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5:55:48

팔달문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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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종주
장안문 종로/ 화성행궁 팔달문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402호
수원 팔달문
水原 八達門
소재지 <colbgcolor=#fff,#2d2f34>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138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수량/면적 1동
지정연도 1964년 9월 3일
제작시기 조선 정조 20년(1796)
파일:attachment/A0402000031003.jpg
파일:ym6Ghbnr.jpg
1. 개요2. 주변 시설3. 외부 링크4. 보물 제4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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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달문(八達門)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80 (팔달로2가)에 소재한 수원화성의 남문이다. 1964년 보물 제402호로 지정됐다.

과거부터 팔달문 주변 교동이나 팔달로 일대를 남문이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대중매체에서 팔달문이라 호칭하는 관계로 젊은 층은 보통 팔달문으로, 고연령대는 남문으로 자주 부르곤 하는 편.[1] 숭례문을 남대문이라고 부르는 것 처럼 정식 명칭이 따로 있는 성문의 이름을 방향을 따 부르는건 상당히 흔한 일로, 이것이 일제의 잔재라는 주장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 18년(1794년)에 정조의 부친되는 사도세자의 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할때 다른 수원 화성 성곽과 함께 건립되었다. 이름은 수원 중앙에 위치한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방비를 단단히 하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정조 당시의 것을 1975년 복원 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파일:팔달문 일제강점기.png
원래는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어 남공심돈과 남암문, 그리고 남서/동 적대가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후 수원화성 복원 작업이 진행되며 상당수가 옛 모습을 되찾았음에도 이쪽은 성곽이 끊긴 채 그대로 있는데, 주변에 남문시장(팔달문시장)을 비롯해 건축물이 워낙 많다보니 이걸 다 허물지 않는 이상은 복원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는 것.[2] 결국 시 차원에서 나서서 일대 성곽과 남공심돈, 남암문, 남서/동 적대 복원을 위해 철거 및 이전을 두고 시장주민들과 협의중에 있다.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성곽이 연결돼 팔달문에서 끊김 없이 서장대 봉돈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반대하는 주민도 있는 만큼 마냥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2029년까지 성벽이 복원될 예정이다.

팔달문 2층 누상에는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팔달문 동종(八達門銅鐘)이 달려 있었다. 종걸이는 음통이 없는 용두 뿐이고 상대에는 내부에 글씨를 넣은 수십 개의 문양을 두 줄로 나란히 돌렸으며 종신에는 이 종을 주조한 장소와 연대 유래, 주조자들의 명문이 주자 혹은 각자되어 있다. 하대에는 보상당초화문을 양주하여 돌린 고려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한 조선종의 형식을 하고 있다. 원래 만의사에 있던 종으로 1913년에 이곳으로 옮겼고 2009년에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박물관으로 옮겼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또한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 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팔달문 편액[3]은 2019년 즈음 재복원을 위해 철거됐다가 2020년 5월경 다시 걸렸다. 이전과 달리 고증을 재검토해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복원했다.

이런저런 역사적 가치가 있고 인지도도 높지만, 정작 성문 자체의 인기만 따지면 화서문, 장안문, 창룡문 등 화성의 다른 문이나 시설들에 비해서 크게 떨어지는 편이다. 아무래도 팔달문 자체가 팔달문로터리 사이에 고립돼 있고, 좌우로 성벽도 연결돼 있지 않은 탓에 도보 접근이 불가능한 관계로 사실상 출입 통제 상태에 놓인 것이 크다.[4] 다른 시설들은 직접 건물에 올라가 구경하고 이용해볼 수 있는 데, 팔달문은 그게 안되니 그냥 종종 멀리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인지도가 높은 것은 팔달문 주변이 번화가로 개발됐기 때문으로, 이른바 '남문'으로 불리며 각종 상업지구가 조성돼 있다. 그 사이에 떡하니 팔달문이 위치해 있으니 인지도 자체는 있는 것.

2. 주변 시설

수원시/상권에도 관련 내용이 적혀 있다.

팔달문 주변은 수원의 대표적인 구시가지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수원의 중심지라 할 수 있었다. 당시 남문 일대는 수원 근방의 용인시, 안산시, 평택시 등지에서 죄다 몰려와서 지금 수원역에 필적할 만큼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점차 수원역에 밀리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얘기는 아니고, 수원 각지에서 장보러 많이 온다. 근처에 재래시장으로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지동 시장(못골 시장) 등이 인접해있다. 팔달문 시장에서 북쪽 골목으로 가다 보면 진미 통닭, 용성 통닭, 일미 통닭 등의 치킨 전문점들이 밀집되어 있는 치킨거리가 있는데, 팔달문 근처에 살지 않는 사람들도 이곳에 오게 하는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통닭거리에 대한 내용은 이곳을 참고.

또한 이곳에는 병원 약국이 많이 있어 아플 때 찾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일단 어디가 아프든 이 쪽으로 오면 관련 병원 하나 정도는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달문의 쇠퇴에 따라 병원 역시도 점차 쇠락하게 되었고, 약국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주변에 약국이 영업을 안 하는 주말에는 약국을 가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으로 백병원 같은 큰 병원이나 문안과, 이안과 등 유명 병원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곳에 있던 중앙 극장은 한 때 수원의 대표적인 극장이었으나 팔달문이 쇠퇴함에 따라 인기가 없어졌고, 문을 닫았다. 하지만 2013년 말에 중앙 극장을 계승하여 메가박스가 생겼다. 관련 기사 - 수원 중앙 극장 , 메가박스로 부활(경기일보)

인근에 음식점으로 롯데리아, 한스델리가 있으며, 한때 KFC 버거킹까지도 있었으나 KFC는 2018년 5월 중에, 버거킹은 2020년중에 문을 닫았다. 할인 매장으론 다이소가 있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402호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 화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1] 비슷한 예로 수원화성을 그냥 '수원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역시 젊은 층에서는 수원 화성, 연령대가 높은 층에서는 수원성이라고 자주 부른다. [2] 비슷하게 도로 개설로 인해 성곽이 끊긴 다른 성문들의 경우, 인근에 건물이 얼마 없고 도로만 건너면 돼서 육교 형식으로 복원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팔달문은 이게 불가능한 것이다. [3] 문의 이름이 적힌 간판. [4] 팔달문로터리에는 팔달문 방향으로 난 횡단보도 자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