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22:03:26

해리 큐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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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큐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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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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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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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64194><colcolor=#fff> 요코하마 F. 마리노스
Yokohama F. Marinos
파일:1709668814723.jpg
이름 해리 큐얼
Harry Kewell
본명 해럴드 큐얼
Harold Kewell[1]
출생 1978년 9월 22일 ([age(1978-09-22)]세)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
국적
[[호주|]][[틀:국기|]][[틀:국기|]]
|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78kg
주발 왼발
직업 축구 선수 ( 윙어[2]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164194><colcolor=#fff> 유스 마르코니 스탤리언스 FC (1990~1993)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3~1996)
프로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6~2003)
리버풀 FC (2003~2008)
갈라타사라이 SK (2008~2011)
멜버른 빅토리 FC (2011~2012)
알 가라파 SC (2013)
멜버른 하트 FC (2013~2014)
코치 셀틱 FC (2022~2023)
감독 왓포드 FC U-21 (2015~2017)
크롤리 타운 FC (2017~2018)
노츠 카운티 FC (2018)
올덤 애슬레틱 AFC (2020~2021)
바닛 FC (2021~2022)
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24~ )
국가대표 58경기 17골 ( 호주 / 1996~2012)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개인 기록
6. 여담7. 해리 큐얼에 대한 언사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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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주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현재 요코하마 F. 마리노스 감독이다.

2000년대 초반 프리미어 리그를 풍미했던 레프트 윙어 중 한 명. 리즈 시절에는 왼발을 기가 막히게 잘 써 오즈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호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히며 드리블 돌파 능력과 날카로운 왼발 킥을 주무기로 삼았다. 국내에는 라보나 킥 강의 영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때 시한부 인생임에도 축구를 그만두지 않은 엄청난 열정의 소유자로도 알려져 있었다.[3]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파일:guvtkbUEYp4zCHULpfHjLV-1200-80.jpg
잉글랜드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축구 변방으로 불리는 호주에서 태어났음에도 축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리버풀을 응원하며 자랐다. 시드니 소재의 오코넬 스트리트에 있는 스미스필드 공립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 웨스트필드 체육 고등학교로 전학하기 전에 세인트 존스 파크 고등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10대가 되기 전에 그는 스미스필드 핫스퍼스[4]에서 유소년 축구를 한 후 10대에는 마르코니 페어필드[5]로 장소를 바꿨다.

14세 때 큐얼은 최근 주 타이틀을 획득한 마르코니 스탤리언스 FC U-14 팀과 함께 태국, 이탈리아, 영국을 여행하며 팀은 견습차원에서 AC 밀란의 유소년 팀과 영국에서 경기를 치렀다. 큐얼이 관중으로서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직관하여 유럽에서 처음으로 축구를 맛보게 되었다.

15세 때 큐얼은 영국으로 가서 프리미어 리그 클럽인 리즈 유나이티드 FC에서 4주 동안 입단 테스트를 받을 기회를 제안 받았다. 큐얼은 미래의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동료인 브랫 에머턴과 함께 영국으로 떠났다. 둘 다 리즈에서의 입단 테스트에서 성공했지만 비자 요건을 충족한 잉글랜드인 아버지의 유산으로 인하여 키웰만이 클럽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1995년에는 잉글랜드의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대부분의 유망주가 그렇듯 초반의 큐얼은 가끔씩 성인 무대에 얼굴을 내비치는 선수였고 유스팀에서 세 시즌 동안 뛰었다. 유스팀에서 그의 첫 경기는 1995년 선덜랜드와의 경기였으며, 1996년 12월 7일 로더럼과의 경기에서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큐얼은 1996년 3월 30일 프리미어 리그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홈에서 1-0으로 패한 경기에서 17세의 나이로 성인 무대 첫 프로 데뷔를 했으며 1996-97 FA 유스컵 결승전에서 크리스탈 팰리스 FC를 상대로 총 3-1 승리를 거두며 1996-97 FA 유스컵 결승전을 차지한 리즈 유나이티드 유스팀의 일원이었다.

1997-98 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성인 무대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는데 블랙번 로버스 FC와의 경기에서 첫 어시스트를 스토크 시티 FC와의 리그컵에서 성인 무대 데뷔골을 기록[6], 뉴캐슬과의 홈 경기에서 프리미어 리그 첫 골을 기록하였다.

1999-00 시즌 큐얼은 리그에서만 10골 13도움을 기록하며 라이언 긱스, 데미언 더프 등과 함께 EPL에서도 손꼽는 왼쪽 윙어로 성장했고 그 해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PFA 올해의 팀에 둘다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키웰은 갈라타사라이 SK와의 1999-2000 UEFA 컵 준결승전에서 퇴장당했다. 주로 왼쪽 윙어 역할과 세컨드 스트라이커에서 활약한 큐얼은 매우 유망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팀에서 리즈의 젊은 스타 중 하나가 되었으며 다음 시즌 부터 같은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동료 마크 비두카와 함께 뛰었다.

2000-01 시즌 큐얼은 마크 비두카, 루카스 라데베 등과 함께 리즈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리그 4강에 공헌했다. 그러나 리즈의 재정 문제는 악화되고 있었고, 2002-03 시즌을 끝으로 큐얼은 8시즌 동안 리즈에서 프리미어 리그 181경기 45골 21도움, 대회 통산 242경기 61골 27도움의 기록을 뒤로 하고 리즈를 떠나게 되었다.

한때 인터 밀란에게 루카스 라데베[7]와 함께 2500만 유로의 제의를 받았던 큐얼이었으나, 당시의 리즈는 그를 비싸게 팔 수 없는 형국이었다. 리즈시절에는 당연히 팀 전력을 약화시키는 노릇인지라 팔 수가 없었고, 막상 계약기간이 1년 남았을 때에는 보스만 룰 때문에 비싸게 팔 수가 없으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리버풀 FC, 첼시 FC, AC 밀란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클럽들이 헐값에 시장에 나온 큐얼의 영입을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큐얼은 자신이 어린 시절 응원하던 리버풀 FC로 이적했다.

파일:liverpool.jpg
리버풀의 팬들은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레프트윙의 자리를 큐얼이 매꿔줄 것으로 기대했다. 2003-04 시즌 큐얼은 리그 개막전에서 2003년 8월 17일 첼시에게 홈에서 2-1로 패했다. 큐얼은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3-0 원정 승리를 거두며 리버풀에서 첫 골을 넣으며 키웰은 리그에서 7골 2도움을 기록하며 그 당시 에밀 헤스키와 리그 득점 팀내 공동 2위[8]로 팬들의 바람을 이루어주는듯 싶었으나 점점 유리몸이 되어갔다. 2004-05 시즌은 시즌 단 한골에 리그 출장 18경기로 비록 UEFA 챔피언스 리그/2004-05 시즌/결승전에서 선발로 나오며 UEFA컵과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호주 선수가 되었지만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은 수비형 미드필더 디트마르 하만보다 큐웰을 선택해 팀의 공격 의지를 처음부터 알렸으나 큐얼은 사타구니 부상으로 전반 이른 시간에 교체되었으며 전술적 모험은 실패하였다. 리버풀은 당시 1-0으로 뒤지고 있었고 큐웰은 리버풀 팬들에 의해 경기장 밖에서 야유를 받았으며 2005년 여름에는 비공식적 스포츠 탈장을 앓고 시즌 내내 경기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05년 11월, 결승전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한 큐얼은 리버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자신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시켜 자신감을 보여준 감독 라파엘 베니테스에게 보답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의 부상에 대한 심각성을 일축하였다.

2005-06 시즌 리버풀이 1월에 토트넘 홋스퍼 FC에게서 2년여 만에 홈에서 첫 리그 골을 그리고 안필드에서 맨체스터 시티에게 득점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에버튼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다. 2006년 FA컵 결승전에 출전했으나 복통으로 전반 48분에 교체되었다. 2007년 4월 30일, 그는 에버턴 리저브와의 "미니 더비"에서 리버풀 리저브의 55분 교체 선수로 등장하며 키웰은 클럽 축구에서 거의 1년 만에 복귀했다. 2007년 5월 13일, 키웰은 프리미어 리그 찰튼 애슬레틱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후반전에 교체 투입되어 리버풀의 마지막 골을 넣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2006-07 시즌 결승전에서 바우데베인 젠던과 후반 교체 선수로 출전했지만, 리버풀은 결승전에서 밀란에게 2-1로 패했다. 2008-09시즌 결국 리버풀은 큐얼과의 계약연장을 하지 않았으며 결국 리버풀을 떠나게 되었다. 어느 정도 클래스는 있는 선수여서 나올 때마다 리버풀 시절은 나쁘지는 않았으나, 사타구니 부상을 당한 이후 폼이 떨어지며 기량이 하락하였다. 리즈와 리버풀에서 프리미어 리그 통산 274경기 57골 30도움 종합 375경기 77골 44도움을 뒤로하고 잉글랜드 생활을 청산하였다.

2008-09 시즌을 앞두고 큐얼은 리버풀을 떠나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SK로 이적했다. 큐얼의 갈라타사라이 이적은 그의 전 소속 팀이었던 리즈 유나이티드의 팬들에 의해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1999-00 시즌 갈라타사라이와 리즈 유나이티드가 UEFA컵 4강에서 맞붙었을 때 2명의 리즈 팬이 폭력사태에 휘말려 사망했기 때문이다.

터키에서의 첫 시즌 큐얼은 13골 7도움을 기록했고, 2009-10 시즌에는 14골 6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유로파리그 4강행에 공헌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큐얼은 갈라타사라이와의 계약을 연장했고 7골 5도움을 기록했다. 그러나 갈라타사라이는 프랑크 레이카르트 게오르게 하지라는 두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들이 연이은 삽질을 한 끝에 8위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기록했고, 나이도 있었고 팀의 개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큐얼은 갈라타사라이를 떠나게 되었다.

2009-10 시즌이 끝난 뒤 한 차례 자국의 골드 코스트 유나이티드의 제안을 거절한 바 있었던 큐얼은 QPR로의 이적설과 자국의 멜버른 빅토리 FC로의 이적설에 휘말렸다. 큐얼이 A-리그로 복귀하는 과정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가 구단에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큐얼의 다음 행선지는 멜버른 빅토리 FC로 정해졌고, 자국 최고의 슈퍼스타의 이적 소식에 호주의 축구팬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2011-12 시즌 리그에서 8골 4도움을 기록한 큐얼은 멜버른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장모가 암으로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유럽으로 건너가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큐얼은 12/13 시즌을 거의 무적 상태로 보냈고 시즌 막바지에 대표팀 동료인 마크 브레시아노의 대체자로 카타르의 알 가라파와 단기 계약을 맺었다. 이때 K-리그의 FC 서울도 오퍼를 넣었으나 그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해서 협상이 결렬됐다는 루머도 있다.

2013-14 시즌 큐얼은 멜버른 빅토리의 지역 라이벌인 멜버른 하트[9]로 이적했다. 그는 16경기 2골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성적을 냈고 부상 등이 겹치면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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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24일 칠레를 상대로 데뷔했으며 데뷔했을 당시 호주 국가 대표팀 역대 3번째 최연소 선수였다. 2012년까지 56경기에 나서 17골을 기록했으며 주요 대회로는 1997 컨페드컵, 2006 독일 월드컵, 2007 아시안컵, 2010 남아공 월드컵, 2011 아시안컵에 참가한 바 있다.

1997년 1996 OFC 네이션스컵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한 컨페드컵에서 호주는 조별리그를 2위로 통과했고 큐얼은 4강 우루과이를 상대로 골든골을 기록하며 팀의 결승행에 기여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호나우두, 호마리우에게 쌍으로 해트트릭을 얻어맞으며 0-6으로 대패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1997년 11월, 키웰은 이란과의 1998 월드컵 지역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 경기 1차전에서. 테헤란의 아자디 스타디움의 약 10명의 관중 앞에서 선제골을 넣었으나 이란은 호다다드 아지지가 동점골을 넣어서 1-1 무승부로 끝났다.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에서 열린 호주 축구 사상 당시 기록적인 85,513명의 관중들 앞에서 이란과의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큐얼은 두 번째 골을 넣으며 승기를 잡았나 싶었더니 이란은 반격하여 카림 바게리, 호다다드 아지지에게 두 개의 골을 허용하며 경기를 2-2로 마무리하고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하여 호주는 월드컵 진출이 좌절되었다.
파일:2504306.jpg
이 당시 이란은 큐얼과 비두카를 좌절시키고 극적으로 월드컵에 진출하였다.

4년후 2002 월드컵 지역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우루과이와 만나게 되었는데 멜버른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호주가 우루과이를 1-0으로 이겼으나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2차전 에서는 3-0으로 패배하며 탈락하며 또 그렇게 월드컵이 좌절되었다.

2003년 2월, 호주는 영국을 뒤흔들 헤드라인을 장식했는데. 업튼 파크[10]에서 벌어진 잉글랜드와 A매치에서 2번째골을 넣었고 3-1로 이겼다.

2004 OFC 네이션스컵 솔로몬 제도와의 결승전 2차전에 출전하여. 전반 8분 만에 득점하며 6-0으로 우승하였다.

2006 월드컵 지역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는 4년전 플레이오프에 이어서 또 우루과이와를 만나게 되었으며 [11]2차전에서 첫 키커로 승부차기를 결정지으며 호주의 32년 만의 월드컵 진출에 공헌했다. 대회 본선에서 큐얼은 조별리그 최종전인 크로아티아전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호주의 16강행을 주도했으나 정작 16강 이탈리아전에서는 부상 때문에 팀의 패배를 바라봐야만 했다.

2007년 아시안컵에서 큐얼은 조별 리그 최종전 태국을 상대로 골을 넣으며 4-0 대승에 기여했으나 일본과의 8강전에서 첫 번째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실축하며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2010년 월드컵 첫 경기인 독일전에 큐얼은 결장했고 팀은 0-4로 대패했다. 팀 케이힐이 그 경기에서 퇴장당하면서 큐얼은 가나전에서 선발 출전했으나 24분 만에 퇴장당했고(...) 세르비아전에도 결장했다. 호주는 가나에 골득실차에 밀려 조별 리그 탈락.

2011년 아시안컵에서 큐얼은 케이힐과 투톱을 이루며 출장했고, 조별리그 인도전 골, 8강 이라크전 헤더 결승골, 4강 우즈베키스탄전 골 등 총 3골을 기록했다. 호주는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큐얼은 일본을 상대로 득점하지 못했고 결국 연장 후반 이충성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 대회에서 큐얼은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

큐얼은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월드컵 예선전에 참가해 골을 넣었다. 이 경기 이후 큐얼은 더 이상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할 수 없었고, 현역 은퇴를 했기 때문에, 이 경기는 큐얼의 국가 대표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재치 있는 개인기와 엄청난 스피드를 지녔고 왼쪽 크로스 패스는 엄청난 정확도와 날카로움을 지녔다. 득점력과 프리킥 능력도 준수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커루의 돌격대장 역할을 맡아주기도 했고, 긱스의 후계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왼쪽 측면에서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다. 수려한 외모 덕분에 한국인 한정 좌베컴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리버풀 FC 이적 이후 잦은 부상으로 인해 리즈 시절에 보여줬던 스피드가 완전히 죽어버렸고, 그러다보니 리버풀에서는 왼쪽에서 드리블링은 시도하지만 부족한 피지컬 때문에 제대로 측면을 돌파하지 못하는 계륵 같은 윙어였다. 물론 가끔 그날이 올 때는 예외

그러나 터키 리그의 갈라타시라이에서는 예전의 날카로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쳐 주었다. 호주 A리그 이적 이후 아시아에는 왼쪽 측면 대신 중앙에서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움직이면서 특유의 탈압박과 패스로 경기를 잘 풀어갔다.

4. 지도자 경력

현역 은퇴 이후 큐얼은 유소년 구단에서 일하며 UEFA A급 지도자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2015년, 왓포드 FC의 21세 이하 구단 감독에 선임돼서 2017년까지 있었다.

이후 크롤리 타운 FC의 감독이었다가 2018년 8월 31일 노츠 카운티 FC의 감독으로 이직했다. 첫 경기는 9월 4일에 있었던 그림스비 타운 FC전이었는데 2:1로 졌다. 이후 부임한 지 석 달째인 11월 13일에 경질됐다.

최근 리버풀 대표로 레전드 매치에 얼굴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2020년 8월 2일 올덤 애슬레틱 감독으로 선임됐다. 2021년 3월 8일 사임했다.

2022년 6월 18일, 같은 호주 출신 감독인 엔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이끄는 셀틱 FC의 코치진에 합류했다.

2023년 12월 31일, 케빈 머스캣의 뒤를 이어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새 감독으로 선임됐다. 부임 초반에는 선수 활용에 어려움을 겪으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와중에 2024년 2월, 방콕 유나이티드 FC를 연장 끝에 꺾고 AFC 챔피언스 리그 8강 진출을 일궈냈다.

3월 6일, ACL 8강 1차전 최강희 감독이 이끄는 산둥 타이산 원정에서 2:1로 승리했고, 홈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면서 합산스코어 3:1로 4강 진출을 이끌었다. 요코하마 역사상 첫 ACL 4강 진출이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호주 U-20 축구 국가대표팀
    • OFC U-17 챔피언십: 1997

5.2. 개인 수상

5.3. 개인 기록

6. 여담

  • 한때 '자가 면역성 간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축구를 그만두지 않은 것으로 많은 연민을 샀다. 그러나 이는 와전된 이야기인데 우선 큐얼이 자가면역성 간염이라는 병에 걸린 것은 맞다. 그러나 시한부 인생은 아니다. 큐얼이 이 병에 걸린 것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초기였고 꾸준히 약물 치료를 받으면 별 문제 없이 살 수 있는 상태였다. 즉, 이 병은 만성 질환의 형태라는 것.
  • 한때 이 선수가 한국에 알려질 때 Kewell이라는 철자를 Ke-well로 끓어서 '해리 키웰'이라고 부르게 되고 그쪽이 먼저 익숙해졌다. 하지만 영미권에서 그를 부르는 실제 발음은 키웰이 아닌 Kew-ell로 끊은 '큐얼'에 가깝다. 해설을 들어보자. 마이클 오언이 오웬(O-wen)이 아니라 오언(Ow-en)인 것처럼 큐얼도 키웰(Ke-well)이 아니라 큐얼(Kew-ell)이다. 그래서 피파에서 히어로로 출시됐을때 피파 온라인은 큐얼, 모바일은 키웰로 출시됐다.
  • 왼발을 잘 사용해서 별명이 ' 오즈의 마법사'였다.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 그가 해결사 역할을 했다.
  • 마음의 소리의 작가 조석이 가장 좋아하는 축구 선수다. 212화 내가 축구선수가 된다면에서 언급. 다만 해리 큐얼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좋아하는 선수를 물어보면 대충 적당히 둘러대며 유명한 선수 이름을 댄다고 한다.

7. 해리 큐얼에 대한 언사

미국 유학시절 영국 SKY SPORTS 방송을 많이 봤는데 해리 큐얼의 인기가 대단했어요. 창의적이고 파괴적인 드리블을 하면서 잉글랜드스러운 이른바 리즈의 젊은 아이돌 크랙이 바로 해리 큐얼이었어요. 큐얼과 비두카가 있었던 그 리즈는 전설적인 시절이었는데 레알 마드리드 AC밀란이건 어느팀과 대결을 해도 좋은 승부를 했습니다.
한준희 #
윙어로써 갖춰야 할 능력을 대부분 지닌 선수였다. 유려한 드리블을 지니고 있었고 스피드도 준수했다. 킥도 정확하여 박스 안으로 쇄도하는 공격수들에게 완벽한 기회를 제공했다. 부상만이 아쉬운 선수였다.
STN SPORTS #
그의 수준에 맞는 선수와 동기부여가 주위의 모든 팀원을 들어올린다. 그는 세계 적인 선수다.
그레이엄 아놀드 #
그가 골을 넣어 내가 득점한 것처럼 너무 기쁘고 나에게 해리는 확실히 제가 함께 뛰었던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마크 비두카[15]
측면에 건강한 그가 있으면 안필드에 완전 새로운 선수가 있는 거 같다.
제이미 캐러거 #
내가 리즈에 있을때 큐얼과 룸메였는데 그와 긱스가 영국에서 오랫동안 뛴 최고의 왼쪽 윙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해리와 아주 잘 지냈고 잘되는 날에는 그를 멈출 수 없었다.
이언 하트 #
그가 젊은 선수들에게 유산을 남기고 프로의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존 반트 스킵[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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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요코하마 F. 마리노스 로고.svg
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24 시즌 선수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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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24 시즌[주의]
<rowcolor=#fff> 등번호 국적 포지션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생년월일 신체 조건 비고
1 파일:일본 국기.svg GK 포프 윌리엄 William Popp 1994.10.21 192cm, 86kg
2 파일:일본 국기.svg DF 나가토 카츠야 Katsuya Nagato 1995.08.25 173cm, 73kg
4 파일:일본 국기.svg DF 하타나카 신노스케 Shinnosuke Hatanaka 1995.08.25 184cm, 80kg
5 파일:브라질 국기.svg DF 에두아르두 Eduardo 1993.04.27 186cm, 80kg
6 파일:일본 국기.svg MF 와타나베 코타 Kota Watanabe 1998.10.18 165cm / 61kg
7 파일:브라질 국기.svg FW 에우베르 Élber 1992.05.27 170cm, 70kg
8 파일:일본 국기.svg MF 키다 타쿠야 Takuya Kida 1994.08.23 170cm / 64kg 주장
9 파일:일본 국기.svg FW 니시무라 타쿠마 Takuma Nishimura 1996.10.22 178cm, 76kg
10 파일:브라질 국기.svg FW 안데르송 로페스 Anderson Lopes 1993.09.15 185cm / 82kg
11 파일:브라질 국기.svg FW 얀 마테우스 Yan Matheus 1998.09.04 170cm / 71kg
13 파일:일본 국기.svg DF 코이케 류타 Ryuta Koike 1995.08.29 170cm, 67kg
14 파일:일본 국기.svg FW 우에나카 아사히 Asahi Uenaka 2001.11.01 179cm, 75kg
15 파일:일본 국기.svg DF 가미지마 다쿠미 Kamijima Takumi 1997.02.05 185cm, 80kg
16 파일:일본 국기.svg DF 카토 렌 Ren Kato 1999.12.28 175cm, 72kg
17 파일:일본 국기.svg MF 이노우에 겐타 Kenta Inoue 1998.07.23 171cm, 69kg
18 파일:일본 국기.svg MF 미즈누마 코타 Kota Mizunuma 1990.02.22 176cm, 72kg
19 파일:일본 국기.svg DF 사네토 유키 Yuki Saneto 1989.01.19 179cm, 72kg
20 파일:일본 국기.svg FW 아마노 준 Jun Amano 1991.07.19 175cm / 67kg
21 파일:일본 국기.svg GK 이이쿠라 히로키 Hiroki Iikura 1986.06.01 181cm, 71kg
23 파일:일본 국기.svg FW 미야이치 료 Ryo Miyaichi 1992.12.14 183cm, 70kg
24 파일:일본 국기.svg DF 카토 히지리 Hijiri Kato 2001.09.16 171cm, 64kg
25 파일:일본 국기.svg MF 카이나 요시오 Kaina Yoshio 1998.06.28 168cm, 63kg
26 파일:일본 국기.svg DF 고이케 유타 Yuta Koike 1996.11.06 170cm, 64kg
27 파일:일본 국기.svg DF 마츠바라 켄 Ken Matsubara 1993.02.16 180cm / 77kg
28 파일:일본 국기.svg MF 야마네 리쿠 Riku Yamane 2003.08.17 173cm, 65kg
29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MF 남태희 Nam Tae-Hee 1991.07.03. 175cm, 73kg
31 파일:일본 국기.svg GK 시라사카 후마 Fuma Shirasaka 2002.09.18 180cm, 74kg
35 파일:일본 국기.svg MF 사카키바라 케이고 Keigo Sakakibara 2000.10.09 170cm, 60kg
38 파일:일본 국기.svg FW 무라카미 유우키 Yuuki Murakami 2000.12.19 178cm, 72kg
39 파일:일본 국기.svg DF 와타나베 타이키 Taiki Watanabe 1999.04.22 180cm, 75kg
41 파일:일본 국기.svg GK 테라카도 리쿠 Riku Terakado 1992.11.18 187cm, 79kg
44 파일:일본 국기.svg DF 요시다 마나토 Manato Yoshida 2001.11.16 172cm, 63kg
47 파일:일본 국기.svg DF 야마무라 카즈야 Kazuya Yamamura 1989.12.02 186cm, 80kg
48 파일:일본 국기.svg MF 우에다 케이타 Keita Ueda 2002.09.03 174cm, 66kg
<colbgcolor=#203078> 구단 정보
감독: 해리 큐얼 / 홈 구장: 닛산 스타디움
출처:요코하마 F. 마리노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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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틀은 기기 환경에 따라 볼 때 상당히 길 수 있습니다. 스쿼드에 대한 간략한 틀은 여기를 참고해주세요. 또한 이 틀을 수정할 때는 여기도 같이 수정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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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ˈhærəld ˈkjuːəl/ [2] 세컨드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를 소화하기도 했다. [3]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자세한 내용은 후술. [4] 현재 페어필드 핫스퍼스 [5] 현재 마르코니 스탤리언스 FC [6] 그 무렵 그는 나중에 보이밴드 웨스트라이프의 멤버가 된 리즈의 골키퍼 니키 번과 룸메이트였다. [7] 리버풀로 이적하기 직전 BBC와의 인터뷰에서 큐웰은 의료진이 루카스 라데베를 아꼈고 라데베의 팀 동료들이 배척했다고 말하면서 클럽 직원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8] 시즌 총합 49경기 11골 5도움 [9] 현재는 멜버른 시티가 되었다. [10]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홈구장 [11] 이때까지 호주는 OFC 소속이었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예선 플레이오프 승자 자격이 아닌 오세아니아 지역예선 1위팀 자격으로 이전 플레이 오프에서 이란,우루과이를 만났다. 당시 아시아 플레이오프 승자는 바레인이었고, 바레인은 북중미의 트리니다드토바고를 만나 패했다. [12] PL 35라운드 셰필드 웬즈데이전 골 [13] 2022년은 사상 첫 호주의 A매치가 1922년 더니딘에서 시작된 지 100년이 되는 해 # [14] 1998-99시즌 # [15] 2006 FIFA 독일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크로아티아전이 끝나고 # [16] 당시 멜버른 하츠 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