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대일(大一) / 낙봉(樂峰) |
본관 | 진주 형씨[1] |
출생 | 1898년 5월 18일 |
전라북도
남원군 매내면 대산리 (現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대산마을[2] 496번지) |
|
사망 | 1977년 4월 8일[3] (향년 78세) |
묘소 |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산120번지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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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1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8년 5월 18일 전라북도 남원군 매내면 대산리(現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대산마을 496번지)에서 아버지 형종록(邢鍾祿, 1867. 6. 21 ~ 1950. 11. 25)[4]과 어머니 전주 이씨(1875. 5. 16 ~ 1945. 1. 1)[5]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926년 8월 14일 사매공립보통학교(現 사매초등학교)에서 열린 용북(龍北)청년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1927년 9월 12일 열린 사매독서회 추기(秋期)토론회에서 「우리의 살 길은 농촌이냐 도시냐」라는 주제로 토론이 진행되자 찬성 측 연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1927년 10월 9일 남원청년동맹의 용북지맹(龍北支盟)이 설치되자 이때 서무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 1월 15일 신간회 남원지회 제1회 간사회에서 선전부 간사에 배정되었다. 1929년 2월 4일 신간회 남원지회 총무간사회 준비위원으로 간사회를 준비했고, 1929년 10월 19일에는 신간회 남원지회 대표대회에서 교육출판부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 가을에는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 어느 서당에서 비밀결사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고 김창한(金昌漢)을 책임자로, 양홍주(梁鴻柱, 당시 20세)[6]를 소년부 책임자, 윤철호(尹哲鎬, 당시 31세)[7]를 남원군 동면·운봉면 책임자로 선임하고 형광욱 자신은 남원군 북면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소작료 인하 운동 및 토지세에 대한 지주들의 부담 등에 관한 문제를 결의한 뒤 농민들의 교양 수준 고취 및 동지 규합 등에 힘을 쏟았다. 1932년 2월 20일 남원군 남원읍 죽항리(現 남원시 죽항동)에 있던 김현준(金鉉濬)의 집에서 김창한의 지도 하에 여러 고용인들을 모아 고용계(雇傭契)를 조직한 뒤 김막동(金莫童)을 책임자로 정했고, 구성원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노동 임금 인상 운동을 추진해 고용주 측에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동맹파업을 단행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1932년 7월에는 양홍주의 지도 하에 사회주의를 선전하면서 점원조합 및 신문배달부 조합을 조직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 뒤 1933년 8월 동료 조합원 20여 명과 함께 남원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1933년 11월 29일 김창한·양홍주·윤철호와 함께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청 검사국에 송치되어 12월 11일까지 미토마 코타로(三笘幸太郞) 검사의 취조를 받았고,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청의 예심에 회부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철호는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아 출옥했다.
이후 반년간 예심판사 시이 요시마사(四位義正)의 취조를 받은 뒤 1934년 7월 28일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전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 8월 4일 오전 6시 25분 출발 기차로 전주형무소에 이송되었다. 8월 8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아라마키 마사유키(荒卷昌之) 부장판사의 주심으로 제1회 공판이 개정되었고, 당시 입회한 검사로부터 징역 1년형이 구형되었다. 그리고 1934년 10월 15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고향 남원군에서 여러 활동에 참여하다가 1977년 4월 8일 별세했다. 202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판사공파(判事公派)-매안(梅岸) 문중 36세 욱(旭) 항렬.
[2]
진주 형씨 집성촌으로,
독립유공자
형갑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 대산마을은 1456년(
세조 2)
단종복위운동 당시 형근(邢瑾, 1418. 9. 10 ~ 1453)이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자, 형근의 아들인 형계선(邢繼善, 1442. 5. 8 ~ 1516. 3. 4)이 난을 피해 본래 살던
남원도호부 주포면 영촌리(現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 영촌마을)에서 이곳 대산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형계선의 후손들이 이 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
#
[3]
음력
2월 20일.
[4]
초명 형상권(邢尙權).
[5]
이신의(李信儀)의 딸이다.
[6]
남원군 남원읍 쌍교리(現
남원시 쌍교동) 출신이다.
[7]
尹喆鎬라고도 한다.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