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6:03:21

파르나바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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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초대 군주
ფარნავაზ | 파르나바즈 1세
파일:파르나바즈 1세.jpg
제호 한국어 파르나바즈 1세
조지아어 ფარნავაზ
라틴어 Pharnavaz I
생몰 년도 미상 ~ 기원전 237/234/219년
재위 기간 기원전 302/299/284년 ~ 기원전 237/234/219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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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베리아 왕국 초대 군주.

2. 생애

그의 생애는 두 가지 기록을 통해 알려졌다. 첫번째는 <카르틀리의 개종(Mok'c'evay K'art'lisay)>이고, 두번째는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K'art'lis C'xovreba)>다. 두 기록은 바그라티온 왕조 시대에 집필된 것으로, 그때까지 남아있던 역사 자료 또는 기록 보관소의 남은 자료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결합했다. 파르나바즈(ფარნავაზ)라는 이름은 고대 이란어 farnah-vazdah에서 유래한 것으로, "의로움을 촉진하는 자", 즉 합법적인 군주를 후원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리스어 파르나바조스(Φαρνάβαζος)에서 변형된 단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도갈마의 아들인 카르톨로스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도갈마는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손자 고멜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는 그가 므츠헤타의 사마리아인 마마삭슬리시(mamasaxlisi: 집의 아버지)의 형제이며, 어머니는 이스파한 출신의 페르시아 여성이라고 기술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 원정을 떠나 조지아 동부 일대를 침공했을 때 파르나바즈의 아버지와 마마삭슬리시 등이 살해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3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코카서스로 도망친 뒤 홀로 양육했다고 한다.

성인이 된 그는 고향 므츠헤타로 돌아갔고, 탁월한 궁술을 기반으로 뛰어난 사냥꾼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카르틀리 지역을 다스리던 아존이 그를 위험인물로 여긴 걸 눈치챈 어머니는 아들에게 위험을 경고하여 아스파한으로 망명하라고 촉구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떠나기 전에 트빌리시 근처에 있는 디그미 평원에서 사냥을 하던 중 절벽 기슭에서 죽어가는 사슴을 죽였다. 그 후 거센 비가 와서 동굴에 피신했는데, 거기서 멋진 보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신이 자신이 카르틀리의 왕이 되라는 계시라고 여기고, 여러 유목 민족을 모아 1,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므츠헤타를 공략하고 아존을 죽인 뒤 왕국을 세웠다. 이때가 기원전 302년이라는 설, 기원전 299년이라는 설, 기원전 284년이라는 설이 제기되는데, 대다수 학자들은 그의 통치가 기원전 3세기에 시작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27세에 왕이 된 뒤 65년 동안 통치했다고 한다. 그는 누이를 오세티아 왕과 결혼시키고 콜키스의 영토를 쿠이 족에게 넘겨줌으로써 동맹 부족들에게 보답했다. 본인은 콜카서스의 두르주크족 여인과 결혼했다. 그는 8명의 지방 관리와 스파스패티(spaspeti)라 불리는 군사 지휘관을 선임했으며, 미츠헤타의 아르마즈체 요새에 아르마즈 신을 숭배하는 신전을 건립했다. 이 아르마즈 신은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동일시된다. 한편, 그는 사절을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코스 1세에게 보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왕위를 인정받았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조지아어 문자를 개발하고 조지아어를 왕국의 공식 언어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5세기 이전의 조지아어 문자 형식과 관련된 기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가 사망한 해는 학설에 따라 기원전 237년, 기원전 234년, 기원전 219년으로 나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사망한 후 아르마즈체 요새 내에 마련된 영묘에 묻혔고, 아들 사우로마케스 1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영묘는 훗날 왕국의 성지가 되었고, 이베리아 역대 국왕들은 즉위 후 반드시 들려서 신격화된 조상을 기렸다. 그러다 미리안 3세 이후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잡히면서, 왕들의 발길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