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27 15:28:14

파코로스 2세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5D3462 0%, #611594 20%, #611594 80%, #5D3462); color: #BDB76B"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아르사케스 1세 아르사케스 2세 프리아파티오스
제4대 제5대 제6대
프라아테스 1세 미트리다테스 1세 프라아테스 2세
제7대 제8대 제9대
아르타바노스 1세 미트리다테스 2세 고타르제스 1세
제10대 제11대 제12대
미트리다테스 3세 오로데스 1세 시나트로케스 1세
제13대 제14대 제15대
프라아테스 3세 미트리다테스 4세 오로데스 2세
제16대 제17대 제18대
파코로스 1세 프라아테스 4세 티리다테스 1세
제19대 제20대 제21대
프라아테스 5세 무사 오로데스 3세
제22대 제23대 제24대
보노네스 1세 아르타바노스 2세 티리다테스 2세
제25대 제26대 제27대
바르다네스 1세 고타르제스 2세 메헤르다테스
제28대 제29대 제30대
보노네스 2세 볼로가세스 1세 바르다네스 2세
제31대 제32대 제33대
파코로스 2세 볼로가세스 2세 아르타바노스 3세
제34대 제35대 제36대
볼로가세스 3세 오스로에스 1세 파르타마스파테스
제37대 제38대 제39대
미트리다테스 5세 볼로가세스 4세 오스로에스 2세
제40대 제41대 제42대
볼로가세스 5세 볼로가세스 6세 아르타바노스 4세
아케메네스 · 셀레우코스 · 사산 }}}}}}}}}}}}

파르티아 제국 31대 샤한샤
𐭐𐭊𐭅𐭓 | 파코로스 2세
파일:파코로스 2세.jpg
제호 한국어 파코로스 2세
파르티아어 𐭐𐭊𐭅𐭓
영어 Pacorus I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 ~ 110년
재위 기간 78년 ~ 110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파르티아의 제31대 샤한샤.

볼로가세스 2세 아르타바노스 3세의 도전에 직면했지만 왕위를 지켜냈다.

2. 생애

선왕인 볼로가세스 1세와 어떤 관계인지는 기록이 부실해서 확실하지 않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인물이 보노네스 2세의 아들이며 볼로가세스 1세와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 1세의 동생인 파코로스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파코로스는 볼로가세스 1세 즉위 후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부왕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의 재위 초기에 발행된 동전에는 수염이 없고 젊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역사가들은 파코로스가 볼로가세스 1세의 형제가 아니라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볼로가세스 1세가 사망할 무렵, 파코로스 2세는 볼로가세스 1세의 아들 볼로가세스 2세와 거의 동시에 샤한샤를 칭했다. 이후 양자는 2년간 내전을 치렀는데, 그가 볼로가세스 2세를 꺾고 유일한 샤한샤로 등극했다. 79/80년, 바빌로니아에서 아르타바노스 3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르타바노스 3세가 주조한 동전은 81년 이후 발견되지 않는데, 이로 볼 때 81년 즈음에 진압된 것으로 추정된다.

80년 또는 81년, 자신을 네로라고 사칭한 테렌티우스 막시무스가 파르티아로 망명했다. 당시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왕실은 네로가 명장 코르불로의 간언을 받아들여 파르티아 왕자 티리다테스 1세가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는 걸 용인해준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고, 그런 네로를 몰아내고 자신들에게 딱딱한 태도를 보이는 플라비우스 왕조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파르티아인들은 테렌티우스 막시무스를 기꺼이 보호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체가 탄로나는 바람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재위하던 88년 또는 89년, 가짜 네로가 또다시 출현했다. 그의 이름과 신분은 알려진 바 없다. 그는 테렌티우스 막시무스처럼 파르티아로 가서 파코로스 2세에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가 당장 넘겨주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고 협박했고, 파코로스 2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가짜 네로를 넘겨줬다. 이 인물이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된 바 없지만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97년, 후한 화제의 치세때, 서역도호 반초가 감영(甘英)을 로마 제국으로 파견했다. 그는 로마로 가는 길에 파르티아 궁정에 들러 후한 대우를 받았다. 이후 페르시아 만까지 당도했지만, 파르티아 당국이 로마까지 가려면 수년은 족히 걸리는 항해를 해야 한다며 거짓말을 했고, 감영은 이를 믿은채 후한의 영향하에 있었던 서역으로 돌아갔다. 파르티아는 이후에도 중국-로마간 중계무역을 통해 짭짤한 수입을 거두었다. 파코로스 2세의 동전이 호라즘, 박트리아, 힌두쿠시 등 동방 일대에 대량으로 출토된 것을 볼 때, 파르티아는 그의 치세 때 동방에서 상당한 무역 거래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파코로스 2세는 105년부터 아들 볼로가세스 3세를 공동 샤한샤로 세우고 제국을 함께 다스렸다. 그런데 109년 파코로스 2세의 형제 또는 사위인 오스로에스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주화를 주조했다. 110년 오스로에 왕국을 아디아베네 왕 이자테스의 아들 아브가르 7세에게 팔았지만, 파르티아는 이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 직후 파코로스 2세가 사망하고, 아들 볼로가세스 3세가 단독 샤한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