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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13대 군주 ფარსმან | 파라스마네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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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파라스마네스 2세 |
조지아어 | ფარსმან | |
라틴어 | Pharasmanes II | |
별명 | 용감한 자(The Valiant , ქველი) | |
생몰 년도 | 미상 ~ 160년 | |
재위 기간 | 116년 ~ 1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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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베리아 왕국 13대 군주.2. 생애
이베리아 왕국 12대 군주 아마자습 1세의 아들이다. 116년 아버지가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니시비스에서 전사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국의 영토를 확장해 강대한 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콜키스, 아르메니아, 알바니아 일대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고자 기회를 엿봤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28년 동방 속주를 순방하면서 여러 왕들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냈는데, 가장 큰 선물은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하드리아누스가 보낸 금박을 입힌 망토를 300명의 범죄자들에게 넘겨 경기장에서 과시하도록 하는 등 조롱을 일삼았고, 하드리아누스를 알현하는 걸 거부했다고 한다.그 후 그는 흑해 연안 지역에 거주하는 지드리트(Zidrite) 부족의 영토를 공략해 콜키스를 로마의 소아시아 영토에서 분리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134년 알란 용병대를 동원하여 로마와 파르티아의 영토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아르메니아, 알바니아, 메디아 및 카파도키아 일대를 휩쓸고 수많은 이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군은 제3차 유대-로마 전쟁에 대거 동원되어서 그를 저지할 여력이 없었고, 파르티아 역시 내전으로 인해 이베리아 왕국의 침략 행위를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다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새 황제에 즉위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상당한 영토와 재물을 이베리아에 선사했고, 그는 이에 만족하여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144년, 그는 아내와 대규모 사절단을 거느린 채 로마를 방문했고,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벨로나 신전에 그의 기마상을 두는 걸 허용했다. 이렇듯 위세를 떨치던 그였으나 최후는 비참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60년경 파르티아가 보낸 요리사에게 독살당했다고 한다. 사후 아들 가담이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