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구호인 Hands up, Don't shoot!을 외치며 항의하는 시위자들.
1. 개요
2014 Ferguson Unrest2014년에 퍼거슨 시에서 경찰 총격 사건으로 인해 불거진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시위와 집단 및 개인행동을 포괄하는 일련의 사회적 불안. 퍼거슨 폭동이나 퍼거슨 시위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해당 사건을 2014 Ferguson Unrest라고 표현하며 나무위키의 이 문서도 사건의 성격을 고려해 '퍼거슨 폭동'에서 '퍼거슨 소요'로 가능한 가치 중립을 지키는 방향으로 문서명을 변경하였다. 동아일보에서는 미국 미주리주 흑인 청소년 사망 규탄 시위라는 표기도 같이 사용했다.
이 사건 이후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이 더 커졌다.
2. 총격 사건
2014년 8월 9일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근교의 퍼거슨 시에서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 1996년생)이라는 흑인 소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마이클 브라운이 비무장이었던 것. 대런 윌슨(Darren Wilson, 1986년생)이라는 백인 경찰관에 의해 최소한 6회의 사격을 받은 다음 죽었다.여러 정황에 의하면 경관 대런 윌슨은 용의자를 향해 차를 몰아 길 옆으로 움직일 것을 차 안에서 지시했고 발포가 이루어졌다. 마이클 브라운은 도주를 시작했고 윌슨은 차에서 내려 브라운을 쫓아가 사살했다고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논쟁이 일어났다.
브라운은 범죄 기록이 없으며 윌슨 경관은 당시 28세였고 타 지역 경찰서에서 2년 근무 후 퍼거슨 경찰서에서 4년째 근무하고 있었으며 징계 기록은 없고 근무 수훈상을 2014년 봄에 받은 경력이 있다. 신장 193cm, 체중 95kg으로 브라운과 키는 같으나 체중은 40kg가량 적었다.
브라운은 학창 시절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고 점잖은 거인이라고 불리었으며 사망 당시 193cm의 신장에 132kg의 체중으로 아마추어 래퍼로 활동하면서 빅 마이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근 전문대학에 막 다니려던 참이었으며 나중에 사업을 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의 진상규명 요구에 경찰 측에서는 발포한 경찰 당사자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고 어떤 정황에서 발포했는지도 해명하기를 꺼렸다.
경찰 조사와 FBI 조사,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자세한 정황은 다음과 같다. 마이클 브라운이 마켓에서 폭력을 휘두르면서 담배를 훔쳤다.[1] 4~5분 지나서 도로를 건너던 브라운은 차로 자신을 막아선 대런 윌슨 경관의 검문에 불응하고 몸싸움을 벌였고 윌슨 경관은 차 안에 앉아서 브라운과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두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윌슨 경관은 브라운이 자신의 총을 빼앗으려고 했다고 증언했다.[2] 윌슨 경관은 이후 브라운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차에서 내려 쫓아가다가 다시 10발의 총알을 조준 발사했다. 브라운은 이 과정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브라운이 범죄와 연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브라운이 사형을 당할 만한 중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닐 뿐더러 브라운이 총기나 흉기로 경찰을 위협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경찰이 브라운을 사살한 것은 충분히 공권력 남용이라고 생각될 만했으며 브라운이 총기를 소지하지 않고 도주하던 상황에서 총을 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방부 조사가 들어가면서 사건 현장의 증거와 신뢰성 높은 증인의 증언들은 윌슨 경관의 증언을 지지했다. 더욱 자세한 경황은 영어 위키백과의 Shooting of Michael Brown 문서를 보고 추가 기재하기 바란다. 브라운은 검문에 불응하고 경찰차 안에 몸을 내밀어 명백히 경관의 무기를 빼앗으려고 했는데 거의 성공했고[3] 결국 윌슨이 발포한 덕분에 실패해 도주를 시도했다. 항간에 떠돈 브라운이 손을 들고 항복했다는 루머[4]도 거짓 증언으로 밝혀졌고[5] 오히려 브라운은 도주하다가 돌아서서 경관을 향해 이동했으며 등에 총을 맞지 않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평소에 은연중 경찰의 흑인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에 대한 불만을 가진 민중이 거짓말에 선동되어 멀쩡한 생사람 하나 잡겠다고 전국적으로 반달리즘 및 경관 살해를 벌인 셈이 되었다. 이후 브라운의 가족은 윌슨에게 소송을 걸었고[6] 공개되지 않은 금액의 합의금으로 마무리지었다. 대런 윌슨은 경찰 일에 복귀했지만 괜히 같이 다니다가 자기까지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염려한 동료들의 기피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고 한다. 특히 백인 동료들이 자기를 더 피해다니더라고 했다.
3. 소요의 발생 및 확산
이 사건으로 오랫동안 흑인 사회에서 억눌려 왔던 경제적 차별과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고 시위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Hands up 운동[7]을 전개하면서 마이클 브라운의 죽음에 항의했지만 무엇보다도 사건 직후 SNS를 통해서 사건에 대한 불확실한 얘기들이 번지면서 마이클 브라운은 순진한 커뮤니티 칼리지 입학을 앞둔 아이로 포장되었고 대런 윌슨 경관은 과잉폭력을 일삼는 경찰로 묘사된 측면이 컸다.시위가 확대되면서 FBI가 수사에 착수했지만 항의는 계속 들끓었고 경찰이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발포한 경찰의 이름을 밝히고 브라운이 편의점에서 담배를 강탈하는 영상을 공개했지만 이게 오히려 시위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경찰이 사건개요를 설명하면서 브라운을 당일 오전 인근 편의점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의 용의자로 사실상 지목했다가 증거가 부족하다고 반발하던 유족들의 항의에 다시 몇 시간 만에 '절도 사건과 총격 사건은 무관하다'고 물러서면서 논란을 더욱 키워 버렸다.
유족과 시민들은 경찰이 브라운을 절도 용의자로 몰아 총격 사건의 본질을 회피하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실제로 윌슨 경관은 브라운을 도로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는 이유로 체포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경찰의 정당방위 주장과 달리 브라운이 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나왔지만 대다수의 증인들은 경찰과 브라운 사이에 몸싸움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 상황은 감식결과와도 일치한다.
시위가 폭력 양상으로 발전해 화염병이 등장하고 약탈도 줄을 이으면서 17일에는 통금령이 내려졌지만 당연히 시위대는 이 통금령을 지키지 않았고 급기야 18일에는 주지사가 주방위군 투입 명령을 내렸다. 주방위군도 같은 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퍼거슨에 홀더 법무장관을 급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한편 세인트루이스 경찰서에서 근무 중이던 대런 윌슨이라는 공무원은 온갖 이메일과 전화 항의, 협박에 시달렸고 가족들이 피신하는 일이 생겼는데... 이 사건의 경관이 아니라 동명이인이었다. 퍼거슨과 가까운 세인트루이스에서 근무하고 아주 흔하지는 않은 이름에 경찰 업무를 한다는 공통점으로 곤욕을 치른 동명이인의 이 대런 윌슨은 아이러니하게도 흑인이다. 당장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동명의 축구선수 대런 윌슨이 있었다.
시위를 통제하는 경찰들의 모습.
하지만 주방위군 투입 결정은 미국 정계에서도 논란이 거셌는데 주방위군 투입 이전에도 중무장한 경찰이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대응해 와서 공화당이나 민주당에서 실효가 부족한 과잉반응이라는 반발이 일었기 때문이다. 실제 퍼거슨 시에 투입된 경찰은 지역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라기보다 전장에 투입된 군인에 가까워 보인다는 게 미국 언론의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CNN 등에 비친 경찰의 모습은 단순히 복장뿐 아니라 무기와 장비도 군인 수준인데 연막탄, 최루탄, 섬광탄, 소총 등 폭동 대응시 경찰이 보유할 만한 장비는 물론, 무장 험비와 장갑차까지 갖추었다. 그나마 경찰 근무복 그대로 혹은 남색이나 검은색 등 경찰임을 알기 쉬운 색상의 기동복을 시위 진압 장구류 착용시 입던 과거와 달리, SWAT이나 일반 경찰의 기동복이 멀티캠 등 위장 무늬가 들어간 군용 전투복에 가까워져 가는 미국 경찰의 유행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퍼거슨 시의 상황을 이라크 같은 전장에 비유하기도 했다. 존 루이스(민주·조지아주) 연방 하원의원은 17일 NBC 방송 '미트 더 프레스' 인터뷰에서 "TV에서 흘러나오는 퍼거슨시의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이라크 바그다드나 다른 전쟁터에 있는 느낌"이라면서 "퍼거슨 시는 중국도, 러시아도, 콩고도 아닌 미국의 일부로, 모든 사람이 평화로운 비폭력 집회를 할 권리가 있다"고 비판했다. 공화당 대권주자 중 한 명인 랜드 폴 상원의원( 켄터키)도 미 시사주간 타임 기고문에서 "거리 시위에 대처하는 데 있어 경찰의 대응과 군인의 대응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며 경찰의 중무장화 및 과잉 대응 논란을 지적했다.
이처럼 경찰의 중무장이 가능한 것은 지역 경찰에게도 기관총과 다른 군수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한 국방부의 무기판매 프로그램 때문으로, 국방부 군수국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40억 달러(약 4조 800억원) 이상의 군수품이 지역 경찰에 판매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소속 행크 존슨( 조지아 주) 하원의원은 8월 휴회기가 끝나고 의회에 복귀하면 경찰의 무장을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는데 국방부 군수국의 대(對) 경찰 군사무기 판매를 줄이는 것이 법안의 골자다. 게다가 일각에서 LA 폭동의 재림을 우려하기도 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한답시고 한 게 역효과를 단단히 본 셈. 다른 것보다 LA 폭동이 일종의 매뉴얼로 작용하게 된 셈이며 경무장 경찰이 어느 정도로 무력한지에 대해서 스스로 학습한 결과이기도 한데 이 사건은 지나친 중무장도 외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는 일종의 예시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트위터의 공동 창립자인 잭 도시는 시위에 동참하고 나섰다. 물론 그는 폭력을 자제하고 8월 16일(현지시간) 저녁 퍼거슨시를 방문해 비무장 상태에서 퍼거슨시 치안을 위임받은 미주리 주 고속도로순찰대 론 존슨 대장과 함께 행진하면서 평화로운 시위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경찰의 과잉반응이 모든 시발점이라는 쓴소리도 잊지 않았고 트위터의 창립자인 만큼 행진 순간순간을 사진으로 촬영해 트위터에 올리면서 현장 분위기를 260여 만명의 팔로워들에게 전했다.
18일 마이클 브라운의 2차 부검 결과가 공개되었다.
한편 퍼거슨시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인근 대도시인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백인 시위대에 의해서 마이클 브라운을 사살한 경찰을 옹호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인종차별이 아니고 정당한 공무집행이라는 주장의 평화시위였긴 하지만 시위대들이 모두 백인들뿐이었기 때문에 인종 문제가 아니라고 하기 어려워 보였다. 미주리 지역이 지리적으론 중서부에 속해 있지만 문화상 바이블벨트에 속해 있는 등 여러 문화적 의미가 다양하게 존재한다.[8][9] 사실 미국의 진보적인 주들도 상당 부분 대도시를 벗어난 외지로 가면 보수적인 것은 사실이다.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이 심하다고 알려진 텍사스나 켄터키도 대도시인 휴스턴이나 렉싱턴 쪽으로 가면, 가장 진보적이라는 워싱턴주의 시골 지역보다 인종간 분리도 덜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도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
해당 경찰관에 대한 모금운동도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면 위에 나온 잭 도시는 세인트루이스가 고향이며 거기에서 살고 있듯이 백인, 세인트루이스 시민들이라고 죄다 대런 월슨을 옹호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제2의 LA 폭동이 될지 미국에서도 여러 찬반 논란으로 다뤄졌는데 22년 전 이 폭동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한국인이나 또는 히스패닉 같은 다른 인종들도 무척 신경썼다.
세인트루이스의 한국인 가게 20여곳이 피해를 입었으며 추가로 두 곳은 전소되었고 일곱 곳은 약탈당했다. 평소에는 모범적 소수 운운하면서 정작 피해를 입을 때는 공화당 및 보수언론들만 관심을 가져 주고 정부와 미디어에서는 외면했다. 단지 이 사태는 백인과 한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인종들이 더 큰 피해를 봄으로서 좀 더 흑인들의 시위와 폭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러오게 될 공산이 커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사회 내에서 흑인들의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주장도 나왔는데 시위를 하는 건 좋은데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힌 이상 의도 자체가 변질되었다는 의견이다. 몇몇 비판론자들 사이에서는 항상 이런 식이니까 흑인들이 차별당하는 거라는 주장까지 나왔다.[10] 시위대 내부에서 과격한 행동을 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지역 흑인 교회 목사 등 지역 유지들이 나서서 평화 시위를 장려함으로써 시위대 내부의 폭력적인 요소는 점차 줄어든 것으로 보였다.[11] 단지 이 시각은 흑인 사회의 양극화 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오바마와 같은 사회적 성공을 거둔 상류층 흑인들이 등장했고 제대로 교육받은 인텔리들도 생겨났으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상당수가 안정화된 직장과 사회적 입지를 다져 놨는데 이들 입장은 저 강도나 폭도들이 흑인들의 이미지를 똥밭으로 굴려 넣는 식이라고 생각하는 관계로 그만큼 흑인 사회도 일종의 양극화 현상을 겪는다는 일종의 반증인 셈이다.
21일 무렵부터 폭력 시위 양상이 진정되면서 미주리 주지사는 주방위군의 철수를 발표했다. 19일 세인트루이스에서 흑인 한 명이 사살당하긴 했으나 이쪽은 흉기를 휘두르면서 경찰을 위협한 강도 용의자여서 그렇게 시위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 듯 싶다. LA 폭동과 같은 폭동 양상으로 변화할 가능성은 낮았다. 이외에도 증거조작, 미디어 플롯팅 등이 LA 폭동 당시와는 다르게 날카롭게 지적되었다.
4. 2차 소요
2014년 11월 24일 미주리주의 대배심에서는 대런 윌슨을 불기소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백인 9명, 흑인 3명 등 12명(남성 7명, 여성 5명)으로 이뤄진 대배심에서 기소 찬성 의견을 밝힌 이가 기준인 9명을 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퍼거슨에서 다시 한 번 대형 소요사태가 발생했다.건물 십여 군데가 불타고 총격, 약탈, 반달리즘이 발생했으며 세인트루이스 카운티 경찰 순찰차량 두 대와 여러 대의 민간 차량도 불탔다. 퍼거슨 경찰서는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가스를 동원했으며 절도와 무단침입으로 61명이 퍼거슨에서 체포되었다. 불 끄러 가던 소방관이 총성이 가깝게 들려 접근하지 못하고 피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25일, 마이클 브라운이 죽은 자리에서 몇 블럭 이내에 주차된 차량 안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경찰은 살인사건으로 조사했으나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이날 보스턴에서 LA까지 미국 전역의 170개 도시에서 대배심 결정에 대한 전국적 시위가 발발했다. 주지사가 주방위군 증강명령을 내렸으며 시위가 다시 격화되었다. 여기에 11월 20일 클리블랜드에서 장난감 총을 갖고 놀던 12세 흑인 소년이 제대로 된 경고 없이 백인 경관에게 사살당한 사건까지 겹치면서 인종폭동 조짐까지 우려되었다.
27일 주지사 닉슨은 마이클 브라운의 사살에 대해 윌슨 경관에 대한 새로운 대배심 요구를 재차 거부한다고 밝혔다.
28일 미국은 블랙 프라이데이를 맞았지만 흑인 사회단체들은 '블랙 파워'를 보여주자며 대대적인 불매운동을 결의했다.
5. 에릭 가너 사망 사건
2014년 7월 17일 뉴욕에서 불법으로 담배를 판매한 혐의를 받은 흑인 용의자 '에릭 가너'(당시 43세)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용의자가 사망했다. 당시 사건을 촬영한 동영상에는 가너와 경찰관의 실랑이 중 다른 경찰관 한 명이 그에게 기습적으로 슬리퍼 홀드를 걸어 넘어뜨리는데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12]며 고통스러워하는 가너의 외침에도 목을 풀어 주지 않는 장면이 들어 있다. 천식 환자였던 가너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으며 해당 경찰관이 불기소처분을 받으면서 더욱 논란이 커졌고 뉴욕시의 한 의원은 가너의 사망 원인이 경찰의 과잉진압이 아니라 비만 때문이라고 경찰관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서 또 문제가 되었다. 당시 뉴욕 시장이었던 빌 더블라지오는 퍼거슨시의 소요사태가 뉴욕시로 번질까 우려된다며 불기소 처분에 대해 비판했다.[13] 미국인 유튜버 올리버쌤도 미국 경찰의 과잉진압을 이야기하면서 이 사건을 예시로 들었다. 미국 경찰은 왜 총을 들고 다닐까?다만 부검의는 법원에서 가너의 목에 가해진 압력으론 그를 죽음으로 이르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증언하였으며 법의병리학자는 가너의 사망 원인이 심장 질환에 있었음을 증언했다. 관련 기사
한편에서는 이 사태의 본질을 2013년부터 시작된 총기규제 문제와 연관해서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이는 인종차별을 은폐하고자 하는 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총기규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상당수 겹치는데 NRA 등과 연관된 정치 로비 이슈가 아닌 데다 오바마가 지시한 총기규제안을 많은 수의 지역 보안관서에서 반발하며 보이콧해 버렸기 때문이다.[14] 이후 지역경찰과 연방정부 간의 알력 싸움에 있어서 이 문제가 딱 걸렸고 때문에 중앙정부에서는 주정부의 대응에 대해서 이런저런 간섭을 했으며 실제로 퍼거슨 시내에서도 연방경찰과 주경찰관의 운용은 거의 분리되어 진행되었음도 확인되었다. 일종의 미국 정치체제의 딜레마에 봉착한 셈. 따라서 이러한 인종차별 은폐자들에 따르면 문제는 지방분권주의, 연방정부의 의사, 대선, 인종주의 등이 얽혀진 꽤나 복잡미묘한 개념으로 대두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도 이 문제에 대한 뾰족한 해법은 아직 나오지 않은 만큼 현재진행형이라고 봐야겠지만 만일 뇌관이 잘못 기폭되면 대선의 향방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음도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3월, 미국 법무부가 조사한 퍼거슨 경찰의 인종차별 관련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내용을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는 것이 제대로 드러났다. 더불어 증인들이 전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반복적이고 일관적인 증언이 있었던 만큼 퍼거슨시 경찰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는 보고서 내용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6. 사건 이후
백인 경찰 대런 윌슨은 무죄 판결을 받고 경찰에 복귀했지만 그와 친하다고 보여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다른 경찰들, 특히 백인 경찰들의 은따와 근근히 들어오던 사직 압박에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이후 숨어 살다시피 하게 되었는데 그간 '너는 복무에 충실한 것이다, 네가 자랑스럽다'고 떠들어대던 온라인상 백인 지지자들의 응원과 달리 현실에서는 불미스러운 인종 문제에 엮인 전직 경찰관이라는 사실이 너무 알려져 오히려 직장도 못 구했다고 한다.
[1]
이는
CCTV에 고스란히 잡힌 명백한 사실이다.
[2]
FBI는 이에 대해 윌슨 경관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결론지었다.
[3]
이 과정에서 손에 총상을 입었다. 총서에도 브라운의 DNA가 검출되었다.
[4]
그러니까 저 'Hands up, Don't shoot'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5]
대부분의 증인들이 시야 밖에 있었거나 다른 사람의 증언을 반복한 것으로 밝혀졌다.
[6]
돈을 노리고 뻔뻔하게 건 건지 정말 브라운이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걸은 건지는 알 수 없다.
[7]
행진 중에 손을 들면서 쏘지 말라고 외치는 것.
[8]
2012년 대선에서 미주리 주에서는
밋 롬니 후보가 53.8%를 득표해 44.4%를 득표한 오바마 후보에 앞섰다. 그나마 이것도 미주리 주의 양대 대도시인 세인트루이스와 캔자스시티에서 오바마가 몰표(각각 82.7%, 76.9%)를 얻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도 있다.
[9]
참고로
남북 전쟁 시기에 미주리 주는 남부 지역들처럼 노예제 허용 주였지만 남부연합에는 가담하지 않고 연방에 잔류했다.
[10]
차별적인 의견으로 보이지만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흑인 시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다. 시위할 때마다 매번 과격하게 시위를 하거나 말만 시위지 폭력을 쓰면서 저항하는 모습을 본다면 참으로 모순 그 자체다. 차들을 때려부수지 않나, 상점을 털어 버리지 않나, 폭력을 쓰지 않나 등등. 이로 인해 타인종들 사이에서 흑인들이 하는 시위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겼다.
[11]
허나 여전히 시위가 생기면 폭력적인 짓들을 일삼으니 굉장히 논란이 크다. 오죽하면 흑인들이 하는 시위 자체가 아이러니하다고 할까...
[12]
이 사건 이후
르브론 제임스,
데릭 로즈 등의 흑인 NBA 슈퍼스타들이
I can't breathe 셔츠를 경기장에서 입는 등 흑인 사회에서
트레이본 마틴 살인사건 정도로 중대한 사안으로 취급했으며 2020년
같은 말을 외치고 죽은 흑인 남성으로 인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혼란스럽던 미국 사회는 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13]
더블라지오 본인은 백인이지만 흑인 여성과 결혼했다.
[14]
미국은 알다시피 지역경찰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경찰 책임자가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는 경우가 있다. 민선보안관과 같은 경우로 때문에 지방정부의 사법권에 대해서 연방정부가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지방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중앙집권제 국가인 한국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며 중앙정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고 해도 지방사법기관에서는 이를 반려하거나 시행하지 않을 수 있다. 즉 명령 거부가 합법적으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