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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바국 பல்லவ நாடு Pallava nāṭu |
||
350년 ~ 897년 | ||
수도 | 칸치푸람 | |
국가원수 | 왕 | |
주요 국왕 | 나라싱하바르만 1세 | |
언어 | 타밀어,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 |
종교 | 힌두교, 불교 | |
종족 | 타밀족 등 | |
성립 이전 | 칼라브라 왕조, 카담바 왕조 | |
멸망 이후 | 촐라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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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밀 지역에 세력을 펼쳤던 칼라브라 왕조에 이어 남인도 지역의 강국 중 하나가 된 드라비다인 및 아리아인 혼합계열 왕조. 동시대 북인도에 존재했던 굽타 왕조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9세기 말 타밀의 새로운 강대국 촐라 제국의 공격에 의해 멸망한다.2. 기원
팔라바인들의 기원은 몇가지 학설들이 있으나 정확하게 입증된바가 없다. 몇몇 유럽의 학자들은 팔라바인들이 파르티아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2세기경 샤카족과 사타바하나 왕조가 다투는 사이 서북지역에서 동쪽의 연안으로 이주해온 파르티아인들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다른 주장도 있는데 그들이 인도 최남단 지역과 실론섬에서 살던 촐라 왕조의 나가 가문이 라는 것이다. 이 학설에 의하면 킬리발라반 왕자와 마니팔라밤[1]의 왕 발라이 바난의 딸 필리발라이 공주가 서로 결혼하여 일람 타라이얀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는 후에 톤다이만달람의 지배가 되어 자신의 왕국을 어머니의 출생지를 본떠 마니팔라밤이라고 했다. 그래서 톤다이만달람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팔라바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이고 이후 그들이 세운 왕국이 팔라바 왕조라고 한다.다만 이 학설들은 위에도 서술했다시피 확실히 입증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의 가계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브라만 가문이라느니 크샤트리아 가문이라느니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3. 역사
3.1. 초기
인도 최남단에서는 예로부터 체라 왕조, 촐라 왕조, 판디아 왕국이 서로 다투는 혼란의 도가니 상태였다. 그러다 칼라브라 왕조가 이들의 분쟁을 종식하고 타밀의 최강국이 된다. 하지만 칼라브라 왕조 또한 세력이 아주 굳건한 상태는 아니었고 이를 노린 팔라바인들이 보다 북쪽에 있던 칸치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나라를 세운다. 이것이 팔라바 왕조이다.이들이 분명하게 등장한 것은 서기 3세기 중반 시바스칸다 바르만 시대부터이다. 그러나 당시는 칼라브라 왕조나 북서쪽에 바카타카 왕조, 카담바 왕조의 세력이 강했기에 이들은 별 다른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다. 특히 칼라브라 왕조와 카담바 왕조는 라이벌 국가들로 분쟁이 심했다. 한편 4~5세기에는 북방의 굽타 왕조의 전성기였고 그 시대에 팔라바 왕조는 굽타 왕조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3.2. 부흥기
싱하 비슈누는 팔라바 왕조의 본격적인 기반을 이룬 첫 번째 왕이다. 정통 힌두교의 신자였던 그는 힌두이즘을 거부한 칼라브라 왕조를 포함한 다수의 적들을 무찌르고 촐라만달람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그 결과 왕국의 영토는 카베리 강과 크리슈나 강 사이의 지역으로 확장된다.싱하 비슈누의 뒤를 이은 마헨드라 바르만 1세부터는 북쪽 데칸을 지역을 지배하던 찰루키아 왕조와의 대를 이은 전쟁이 시작된다. 당시 찰루키아 왕조의 왕 풀라케쉰 2세는 북방의 바르다나 왕조의 공격을 막아내고 팔라바 왕조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이 전투에서 그는 찰루키아 왕조에 의해 북쪽 지방을 내어주게 된다. 시인이며 음악가이기도 했던 마헨드라 바르만 1세는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래 그는 자이나교도였다. 하지만 힌두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로인해 당시 타밀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자이나교는 큰 타격을 입게된다.
마헨드라 바르만 1세의 뒤를 이은 나라싱하 바르만 1세는 팔라바 왕조의 위력을 가장 크게 떨친 위대한 왕으로 역시 이시기에도 찰루키아 왕조와는 여전히 패권을 노린 다툼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나라싱하의 팔라바 군대는 찰루키아 왕조의 풀라케쉰 2세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세 차례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 역공에 성공하게 된다. 한때 642년 찰루키아 왕조의 수도 바다미를 점령하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찰루키아 왕조의 풀라케쉰 2세는 죽고 왕국은 한동안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찰루키아 왕조를 물리치고 아버지 마헨드라 바르만 1세의 복수에 성공한 나라싱하 바르만 1세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칼라브라 왕조의 세력은 이미 이전에 망했다시피 했고 판디아 왕국이나 주변 소국들을 정리하면서 팔라바 왕조의 영토를 최남단까지 넓히는데 성공한다. 이로서 팔라바 왕조는 명실 공히 남인도의 강력한 제국이 된다.
3.3. 쇠퇴
파라마이슈와르 바르만 1세 때는 다시금 찰루키아 왕조의 공격으로 수도 칸치까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전열을 가다듬어 페루발라나루르에서 찰루키아의 군대를 쫒아버려 수도를 다시 수복하긴 하나, 팔라바 왕조는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다. 난디 바르만 2세가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선출되자 이웃 나라들의 공격이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판디아 왕국의 공격으로 콩구 지역을 빼앗기고 찰루키아 연이은 공격으로 칸치를 다시 빼앗기게 된다.이때의 칸치는 찰루키아 왕조가 쇠퇴하면서 수복하긴 하나 750여 년경 이번엔 새로 데칸지역에 부흥한 라슈트라쿠타 왕조에 의해 다시 빼앗기고 만다. 라슈트라쿠타 왕조와의 평화협정으로 칸치를 다시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팔라바를 공격하여 많은 전리품들을 약탈해갔다. 이처럼 난다 바르만 2세 시대에는 외세 세력들의 잦은 침공이 있었고 그 결과 팔라바 왕조는 급속히 쇠약해져 간다.
이후로도 지속적인 외세의 침입으로 인하여 팔라바 왕조는 더더욱 약해졌으며, 9세기 들어 다시 강해진 촐라 제국의 아디트야 1세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4. 사회문화
팔라바 왕조의 행정 조직은 굽타 왕조와 비슷하다. 왕은 권력의 정점에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독재자는 아니었다. 왕의 의무로는 백성들의 평안과 나라의 안정에 있었으며, 재상들의 도움을 받아 법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실행도록 했다. 팔라바의 왕들은 모두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그들은 제사를 올리면서 시바, 비슈누, 브라흐마, 락슈미 등과 같은 힌두의 남신과 여신들을 위해 많은 사원들을 건립했다. 서기 8세기 경 남인도 지역에 대대적으로 힌두교를 퍼트린 것도 역시 팔라바 왕조에서 시행한 것들이었다. 팔라바의 역대 국왕들은 힌두교 전파에 힘쓰는 한편 학문도 보호함으로서 수도인 칸치는 남인도 학문의 중심지인 동시에 힌두교의 7대 종교도시 가운데 하나가 된다.물론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남인도지역에는 여전히 불교와 자이나교의 기반들이 남아있어 이들에 대한 보호도 꾸준히 해온다. 칸치를 방문했던 당나라의 승려 현장은 남인도의 종교적 전통은 자이나교에 있다고 기록을 남겼다.
팔라바 왕조의 문화 정책은 칸치의 대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4세기 경 인도 전통의 논리학파인 느야야 학파의 경전 느야야수트라에 대한 주석서 느야야 브하샤를 저술한 바츠야야나가 칸치 대학의 유명한 학자였다. 그 밖에도 불교 논리학의 대표적인 학승 디그나가 이 대학에서 7년 동안 수학했다.
인도 최남단의 힌두교 사원에 대한 건립도 팔라바 왕조의 시대에 시작된다. 팔라바 왕조의 건축 양식은 대게 4단계로 구분 한다. 첫 번째 단계는 600~625년 시기로 이때 건축 양식을 마헨드라 예술 양식이라 한다. 두 번째는 625~647년까지 마말라 예술 양식이라 하는데 이 시기에 마하발리푸람에 있는 라트 사원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참고로 이 사원은 남인도 최고의 건축물로도 손꼽힌다. 세 번째는 8세기 라자싱하 시대로 라자싱하 예술 양식이라 한다. 이 양식으로 유명한 건축물은 칸치에 있는 카일라사나타 시바 사원이다. 마지막은 비운의 왕 아파라지타 시대로 아파라지타 예술 양식이라 한다. 물론 이 시기는 팔라바 왕조의 끝무렵이긴 했으나 건축 양식의 발전 단계 중에선 최고로 취급했다.
이처럼 팔라바 왕조의 문화에는 남인도에 다양한 발전이 이루어졌고 힌두교의 부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또한 드라비다인과 아리아인 혼합계열 왕조로서 북인도 문화를 남인도에 전파하는 매개자 역할도 했다. 이 점을 통해 팔라바 왕조가 인도 역사상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볼 수가 있다.
[1]
실론 해변 근처에 있는 섬 지역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