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2 18:10:05

미트리다테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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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8대 샤한샤
𐭌𐭄𐭓𐭃𐭕 | 미트리다테스 2세
파일:미트리다테스 2세.jpg
제호 한국어 미트리다테스 2세
파르티아어 𐭌𐭄𐭓𐭃𐭕
영어 Mithridates I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 ~ 기원전 91년
재위 기간 기원전 124년/123년 ~ 기원전 91년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파르티아의 제8대 샤한샤.

파르티아 제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받는 명군이다.

2. 생애

아르타바노스 1세의 아들로, 기원전 124년 또는 123년에 월지와의 전투 도중 전사한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파르티아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사카족 월지족이 동쪽에서 쳐들어와서 많은 이란 지역을 공략하고 그곳에 정착했으며, 서쪽에서는 엘리마이스와 페르시스가 독립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카라센 공국의 통치자 히스파오시네가 독립하여 기원전 128년 또는 127년에 바빌론을 장악하고 주화를 발행했다. 여기에 북서쪽에서는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가 세력을 키우며 파르티아를 위협했다.

미트리다테스 2세는 먼저 적을 줄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샤카족과 월지족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보낼 테니 침략을 중단한 후 돌아가라고 설득했고, 그들은 막대한 공물을 챙긴채 돌아갔다. 이후 유목민족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대를 대대적으로 육성했다. 이보다 앞서, 여러 샤한샤는 중보병을 육성하길 희망하여 셀레우코스 왕조의 포로들을 보병대로 썼지만, 이들의 충성도가 매우 낮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 2세는 보병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수의 경기병 및 궁기병과 소규모의 카타프락토이를 육성했다.

이렇게 군대를 기병 위주로 개편한 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히스파오시네를 압박했다. 히스파오시네는 파르티아군의 강력한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바빌론을 파르티아에 돌려주고 봉신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뒤이어 엘리마이스를 점령한 엘람 왕 피티트(Pittit)를 공격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엘리마이스를 정복했다. 기원전 120년엔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여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를 굴복시키고 아르메니아가 파르티아의 봉신이 되도록 했다. 아르타바스데스 1세는 아들 또는 조카인 티그라네스 2세를 인질로 넘겨야 했다. 캅카스 알바니아, 이베리아 등 캅카스 왕국들 역시 이 시기에 파르티아의 속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무렵에 캅카스 일대에 파르티아 동전이 대량으로 유통된 것이 고고학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아랍인들을 상대로 반격을 개시했다. 기원전 119년 봄 그들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아랍인들은 그의 치세 동안 바빌로니아를 다시 공격하지 못했다. 뒤이어 기원전 114년 또는 113년, 유프라테스 강 어귀의 두라-에우로포스 시를 공략하여 시리아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렇게 북쪽과 서쪽, 남쪽 전선을 모두 정리한 뒤, 미트리다테스 2세의 시선은 선대 샤한샤 아르타바노스 1세 프라아테스 2세를 전사시킨 샤카족과 월지족으로 향했다. 그는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해, 샤카족이 대량으로 몰려들어서 '사카스탄'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동부 파르티아 일대를 탈환했고, 사카스탄 공략에 큰 공을 세운 수레나스 장군에게 그곳을 영지로 하사했다. 다만 샤카족이 워낙 많이 몰려 살았기에 그들을 다 내쫓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파르티아에 귀순한 샤카족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고, 샤카족 지도자들은 파르티아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다. 또한 월지족을 상대로도 강력하게 밀어붙여 아라코시아를 포함한 박트리아 서부 일대까지 탈환했다. 월지족은 미트리다테스 2세의 압박을 피해 인도로 진출했고, 훗날 쿠샨 왕조를 건국했다.

기원전 95년, 미트리다테스 2세는 인질로 잡혀있던 아르메니아 왕자 티그라네스 2세(BC 95~ BC 55 재위)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티그라네스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카스피해의 "70개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양도했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기원전 80년대 말까지 파르티아의 속주로 남았다. 미트리다테스 2세는 뒤이어 아디아베네, 고르디네, 오슈톨레네를 잇따라 공략하여 파르티아의 서쪽 경계를 유프라테스 강변으로 확장했다. 기원전 92년,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코스 10세와 '길르앗의 여왕 라오디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고, 안티오코스 10세는 전사했다.

이 무렵, 로마 공화정의 술라는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에게 쫓겨난 카파도키아 왕을 복위시키기 위해 파르티아와 교섭했다. 양국이 어떤 합의에 이르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파르티아 사절 오로바조스(Orobazus)는 술라에게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본국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후 지중해 최강의 국가 로마 공화국을 의식하여 서쪽으로의 공세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기원전 91년 사망했으며, 아들 고타르제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3. 여담

기원전 121년, 한무제 유철이 보낸 사절단이 파르티아 궁정에 방문하여 황제의 서신을 미트리다테스 2세에게 바쳤다. 그 후 양국이 교역을 맺기로 하면서, 실크로드의 막이 올랐다. 중국인들은 파르티아를 '안식국(安息國)'이라 불렀으며, 사마천은 《 사기》에서 수천리에 달하는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