장을 했고, 추후 연구를 통해 에르네스투 가이제우 대통령이 굴라르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가설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


[1] 산업통상부 장관도 겸임. [2] 브라질 남부지역에서 주앙의 애칭으로 불린다. 그의 삼촌의 이름이기도 했다. [3] 바르가스의 형과 굴라르의 아버지가 동업을 했다. [4] 참고로 이때 취임한 초대 총리가 이후 대통령 당선인도 되는 탄크레두 네베스였다. [5] 정작 초대 총리를 지낸 탄크레두 네베스와 주셀리누 쿠비체크, 쿠아드루스 전 대통령은 쿠데타를 비판했다. 정작 안드라지 또한 군사정권 수립 이후 군부와 대립하게 되면서 숙청당하고 말았다. [6] 당시 노동당 안에서도 사회주의 성향을 지닌 정치인으로, 쿠데타 당시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를 맡으면서 굴라르 정권을 비호하였으나 실패한 이후 망명해야 했다. 브리졸라 또한 남아메리카 전역에 불던 콘도르 작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나, 미국의 지미 카터 정부가 표방한 인권정책으로 인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면과 민주화 이후에는 다시 주지사직에 복귀하고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에 여러차례 출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