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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의 프리데리케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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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2EBF2><colcolor=#000> 그리스 왕국 파블로스의 왕비
하노버의 프리데리케 공주
Prinzessin Friederike von Hannover
파일:HRH_Princess_Frederica_of_Hanover.jpg
이름 독일어 프리데리케 루이제 티라 빅토리아 마르가리타 조피아 올가 체칠리아 이자벨라 크리스타
(Friederike Luise Thyra Victoria Margarita Sophia Olga Cecilia Isabella Christa)
그리스어 프레데리키
(Φρειδερίκη)
출생 1917년 4월 18일
독일 제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블랑켄부르크
사망 1981년 2월 6일 (향년 63세)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배우자 파블로스 (1938년 결혼 / 1964년 사망)
자녀 소피아, 콘스탄티노스 2세, 이리니
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어머니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
형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게오르크 빌헬름, 크리스티안 오스카, 벨프 하인리히
종교 루터교회 →  정교회 ( 그리스 교회)
서명 파일:하노버의 프리데리케 공주 서명.sv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결혼3.3. 전쟁과 망명3.4. 왕비3.5. 왕대비3.6. 망명과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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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왕국 파블로스의 왕비이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 왕녀의 고명딸. 하노버 가문의 당주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 여동생이며, 스페인 소피아 왕대비와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의 어머니이다. 現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의 외할머니이다.

2. 작위

파일:Coat of Arms of Frederica of Hanover.svg
<rowcolor=#000> 문장

3. 생애

3.1. 어린 시절

1917년 4월 18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빌헬름 2세 고명딸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 사이에서 4남 1녀 중 셋째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프레디(Freddi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1918년,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에서 물러났고, 외할아버지 빌헬름 2세 또한 독일 제국의 황제 자리에서 폐위당했다. 할아버지 하노버 왕세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도 영국의 왕자 작위를 박탈당하여 프레데리케 또한 더 이상 영국의 공주 작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34년, 아돌프 히틀러는 17살이 된 프리데리케 공주를 영국 에드워드 왕세자와 혼인시키려 하였으나, 에드워드 왕세자는 프리데리케 공주보다 23살이나 연상이었고[1] 프레데리케의 부모가 결혼을 원하지 않아 결국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파일:10-01.jpg
부모님, 오빠들, 남동생들과 함께

3.2. 결혼

파일:2021-1023-greekbrides01.jpg
결혼 사진
1936년 여름, 베를린 올림픽에 참석한 그리스의 파블로스 왕자 베를린에서 프리데리케에게 청혼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16살 차이였으며(...) 프리드리히 3세를 기준으로 5촌이었고,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는 6촌이었다. 1937년 9월 28일 약혼한 후 1938년 1월 9일 아테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 지 열 달 후인 1938년 11월 2일 첫 아이 소피아 공주를 출산하고[2], 2년 뒤 1940년 6월 2일 둘째 아이이자 그리스의 마지막 군주 콘스탄티노스 2세를 낳았다.

3.3. 전쟁과 망명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그리스 왕족들은 그리스 침공 때문에 크레타 섬으로 피신했으나 독일군들은 그곳도 공격했고, 결국 또 다시 런던 망명정부를 세워야 했다. 망명하는 동안 요르요스 2세를 제외한 그리스 왕족들은 남아프리카에서 지냈는데 이곳에서 막내딸인 이리니 공주가 태어났다.
파일:Paul-Irene-Sophia-Constantine-Queen-Greece-Frederika-1947.jpg
남편, 아이들과 함께.
전쟁이 끝난 후 1946년에 요르요스 2세는 다시 그리스 국왕으로 공식 복위했고 파블로스와 프레데리키는 피히코에서 거주했다.

3.4. 왕비

1947년 4월 1일, 시숙 요르요스 2세가 자녀 없이 사망함으로써 파블로스와 프레데리키는 각각 그리스 왕국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

프레데리키는 독일 혈통이라는 점 때문에 항상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리스의 좌파 정치인들은 프레데리키의 외할아버지가 빌헬름 2세이며, 그녀의 오빠와 남동생들도 나치 친위대의 일원이라고 비판했다.[3] 파블로스의 사촌인 필립 마운트배튼 엘리자베스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에는 윈스턴 처칠이 대놓고 빌헬름 2세의 외손녀라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 이에 대해 프레데리키는 "나는 빌헬름 2세의 외손녀이긴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기도 하며[4], 만약 살리카법이 적용되었다면 내 아버지가 영국의 왕이 되었을 것이다.[5]"라며 강하게 맞대응 했다고 한다.

이후 그리스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리스 내전을 일으켰는데 그 동안 프레데리키 왕비는 아이들을 위한 53개의 구호소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프레데리키 왕비의 정치 개입은 국내와 외국을 통틀어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3.5. 왕대비

1964년 3월 6일, 남편 파블로스가 암으로 사망하고 아들 콘스탄티노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 해 9월 콘스탄티노스 2세는 덴마크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6]와 결혼식을 올렸고 프레데리키 왕대비는 많은 권한을 며느리에게 물려준 후 공적 임무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프레데리키는 여전히 논란의 인물로 남아있었으며, 사치와 정치 개입 문제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1974년 민주화 및 국민투표를 주도한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총리가 1963년에 파블로스 국왕 부부와 갈등을 빚다가 사임을 한 사람이고, 국민투표 당시 콘스탄티노스 2세가 TV 연설에서 어머니를 그리스에서 배제하겠다고 약속했었던 점을 보면 프레데리키 왕비가 어떤 면에서는 본의 아니게 그리스 왕정 폐지에 공헌한 셈이다.

3.6. 망명과 사망

파일:gettyimages-1135958905-594x594.jpg
말년의 프레데리키
파일:프리데리케와 빅토리아 루이제.jpg
말년에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1967년 4월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듯 보였으나 그 해 말 역쿠데타를 시도했고, 이것이 실패하자 프레데리키 등 일가족과 함께 그리스를 떠나야 했다. 결국 콘스탄티노스 2세는 1973년 6월 공식 폐위당했고(7월 29일 국민투표로 확정), 74년 여름 군사정권 붕괴 이후 12월의 왕정복고 국민투표도 부결되어 왕위를 되찾지 못했다. 다행히 큰 딸 소피아가 1975년 11월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고, 이후 프레데리키는 스페인과 런던을 오가며 둘째 딸 이리니와 함께 인도에서 지내기도 했다. 이후 어머니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가 사망한 지 두 달 뒤인 1981년 2월 6일 마드리드에서 눈 수술을 받다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무덤은 우여곡절 끝에[7] 사망 6일 후인 2월 12일에 남편 파블로스가 묻혀 있는 타토이 궁전[8]에 안장되었다.[9]

4. 가족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하노버 왕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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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하노버의 프리데리케
(Frederica of Hanover)
<colbgcolor=#fff3e4,#331c00>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Ernest Augustus, Duke of Brunswick)
<colbgcolor=#ffffe4,#323300> 하노버의 왕세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Ernest Augustus, Crown Prince of Hanover)
게오르크 5세
(George V)
작센알텐부르크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Saxe-Altenburg)
덴마크의 티라 공주
(Princess Thyra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
(Princess Victoria Louise of Prussia)
빌헬름 2세
(Wilhelm II)
프리드리히 3세
(Frederick III)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10]
(Victoria, Princess Royal)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Augusta Victoria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Augustenburg)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프리드리히 8세
(Frederick VIII, Duke of Schleswig-Holstein)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아델하이트 공녀
(Princess Adelheid of Hohenlohe-Langenburg)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파블로스
(Paul)
1녀 스페인의 소피아 왕비
(Queen Sofía of Spain)
1938년 11월 2일 후안 카를로스 1세
슬하 1남 2녀[11]
1남 콘스탄티노스 2세
(Constantine II)
1940년 6월 2일 2023년 1월 10일 덴마크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 [12]
슬하 3남 2녀
2녀 이리니 공주
(Princess Irene)
1942년 5월 11일


[1] 어머니보다도 두 살 어리다. 근데 어머니도 10대 때 에드워드 왕세자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2] 귀천상혼 계통을 제외한 빌헬름 2세의 증손주들 중 가장 맏이이다. [3] 큰오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는 아예 슈츠슈타펠에까지 가입한 극렬 나치 지지자였고 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직접적으로 나치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후원금을 보내며 나치의 주요인사들과 친하게 지냈다. 외가인 독일 황실쪽으로 가면 외삼촌들도 대부분 나치에 호의적이였고 그중에서 특히 넷째 외삼촌 아우구스트 빌헬름 돌격대에까지 가입한 히틀러의 열렬 추종자였다. 그나마 외할아버지 빌헬름 2세가 점차 나치를 불신하였고 아우구스트 빌헬름도 외인 취급했다. 이렇듯 친가와 외가 할 것 없이 일가친척들이 죄다 나치 지지자였으니 반발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4]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이다. [5] 만약 영국에 살리카법이 적용되었다면 빅토리아 여왕은 여자이기 때문에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조지 3세의 5남인 하노버 국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직계 증손자가 프레데리키의 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다. [6] 프레데리크 9세 잉리드 왕비의 세 딸 중 막내.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둘째 여동생이다. [7] 당초 그리스 공화국 정부에서는 프레데리키의 장례를 그리스에서 치르는 것조차 거부했다가 스페인 정부와의 협상 끝에 겨우 성사되었다. [8] 그리스 아테네 근교 타토이에 있는 옛 그리스 왕실의 별장. 왕정 폐지 후 1990년대 유럽사법재판소까지 가는 분쟁을 걸쳐 옛 왕가에 보상금을 주고 현재는 그리스 공화국 정부가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소송이 끝난 2003년 이후 재개발 논의가 있었지만 그리스 경제위기로 오랫동안 별 진전이 없다가 2023년에 2025년까지 박물관으로 개조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9] 참고로 콘스탄티노스 전 국왕 일가는 장례식 당일에만 몇 시간 동안 방문이 허용되었다. 이후 1993년 여름에 한 번 일가족이 휴양 명목으로 입국한 적이 있고, 2004 아테네 올림픽 이후에야 비로소 자유로운 입출국이 허용되었다. 이후 망명지 영국과 그리스를 오가다가 공식적으로 2013년부터 전 국왕 부부는 그리스에서 거주하며 노년을 보냈다. 2023년 초 콘스탄티노스 2세 사망 후에도 미망인 아나마리아 전 왕비는 계속 아테네에 거주 중. [10]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이다. [11] 펠리페 6세 [12] 프레데리크 9세의 3녀이자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외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