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니[2]
외부 모습.
내부 모습.
https://www.berliner-philharmoniker.de/en/philharmonie/virtual-tour/
베를린 필하모니 가상 투어를 할 수 있다.
1. 개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8-2019 시즌 소개 영상독일의 베를린 티어가르텐 지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거리 1번지에 있는 2250석 규모의 콘서트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이기도 하며,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 등 여타 베를린 소재 관현악단들의 주요 공연장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니 콘서트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잘못된 명칭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홀" 또는 "베를린 필하모니"라 부르는게 정확한 명칭이다.
2. 구 필하모니 (Alte Philharmonie)
구 필하모니를 3D로 복원한 모습.
옛 필하모니 건물은 1876년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루도비코 사체르도틴이 베른부르크 거리 22~23번지에 롤러 스케이트장으로 만든 건물이 원형이었다. 이 스케이트장은 당시 롤러 스케이트 열풍에 힘입어 꽤 장사가 잘 되고 있었지만, 1880년대 초반이 되자 유행이 사그라들며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용도 변경이 시도되었는데, 때마침 벤야민 빌제가 소유한 베를린 소재 사설 관현악단이었던 빌제 악단의 많은 단원들이 집단으로 퇴단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새 악단을 만들면서 공연장을 물색하고 있었다. 악단 측은 건물주와 접촉해 협상한 끝에 스케이트장을 콘서트홀로 바꾼다는 데 합의했고, 1882년 여름부터 상주 공연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의 필하모니는 스케이트장 시절의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아서, 1층 객석은 가로로 펑퍼짐하게 늘어서고 악단이 착석하는 무대가 대편성 작품을 공연하기에 좁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1888년에 건축가 프란츠 슈베히텐에게 1887/88년 공연 시즌 종료 후 내부 리모델링을 의뢰해 5개월 동안 공사에 들어갔다. 우선 건물의 세로면을 계단식 무대로 개조하고, 좌석도 레스토랑을 겸하던 1층의 테이블을 싹 치우고 나무의자를 가지런히 배열하는 슈박스형 콘서트홀 식으로 뜯어고쳤다. 또 리모델링과 병행해 슐레지엔의 오르간 공방이었던 슐라크 운트 죄네가 파이프오르간을 무대 벽면에 설치했다. 3D로 복원한 사진에서 무늬가 화려한 신전 같은 구조물이 파이프오르간인데, 일반적으로 파이프를 전면에 보이게 하는 파이프오르간과 달리 무늬가 있는 창살로 막아놓아 파이프가 막혀 보이지 않는 골때리는 형태를 하고 있다.[3] 이렇게 전면을 창살로 막아놓은 오르간은 정상적으로 소리가 나긴 나지만 일반적으로 파이프가 드러난 파이프오르간보다는 소리가 퍼지거나 파이프 소리가 창살에 부딛혀 소리가 좋지 않게 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생긴 모습 또한 꽉 막힌 듯한 모습이라 특징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건축 미술 전문가들은 19세기에 지어진 이 필하모니를 미학적으로 구시대 건물이라고 비판하곤 했지만, 필하모니는 음향 상태가 탁월했고 베를린 필 뿐 아니라 베를린 소재 관현악단들이나 합창단의 공연 무대로 각광받으며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 베를린을 상징하는 중심 공연장이 되었다. 공연이 아닌 공개 강연이나 연설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건물을 지은 사체르도틴의 이름을 따 사체르도티움(Sacerdotium)이라는 애칭으로, 1920년대 들어 악단과 자주 공연하던 비올라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였고 철덕으로 유명했던 파울 힌데미트의 이름을 따 힌데미트 역(Bahnhof Hindemith)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 필하모니도 베를린 소재 다른 공연장들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공군 폭격기들의 폭격에 수시로 노출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30일에 소이탄 공격을 받아 완파되고 말았다. 필하모니가 완파되면서 내부에 소장 중이던 악단 소유 악기와 악보 대부분이 전소되었고, 베를린 필은 종전 후에도 몇 년 동안 이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필하모니의 완파 전후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는 영상이다.
종전 후 구 필하모니 자리에는 작은 공원이 들어서 있고, 입구에 구 필하모니 자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만들어져 있다.
3. 현재의 필하모니
폭격으로 공연장을 잃은 베를린 필은 운터 덴 린덴의 국립오페라극장이나 구 필하모니의 부속 공연장이었던 쾨텐 거리의 베토벤 홀, 대중 쇼 공연장이었던 아드미랄팔라스트 등에서 공연하다가 종전을 맞았고, 종전 후에는 폐허가 된 베를린 시내에 그나마 파괴되지 않은 온갖 크고 작은 잡다한 홀과 야외 무대 등을 정신없이 전전하다가 베를린 시의 전후 복구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서면서 대형 영화관이었던 티타니아 팔라스트나 베를린 음악대학(현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부)의 콘서트홀을 주요 공연장으로 사용했다.하지만 이 홀들은 각각 음향 상태와 협소한 공간이 문제가 되었고, 또 본래 목적과 소속이 엄연히 달라서 상주 공연장으로 쓸 수도 없었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리허설은 달렘 지구의 교구 회관(게마인데하우스) 강당에서, 음반 녹음은 교구 회관 근처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공연은 이 홀들에서 따로 해야 했기 때문에 늘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했고, 이들 공간에는 악단원 전용 라커룸이나 악보/악기 보관실도 없어서 악단의 행정 조직도 큰 불편을 겪었다. 특히 녹음에 열성적이었던 카라얀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음향 상태를 탁월하다고 평가했지만, 바로 근처에 템펠호프 공항이 있어서 비행기 이착륙 때마다 녹음을 중단해야 하는 번거로움에는 자주 불만을 표했다.
이 때문에 이미 1949년에 각각 초대 서독 대통령과 서독 총리였던 테오도어 호이스와 콘라트 아데나워, 베를린 분할 후 첫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에른스트 로이터 등 거물급 정치인과 언론인, 경제인들이 주축이 된 필하모니 재건을 위한 후원회가 발족한 바 있었고, 1950년에는 필하모니 재건 기금 마련을 위한 우표도 발행된 바 있다. 또 1952년 상임지휘자로 복귀한 푸르트벵글러도 전용홀 건립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구상은 1950년대 중반에야 시작되었고, 1956년에 부지 선정에 대한 공식 발표가 있었다. 확정된 부지는 포츠담 광장 근처의 켐퍼플라츠에 위치한 공지였는데, 나치 독일 시절 건축가이자 고위 관료였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베를린을 게르마니아 제국 수도로 마개조하는 건축안을 발표했을 때 수십만 명을 수용하기 위한 대강당을 지으려던 곳이었다. 이 곳은 구 필하모니와도 많이 떨어져 있고, 또 동베를린과의 경계선 바로 앞이라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서베를린 시에서는 이 곳 외의 대안을 찾지 못했고 그 자리에 지어지게 되었다. 1956년 12월에 열린 설계 공모전에서 카라얀과
샤룬 설계의 새 필하모니는 착공 후 3년 여 뒤인 1963년 10월 15일에 공식 개관했고, 오전에 빌리 브란트의 연설로 시작된 개관식에 이어 저녁에는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공연했다.[4] 이 필하모니는 1980년대까지 주변에 연이어 신축된 미스 반 데어 로에 설계의 신국립미술관, 샤룬의 또 다른 설계작인 베를린 국립 도서관과 샤룬의 제자 에드가 비스니엡스키의 악기 박물관 등과 더불어 서베를린 시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문화광장(Kulturforum)의 중심축을 이루었다.
4. 특징
유럽과 미국에 많이 있는 19세기 이래의 기존 콘서트홀들은 대부분 구두상자 형태의 직사각형 구조를 한 건물로 되어 있고, 객석은 무대와 마주보는 플로어와 플로어를 둘러싼 2층으로 구성되는 슈박스(shoebox) 형태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개축된 구 필하모니도 마찬가지 구조를 답습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콘서트홀은 객석의 시야 확보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문제가 늘 따라다녔다. 이 때문에 샤룬은 무대를 공간 가운데에 놓고 그 주위를 객석이 경사진 형태의 방사상으로 쭉 둘러싸도록 설계했고, 어느 공간에 앉던 간에 무대 조망이 좋게 만들었다. 이후 이러한 방사형 경사식 좌석 배치의 콘서트홀은 그 모양이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조성한 포도밭과 흡사하다고 해서 빈야드(vineyard)식 홀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리되었다.외부도 전통적인 콘서트홀의 육중한 사각형 형태를 지양하고 거대한 오각형 프리스트레스드(PS) 콘크리트 건물을 기조로 외벽을 노란색 알루미늄 금속 천공판으로 마감해 천막 형태의 모던한 느낌을 주는데, 그 독특한 모양새 때문에 베를린 시민들은 일찌감치 '카라얀의 서커스(Zirkus Karajani)'또는 '콘서트 상자(Konzertschachtel)'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설계였던 이 새 필하모니는 이후 건립되고 있는 수많은 현대식 콘서트홀의 설계에 영감을 주고 있고, 일본을 즐겨 방문했던 카라얀도 도쿄에 산토리 음악 재단이 지으려던 새 콘서트홀에 필하모니식 설계를 적극 추천해 산토리홀이라는 공연장으로 실현되는 등 아시아에서도 영향력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5. 문제점
다만 개관 초기에는 홀의 혁신적인 내외부 디자인 뿐 아니라 음향 면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개관 후 객원 지휘자로 무대에 선 오토 클렘페러와 오이겐 요훔[5], 조지 셀, 파울 힌데미트 등은 홀이 디자인과 음향 모두 실패작이라고 격하게 디스해 버렸고, 한스 크나퍼츠부슈는 아예 공연 제의를 거절해 버렸다[6]. 이들은 새로 만들어진 필하모니가 무대를 중심으로 놓은 탓에 소리가 산만하게 퍼져나가는 '혼파망'이 되었다고 지적했고, 어느 악단이나 합창단도 자신들의 연주를 공간에 맞추어야 하는 곤경을 겪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실제로 샤룬의 설계는 무대와 객석을 양분하는 기존 개념을 깨고 무대 뒤에도 객석을 배분했기 때문에, 무대 뒤가 벽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객석으로 소리가 쉽게 뻗어갈 수 있는 기존 슈박스형 콘서트홀과는 음향 환경이 많이 달라져 버렸다. 이는 마침내 상주 공연장을 갖게 된 베를린 필도 예외가 아니어서, 새 필하모니에 들어간 뒤 베를린 필의 단원들은 연주법을 홀의 음향 환경에 맞게 바꿔나가야 했다. 특히 관악기 단원들의 경우 음량이 작은 기존 악기들 대신 좀 더 명징하고 힘있는 소리의 악기들로 점진적으로 교체했다.
무대의 뒤쪽까지 객석을 놓은 덕에 유럽식 콘서트홀의 필수요소인 파이프오르간 설치도 난항을 겪었는데, 샤룬이 설계안에 오르간을 포함시키지 않은 탓에 결국 개관 후 오르간을 들여놓을 때는 유일하게 남는 공간이었던 무대 오른편 위쪽에 설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여기서 오르간이 편성된 관현악 작품들을 녹음한 음반들을 들어보면, 오르간 소리가 정중앙이 아닌 오른쪽 채널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 오르간 전문 건축사인 칼 슈케에서 1965년에 설치한 이 오르간은 이후 2012년과 2016년에 추가 개축을 거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쯤되면 세종문화회관이 빈야드식이란 것만 빼고 전세계 모든 콘서트홀의 단점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건축 이후
건축 후에도 음향 환경 개선을 위한 크고 작은 보수 공사가 종종 있었고, 이 때문에 카라얀과 베를린 필은 음반 녹음은 예전처럼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계속 진행하다가 1973년에 들어서야 필하모니에서 녹음을 만들기 시작했다. 카라얀에 따르면 필하모니 홀의 음향에는 원래 문제가 없었지만 필하모니 홀과 예수 그리스도 교회 간에 악기를 운반하하는 인부들의 노조의 반대로 지연된 것이라고 훗날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오이겐 요훔 같은 객원 지휘자들도 개관 초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필하모니에서 녹음을 제작하기도 했다.[7]샤룬 설계의 계단식 무대는 1975년에 에드가 비스니엡스키가 연주되는 악곡의 편성에 따라 가변 조정할 수 있도록 상하 이동식 무대로 추가 보수했다.
이후 베를린에 실내악 공연을 위한 적당한 시설이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필하모니 바로 옆의 부지를 추가로 매입해 실내악당(Kammermusiksaal)의 건축이 1984~87년 동안 진행되었다. 샤룬의 미완성 유작을 바탕으로 비스니엡스키가 완성한 설계도에 따라 필하모니의 축소판 형태로 지어졌고, 필하모니와 실내악당 두 공연장 사이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실내악당의 개관식은 1987년 10월 28일에 열렸고, 카라얀이 자신이 총애하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와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했다. 주로 베를린 필 단원들의 실내악 그룹들을 비롯한 실내악 공연에 쓰이지만, 실내악 공연장 치고는 꽤 큰 1180석의 수용 규모와 넓은 무대를 갖고 있어서 베를린 시내의 아마추어 혹은 소규모 사설 관현악단들의 공연도 자주 열린다.
7. 사건사고
1988년 6월 28일 베를린 필의 무대 리허설 직전에 음향 반사용으로 무대 위에 설치한 라비츠 석고 반향판들의 일부가 무대 위로 떨어져 박살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지만, 이후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반향판 밑에 안전망을 달아놓았다. 하지만 반향판 노후화 외에도 이전에는 별다른 규제 없이 건축에 사용했던 석면이 발암 물질로 밝혀져 대규모 재시공이 불가피해지자, 1990년 10월에 공청회를 열어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1991년 초반에 아예 문을 닫고 이듬해까지 석면 완전 제거를 포함한 홀 내부의 전면 보수 작업을 했다. 이 기간 동안 베를린 필은 동베를린의 대표적인 콘서트홀인 샤우슈필하우스(현 콘체르트하우스)를 빌려서 썼다. 재개관은 1992년 4월에 있었고, 당시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한 쇤베르크의 대규모 칸타타 '구레의 노래'로 기념 공연이 열렸다.2008년 5월에는 외부 개보수 공사 중 지붕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원인은 용접 작업 중의 실수로 인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피해 복구를 위해 열흘 가량 잠시 문을 닫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잡혀 있던 공연은 템펠호프 공항의 격납고에서 대신 열렸다.
8. 그 외
2011년 11월 홀 바로 옆 부지에 나치의 장애인 말살 정책이었던 T4 작전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작전의 상세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었다.9. 관련 문서
[1]
독일어
[2]
보통 "필하모니"라 하면 바로 이곳,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칭한다.
[3]
이렇게 파이프가 외부에 드러나 있지 않은 파이프 오르간은 경건주의 교회나 북미의 극장형 강당(오디토리엄) 중 일부에 설치되는 스타일이며 오스트리아 빈의 콘체르트하우스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도 설치되어 있다.
[4]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5]
요훔은 홀이 녹음에 적합하지 않다며 싫어했다. 카라얀도 선배의 이 비판을 받아들였는지 음향을 조정하기 위해 홀을 개장하는 동안에는 녹음을 필하모니에서 진행하지 않고 베를린 예수 그리스도 교회나 다른 스튜디오에서 진행했다.
[6]
여담이지만 아바도와 폴리니 등은 베를린 필하모니의 음향은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7]
요훔이 베를린 필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해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제작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1~9번 세트 중
8번의 녹음이 1964년 1월에 필하모니에서 취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