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만 Territoire de Kouang-Tchéou-Wan Leased Territory of Guangzhouw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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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제국의 조차지 | |||
국기 | 휘장 | ||
1898년 5월 29일 ~ 1945년 8월 18일 | |||
성립 이전 | 독립 이후 | ||
청나라 | 중화민국 | ||
위치 | 레이저우 반도 북동쪽 | ||
수도 |
포르 바야르 Fort-Baya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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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피아스터 | ||
언어 | 프랑스어, 광둥어 |
프랑스령 광저우만의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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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가 1899년부터 1946년까지 청나라로부터 레이저우 반도 이남을 임차받아 통치한 조차지를 말하며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광둥성 잔장시(湛江市)에 위치해 있다. 충저우 해협 건너편으로는 하이난 성이 위치하였으며 프랑스령이었던 베트남과도 가깝다.본래 1900년부터 발효되는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99년 동안 임차하기로 계약하여 1999년에 반환할 예정이었으나[1]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1946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중화민국에 반환하게 된다. 이 땅 자체가 전혀 상업적 가치가 없어서 프랑스인들은 얼마 오지도 않았으며(1930년대 기록으로는 대략 300여명 정도의 유럽인이 주거했다고 한다.) 하나의 나라처럼 취급되었던 홍콩, 마카오와는 아주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2]
통치 기간동안 서쪽에 위치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관할 하에 놓였다. 이 지역이 베트남 북부와 가까웠기 때문.[3][4]
광저우만이란 이름은 근처의 도시 광저우시와 큰 관련은 없고 단순히 처음 상륙 했을 때의 섬 에서 주민들이 자기들이 사는 섬을 광저우만이란 이름으로 부르던 것이었고 라틴 문자 철자는 프랑스인들이 광동어 발음을 알파벳에 맞추어 철자 Kouang-tchéou-wan을 쓰게 된 것이다.[5]
프랑스가 조차받은 지역은 막시 강 하구의 연안 섬들과 위에 광저우만이라 불리던 만을 조차하였고, 1899년의 조약으로 광저우만의 경계를 정하였다.
2. 역사
사실 광저우만 조차지는 경제적으론 실익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포르투갈령 마카오나 영국령 홍콩과 같은 당대 다른 중국 조차지들과는 달리 실제로도 큰 이익을 얻어내지 못한 땅이었으며 심지어는 1898년 조약에서 프랑스 측 외교관들이 이 지역을 상업적으로 필요없으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으로 평가하여 조차한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애초에 이 조차지의 목적은 경제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광저우만 근처에는 차나 비단같은 무역품 생산도, 수출을 위한 인구도 없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천주교 신부들이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할 수 있는 기지로서 그리고 중국 각 지역의 해군 보급기지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지역의 경제도 프랑스 해군을 위한 식료품 및 석탄 공급에 주력하게 되어, 차나 비단 등 사치품을 무역하던 홍콩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그래도 무역 활동이 전무한 것도 아니었고 프랑스 해군기지로서 당대 중국 내륙에 비해서는 고임금 일자리가 많았기에 내륙에서의 중국인 이민으로 별 볼일 없던 마을에서 인구 20만의 규모있는 도시로 변모했고 중일전쟁 당시 중국 동부해안이 죄다 일본한테 털리자 해상물류를 남부에 의존했는데 유용했던 항구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본국이 6주만에 본토가 유린당하고 항복하는 치욕을 겪고 국가가 친독일 신정부와 반독일 망명정부로 나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중국을 유린하던 일본 제국이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이면서 필리프 페탱과의 조약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함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허나 1943년, 일본은 광저우만 조차지의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며 주둔군 제한을 파기하고 주둔군을 추가로 보낸다고 통보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함께 사실상 일본령이 되었다.
그러다가 1945년 유럽에서의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은 프랑스 주둔군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여 광저우만과 인도차이나 전역을 일본 통치 하에 넣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는 자신들이 실제로 통치하지도 않던, 경제적인 실익도 없고 통치할 여력도 부족한 이 땅을 되찾을 이유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1945년에 중화민국 국민정부와의 조약으로 광저우만의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할양했고, 1945년 8월 18일 광저우만에서 마지막 일본 주둔군이 철수하자 중화민국은 광저우만을 재점령, 1945년 11월 20일 마지막으로 프랑스 국기를 하강, 프랑스의 광저우만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통치하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소속으로 바뀌어 잔장시가 되었다. 하나의 독립국가나 마찬가지였던 홍콩, 마카오, 대만 등 타 식민지들과는 달리 프랑스가 이 지역에 워낙 남긴게 없어서 프랑스 색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6][7]
다만 프랑스 식민 시절 남긴 성당이나 구 주둔군 본부 등 유럽식 건물은 남아있으며 현재는 관광지로 꾸며지고 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지어진 성당.
현재 잔장시에 관해서는 잔장시 문서 참조.
3. 관련 문서
[1]
만약 이시기에 반환했다면
홍콩,
마카오처럼
일국양제 체제가 됐을지도 모른다.
[2]
홍콩과 마카오는 역사적으로 광동의 중심이자 가장 부유한
광저우와 가깝고 주변에 둥관, 자오칭, 후이저우 등
현대에도 많은 인구가 사는 지역 바로 옆이라 시장성이 충분했다. 반면 광저우만은 광동 에서도 서쪽 끝자락이고 주변 지역은 현대에도 개발이 덜 된 데다가 인구부양력이 딸려
인구가 많지 않아 경제적으로는 이득이 전무했다.
[3]
오늘날
잔장에서
하노이까지 직선거리로 약 470km밖에 안된다.
[4]
여담이지만 중국 남부인들과 베트남인들은 인종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5]
표준 중국어상으로는 廣州湾을 '광저우완'이라고 읽어 표기법과 괴리가 크지만, 이 지역에서 쓰이는
광동어로 읽으면 '궝짜우완'으로 알파벳 표기와 비슷하다.
[6]
몇군데 프랑스식 거리와
성당 정도는 남아있긴 하다.
크루아상도 간혹 레스토랑에서 보인다.
[7]
홍콩은 영미권 느낌이 강하며, 마카오는 이베리아 반도 느낌이 강하게 난다. 대만은 구일제 식민지 중에서도 일본 색채가 짙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