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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큐얼/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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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소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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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축구 변방으로 불리는 호주에서 태어났음에도 축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리버풀을 응원하며 자랐다. 시드니 소재의 오코넬 스트리트에 있는 스미스필드 공립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 웨스트필드 체육 고등학교로 전학하기 전에 세인트 존스 파크 고등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10대가 되기 전에 그는 스미스필드 핫스퍼스[1]에서 유소년 축구를 한 후 10대에는 마르코니 페어필드[2]로 장소를 바꿨다.

14세 때 큐얼은 최근 주 타이틀을 획득한 마르코니 스탤리언스 FC U-14 팀과 함께 태국, 이탈리아, 영국을 여행하며 팀은 견습차원에서 AC 밀란의 유소년 팀과 영국에서 경기를 치렀다. 큐얼이 관중으로서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직관하여 유럽에서 처음으로 축구를 맛보게 되었다.

2. 리즈 유나이티드 FC

15세때 큐얼은 영국으로 가서 프리미어 리그 클럽인 리즈 유나이티드 FC에서 4주 동안 입단 테스트를 받을 기회를 제안 받았다. 큐얼은 미래의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동료인 브랫 에머턴과 함께 영국으로 떠났다. 둘 다 리즈에서의 입단 테스트에서 성공했지만 비자 요건을 충족한 잉글랜드인 아버지의 유산으로 인하여 키웰만이 클럽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1995년에는 잉글랜드의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대부분의 유망주가 그렇듯 초반의 큐얼은 가끔씩 성인 무대에 얼굴을 내비치는 선수였고 유스팀에서 세 시즌 동안 뛰었다. 유스팀에서 그의 첫 경기는 1995년 선덜랜드와의 경기였으며, 1996년 12월 7일 로더럼과의 경기에서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큐얼은 1996년 3월 30일 프리미어 리그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홈에서 1-0으로 패한 경기에서 17세의 나이로 성인 무대 첫 프로 데뷔를 했으며 1996-97 FA 유스컵 결승전에서 크리스탈 팰리스 FC를 상대로 총 3-1 승리를 거두며 1996-97 FA 유스컵 결승전을 차지한 리즈 유나이티드 유스팀의 일원이었다.

1997-98 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성인 무대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는데 블랙번 로버스 FC와의 경기에서 첫 어시스트를 스토크 시티 FC와의 리그컵에서 성인 무대 데뷔골을 기록[3], 뉴캐슬과의 홈 경기에서 프리미어 리그 첫 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더비와 토트넘 코번트리에게도 골을 넣으면서 리그 5골 1도움을 기록하였다.

1997-98 시즌: 32경기 6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9 26 3 5 1
FA컵 2 2 0 0 0
코카콜라 컵 1 1 0 1 0
합계 32 29 3 6 1

1997-98 시즌에는 기량이 더욱 만개하였는데 리버풀과 안필드 원정 경기에서 1도움을 기록하였고 14R 찰튼과의 경기에서 1골 1도움, 그리고 15R 올드 트래포드 원정 경기에서 29분에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의 골을 어시스트 하였으며 52분에 단독찬스를 맞이하여 골을 기록하여 1골 1도움의 맹활약을 하였다. 본인의 세경기 연속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은 니키 버트에게 결승골을 내주고 패배하였다. 큐얼 본인은 리그 전경기 출장에 이 시즌에 리즈 유나이티드는 리그 4위로 두 시즌 연속 UEFA컵에 진출하게 되었다.



1998-99 시즌: 47경기 9골 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8 36 2 6 9
FA컵 3 3 0 1 0
워딩턴 컵 2 2 0 2 0
UEFA 컵 4 4 0 0 0
합계 47 45 2 9 9

1999-00 시즌 큐얼은 리그에서만 10골 2도움을 기록하며 호주 축구 사상 첫 프리미어리그 두자릿 수 득점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라이언 긱스, 데미언 더프 등과 함께 EPL에서도 손꼽는 왼쪽 윙어로 성장했고 그 해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PFA 올해의 팀에 둘다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키웰은 갈라타사라이 SK와의 1999-2000 UEFA 컵 준결승전에서 퇴장당했다. 주로 왼쪽 윙어 역할과 세컨드 스트라이커에서 활약한 큐얼은 시즌 합산 20개가 넘는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매우 유망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팀에서 리즈의 젊은 스타 중 하나가 되었으며 다음 시즌 부터 같은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동료 마크 비두카와 함께 뛰었으며 팀이 리그 3위를 기록하여 본인과 소속팀은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1999-00 시즌: 53경기 17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6 36 0 10 2
FA컵 3 3 0 2 0
워딩턴 컵 2 2 0 0 1
UEFA 컵 12 12 0 5 2
합계 53 53 0 17 5

2000-01 시즌 큐얼은 초반에 아킬레스 부상으로 시즌을 절반 가까이 날렸으나 후반기에는 리 보이어, 이언 하트, 마크 비두카, 루카스 라데베 등과 함께 리즈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리그 4강에 공헌했다. 당시 파벨 네드베드, 클라우디오 로페스, 데얀 스탄코비치, 마르셀로 살라스가 있었던 SS 라치오와 챔피언스 리그 16강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리 보이어의 골을 헤딩으로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으며 같은 호주 선수 마크 비두카도 골을 넣으며 그날은 호주 축구의 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와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에서도 도움을 기록하였고 리즈는 원정에서는 0대2로 패했지만 득실차로 4강에 진출하였다. 이 시절 리즈는 유스팀에서 올라온 선수들과 유망주들을 무리하게 구매하여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올랐지만 리그에서는 승점 1점 차이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였다.



2000-01 시즌: 26경기 2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7 12 5 2 4
UEFA 챔피언스 리그 9 6 3 0 3
합계 26 18 8 2 7

2001-02 시즌: 35경기 11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7 26 1 8 2
워딩턴 컵 1 1 0 1 0
UEFA 컵 7 7 0 2 0
합계 35 34 1 11 2

2002-03 시즌에는 본인의 프리미어 리그 커리어 최다 득점이자 리그 순위권[4]에 올랐으며 마크 비두카도 20골로 리그 득점 순위권에 호주 선수가 2명이나 들어가는 호주 축구의 역사적인 시즌이었다.
그러나 비싸게 데려온 선수를 헐값에 팔고 비싼 값에 데려온 새로운 선수들도 나락에 떨어지고 높은 주급을 감당하느라 무리한 대출까지 끌어쓰는 등 리즈의 재정 문제는 악화되고 있었고, 2002-03 시즌을 끝으로 큐얼은 8시즌 동안 리즈에서 프리미어 리그 181경기 45골 21도움, 대회 통산 242경기 61골 27도움의 기록을 뒤로 하고 리즈를 떠나게 되었다.

한때 인터 밀란에게 루카스 라데베[5]와 함께 2500만 유로의 제의를 받았던 큐얼이었으나, 당시의 리즈는 그를 비싸게 팔 수 없는 형국이었다. 리즈시절에는 당연히 팀 전력을 약화시키는 노릇인지라 팔 수가 없었고, 막상 계약기간이 1년 남았을 때에는 보스만 룰 때문에 비싸게 팔 수가 없으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리버풀 FC, 첼시 FC, AC 밀란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클럽들이 헐값에 시장에 나온 큐얼의 영입을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큐얼은 자신이 어린 시절 응원하던 리버풀 FC로 이적했다.

2002-03 시즌: 40경기 16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31 0 14 4
FA컵 3 3 0 1 0
워딩턴 컵 1 1 0 0 0
UEFA 컵 5 5 0 1 0
합계 40 40 0 16 4

3. 리버풀 FC

파일:liverpool.jpg
리버풀의 팬들은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레프트윙의 자리를 큐얼이 매꿔줄 것으로 기대했다. 2003-04 시즌 큐얼은 리그 개막전에서 2003년 8월 17일 첼시에게 홈에서 2-1로 패했다. 큐얼은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3-0 원정 승리를 거두며 리버풀에서 첫 골을 넣으며 키웰은 리그에서 7골 2도움을 기록하며 그 당시 에밀 헤스키와 리그 득점 팀내 공동 2위[6]로 팬들의 바람을 이루어주는듯 싶었으나 점점 유리몸이 되어갔다.

2003-04 시즌: 49경기 11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6 36 0 7 3
FA컵 3 3 0 0 1
칼링 컵 2 0 2 1 0
UEFA 컵 8 8 0 3 1
합계 49 47 2 11 5

2004-05 시즌은 시즌 단 한골에 리그 출장 18경기로 비록 2005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선발로 나오며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한 최초의 호주 선수가 되었지만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은 수비형 미드필더 디트마르 하만보다 큐웰을 선택해 팀의 공격 의지를 처음부터 알렸으나 큐얼은 사타구니 부상으로 전반 이른 시간에 교체되었으며 전술적 모험은 실패하였다. 리버풀은 당시 1-0으로 뒤지고 있었고 큐웰은 리버풀 팬들에 의해 경기장 밖에서 야유를 받았으며 2005년 여름에는 비공식적 스포츠 탈장을 앓고 시즌 내내 경기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05년 11월, 결승전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한 큐얼은 리버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자신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시켜 자신감을 보여준 감독 라파엘 베니테스에게 보답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의 부상에 대한 심각성을 일축하였다.

2004-05 시즌: 31경기 1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8 15 3 1 2
UEFA 챔피언스 리그 플레이오프 2 2 0 0 1
칼링 컵 1 1 0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10 5 5 0 1
합계 31 23 8 1 4

2005-06 시즌 리버풀이 1월에 토트넘 홋스퍼 FC에게서 2년여 만에 홈에서 첫 리그 골을 그리고 안필드에서 맨체스터 시티에게 득점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에버튼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다. 2006년 FA컵 결승전에 출전했으나 복통으로 전반 48분에 교체되었다.

2005-06 시즌: 41경기 3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7 22 5 3 3
FA컵 6 4 2 0 1
칼링 컵 1 1 0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6 2 4 0 0
클럽 월드컵 1 1 0 0 0
합계 41 30 11 3 4

2007년 4월 30일, 그는 에버턴 리저브와의 "미니 더비"에서 리버풀 리저브의 55분 교체 선수로 등장하며 키웰은 클럽 축구에서 거의 1년 만에 복귀했다. 2007년 5월 13일, 키웰은 프리미어 리그 찰튼 애슬레틱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후반전에 교체 투입되어 리버풀의 마지막 골을 넣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2006-07 시즌 결승전에서 바우데베인 젠던과 후반 교체 선수로 출전했지만, 리버풀은 결승전에서 밀란에게 2-1로 패했다. 2008-09시즌 결국 리버풀은 큐얼과의 계약연장을 하지 않았으며 결국 리버풀을 떠나게 되었다. 어느 정도 클래스는 있는 선수여서 나올 때마다 리버풀 시절은 나쁘지는 않았으나, 사타구니 부상을 당한 이후 폼이 떨어지며 기량이 하락하였다. 리즈와 리버풀에서 프리미어 리그 통산 274경기 57골 30도움 종합 375경기 77골 44도움을 뒤로하고 잉글랜드 생활을 청산하였다.

2006-07 시즌: 3경기 1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 0 1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2 0 2 1 0
합계 3 0 3 1 0

2007-08 시즌: 15경기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0 8 2 0 1
FA컵 1 0 1 0 0
칼링 컵 1 0 1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3 1 2 0 3
합계 15 9 6 0 4

4. 갈라타사라이 SK

2008-09 시즌을 앞두고 큐얼은 리버풀을 떠나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SK로 이적했다. 큐얼의 갈라타사라이 이적은 그의 전 소속 팀이었던 리즈 유나이티드의 팬들에 의해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1999-00 시즌 갈라타사라이와 리즈 유나이티드가 UEFA컵 4강에서 맞붙었을 때 2명의 리즈 팬이 폭력사태에 휘말려 사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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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의 첫 시즌 큐얼은 13골 7도움을 기록했고, 2009-10 시즌에는 14골 6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유로파리그 4강행에 공헌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큐얼은 갈라타사라이와의 계약을 연장했고 7골 5도움을 기록했다. 그러나 갈라타사라이는 프랑크 레이카르트 게오르게 하지라는 두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들이 연이은 삽질을 한 끝에 8위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기록했고, 나이도 있었고 팀의 개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큐얼은 갈라타사라이를 떠나게 되었다.

2009-10 시즌이 끝난 뒤 한 차례 자국의 골드 코스트 유나이티드의 제안을 거절한 바 있었던 큐얼은 QPR로의 이적설과 자국의 멜버른 빅토리 FC로의 이적설에 휘말렸다. 큐얼이 A-리그로 복귀하는 과정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가 구단에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큐얼의 다음 행선지는 멜버른 빅토리 FC로 정해졌고, 자국 최고의 슈퍼스타의 이적 소식에 호주의 축구팬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5. 말년

2011-12 시즌 리그에서 8골 4도움을 기록한 큐얼은 멜버른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장모가 암으로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유럽으로 건너가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큐얼은 12/13 시즌을 거의 무적 상태로 보냈고 시즌 막바지에 대표팀 동료인 마크 브레시아노의 대체자로 카타르의 알 가라파와 단기 계약을 맺었다. 이때 K-리그의 FC 서울도 오퍼를 넣었으나 그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해서 협상이 결렬됐다는 루머도 있다.

2013-14 시즌 큐얼은 멜버른 빅토리의 지역 라이벌인 멜버른 하트[7]로 이적했다. 그는 16경기 2골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성적을 냈고 부상 등이 겹치면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 현재 페어필드 핫스퍼스 [2] 현재 마르코니 스탤리언스 FC [3] 그 무렵 그는 나중에 보이밴드 웨스트라이프의 멤버가 된 리즈의 골키퍼 니키 번과 룸메이트였다. [4] 공동 8위 [5] 리버풀로 이적하기 직전 BBC와의 인터뷰에서 큐웰은 의료진이 루카스 라데베를 아꼈고 라데베의 팀 동료들이 배척했다고 말하면서 클럽 직원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6] 시즌 총합 49경기 11골 5도움 [7] 현재는 멜버른 시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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