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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바웅 왕조 제11대 국왕
티바 민 သီပေါမင်း | Thibaw Min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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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D9C4><colcolor=#fff> 출생 | 1859년 1월 1일 |
꼰바웅 왕조 만달레이[1] | |
사망 | 1916년 12월 19일 (향년 57세) |
인도 제국 봄베이 주 라트나기리[2] | |
재위 기간 | 제11대 국왕 |
1878년 10월 1일 ~ 1885년 11월 30일 | |
전임자 | 민돈 민 |
후임자 | 없음 ( 왕조의 멸망) |
부모 |
아버지 :
민돈 민 어머니 : 라웅쉐 미바야 |
종교 | 상좌부 불교 |
서명 |
[clearfix]
1. 개요
미얀마의 꼰바웅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자 미얀마 최후의 군주. 티바 민을 끝으로 미얀마는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대신 영국령 버마가 들어선다.2. 생애
티바 민은 민돈 왕과 왕비들 중 하나인 라웅쉐 미바야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아명은 마웅야이셋(မောင်ရေစက်)이었다. 그러나 민돈 왕은 티바 민이 태어난 이후 랑쉐 비마야 왕비를 불교 사찰로 추방해버렸고, 랑쉐 왕비는 사찰에서 비구니로 살다가 생을 마쳐야만 했다. 다만 티바 왕자는 아버지의 비호 아래 사찰에서 불경들을 공부했고, 나중에는 까다롭기로 유명했던 불경 해석시험을 통과하면서 왕과 제1 왕비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민돈 왕을 모시는 재상들 중 하나였던 신뷰마신이 자신의 딸 수피얄랏과 티바 왕자를 중매를 서 결혼시켰고, 티바 왕자는 신뷰마신의 힘을 뒷배경으로 삼아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급부상한다.신뷰마신은 민돈 왕 재위기 말년에 급속도로 세를 불렸다. 신뷰마신은 자신의 사위였던 티바 민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당시 티바 왕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어린 왕족들을 싸그리 살해해버리는 등 가혹한 대숙청을 펼치며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결국 신뷰마신의 숙청 덕에 티바 왕자는 1878년에 미얀마의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티바 민이 즉위했을 당시 미얀마는 이미 망해가는 상황이었다. 당시 미얀마 남부 절반은 영국이 강제로 빼앗아 무려 30년 가까이 사실상 식민통치하고 있던 실정이었고, 왕권은 제대로 서지 않아 왕가의 권위는 날로 쇠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티바 민은 당연히 영국으로부터 이 영토를 돌려받고 싶어했다. 티바 왕은 영국의 최대 경쟁자라고 할 수 있었던 프랑스에 접근했다. 그러나 이미 태국을 중간영토로 삼고 베트남을 삼키는 것에 어느 정도 암묵적으로 영국과 합의가 이루어진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미얀마의 독립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티바 왕의 외교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영국의 간섭은 더더욱 심해지게 된다.[3]
티바 왕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해보면서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려 노력했다. 당시 국고가 바닥나자 세금을 올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 1878년에 국가가 주최하는 국영 복권을 도입하면서 돈을 끌어모으려 들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복권 제도는 잠깐동안만 인기를 끌다가 불공정한 추첨 제도와 부정부패 등으로 금방 열기가 식었고,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사느라 전재산을 탕진해버리는 폐혜를 낳기도 했다. 결국 야심차게 추진한 복권 사업은 1880년에 완전히 접고야 만다. 그 외에도 티바 왕은 부서를 14개로 확대개편하고 영국령 인도의 행정제도를 본떠 미얀마를 개혁하려 시도했다.
3. 폐위
1885년 티바 왕은 궁전에서 영국이 장악한 미얀마 남부 지방을 해방하겠다고 선포했다. 영국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티바 왕을 국제간 조약을 무시하는 폭군으로 몰아갔고, 미얀마를 완전히 멸망시켜 식민지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영국은 해리 프렌더가스트 장군이 이끄는 11,000명의 원정대를 파견해 미얀마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영국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고, 전쟁을 선포한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만달레이의 왕궁까지 입성에 성공했다. 티바 왕과 왕족들 대부분은 왕궁에서 영국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강제로 왕위에서 끌여 내려진 티바 왕은 영국군에게 연행되어 이라와띠 강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증기선에 올라타 인도로 끌려갔다. 이때 수많은 민중들이 이라와띠 강변에 몰려와 티바 왕이 연행되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폐위된 티바 왕은 수피얄랏 왕비, 그리고 2명의 딸들과 함께 인도 제국의 라트나기리 지방[4]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영국 식민정부는 티바 왕에게 매년 35,000 루피에서 42,000 루피 사이의 연금을 지급했고, 1906년부터는 10만 루피로 크게 인상했다. 그리고 티바 왕을 위해 1906년 125,000루피를 들여 유배지에 라테라이트와 벽돌로 지어진 2층 규모의 새로운 궁전을 지어주었다. 왕은 영국 식민당국의 지원을 받아 꽤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왕은 라트나기리에서 살면서 웬만하면 궁궐을 떠나지 않은 채 조용한 삶을 살았다. 가끔씩 지역에서 여는 디왈리 축제에 기부금을 보내는 것을 제외하면 대외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왕은 라트나기리에 온지 24년이 지난 1916년 12월 15일에 눈을 감았고, 인근의 기독교 공동묘지에 묻혔다.[5]
4. 사후
왕과 함께 추방생활을 하던 나머지 왕족들은 왕이 승하한지 3년이 지난 1919년에 미얀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티바 왕의 첫째 딸이었던 '미야트 파야 기' 공주는 인도에서 추방생활을 하던 중 눈이 맞은 인도인 운전사 고팔 사완트 때문에 인도로 다시 돌아갔다. 이때 다른 왕족들이 극렬히 반대했지만 공주는 끝까지 완고하게 자신의 사랑을 찾아 떠났다. 공주는 사랑을 쟁취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인도에서 굉장히 빈곤한 삶을 살았다. 고팔 사완트가 공주가 받은 연금을 대부분 탕진해버렸기 때문이다. 미야트 공주는 고팔 사완트와의 사이에서 투투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다. 투투는 자라서 11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남겼고, 이들의 후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미얀마 왕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인도에서 하층민으로 살고 있었다고 한다.
둘째 딸인 미야트 파야 랏 공주는 부왕의 뒤를 이은 작위 요구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비밀 비서였던 킨 마웅 랏과 결혼했고, 그들은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지 못했으나 시종의 아이를 입양했다고 전해진다.
세번째 딸인 미야트 파야 공주는 2번 결혼했다. 첫 상대는 미얀마 왕자였고, 두번째 상대는 변호사였다.
네번째 딸인 미야트 파야 갈라이 공주는 승려였다가 환속한 남자와 결혼했다. 이들은 6명의 아이들을 낳았고, 자녀들 중 하나가 현재 꼰바웅 왕조의 왕위요구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