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02:05:12

클라우디오 카니자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 선수
파일:caniggia.jpg
이름 클라우디오 카니자
Claudio Caniggia
본명 클라우디오 파울 카니히아
Claudio Paul Caniggia
출생 1967년 1월 9일 ([age(1967-01-09)]세)
아르헨티나 엔데르손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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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5cm
직업 축구선수 ( 윙어,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CA 리버 플레이트 (1985~1988)
엘라스 베로나 FC (1988~1989)
아탈란타 BC (1989~1992)
AS 로마 (1992~1994)
SL 벤피카 (1994~1995)
CA 보카 주니어스 (1995~1998)
아탈란타 BC (1999~2000)
던디 FC (2000~2001)
레인저스 FC (2001~2003)
카타르 SC (2003~2004)
웸블리 FC (2012)
국가대표 50경기 16골 ( 아르헨티나 / 1987~2002)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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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와 함께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선수 중 한 명이다. 이 점을 따서 '바람의 아들'(El Hijo Del Viento)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1]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클럽 수준에서 카니자는 CA 리버 플레이트, 엘라스 베로나 FC, 아탈란타 BC, AS 로마, SL 벤피카, CA 보카 주니어스, 던디 FC, 레인저스 FC, 카타르 SC에서 뛰는 등 선수 생활 내내 저니맨 신세였다.

카니자는 1993년에 코카인을 복용한 죄로 13개월의 금지를 받았고, 금지가 만료된 후 그는 파말랏 유제품 회사의 자금으로 1년 동안 SL 벤피카로 이적했다.

1996년 9월에 그의 어머니가 건물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참극이 벌어져 1996-97 시즌은 출전하지 않고 보냈다.

아르헨티나 언론계의 거물인 에두아르도 유르네키안은 AS 로마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는 그의 TV 방송국에서 경기하는 대가로 CA 보카 주니어스에 빌려주면서 카니자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1년 계약이 끝나자 카니자의 부인은 아르헨티나 복귀를 거부했고, 카니자는 1997-98 시즌 보카 주니어스에서 뛰기 위해 돌아왔지만 1998년 월드컵 팀에서 빠지면서 그의 등장은 산발적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84px-ClaudioPaulCaniggia.jpg
아탈란타 BC 시절

또 한 시즌 동안 활동을 하지 않았던 그는 세리에 B 아탈란타 BC에 다시 합류했지만, 감독과의 분쟁 후 한 시즌 만에 떠났다. 그 후 그는 이탈리아에서 함께 활동하면서부터 잘 알고 있던 이바노 보네티가 운영하는 스코틀랜드 클럽 던디 FC와 계약했다. 던디의 스타 플레이어가 된 그는 컵 결승전에서 라이벌 셀틱 FC를 상대로 골을 넣은 후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되어 레인저스 FC로 이적했다.

2012년 6월, 그는 웸블리 FC에 합류하여 새로운 시즌을 위한 FA컵 캠페인에 참가하기로 동의한 몇몇 전직 프로 축구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카니자와 레이 패를루어, 마틴 키언, 그래미 르 소, 제이미 모레노, 대니 디치오와 브라이언 맥브라이드, 그리고 데이비드 시먼과 전 잉글랜드 감독 테리 베너블스는 은퇴 후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은퇴했다.그는 웸블리 경기장에서 클럽 플레이를 합니다. 2012년 8월 12일, 그는 FA컵 예선전에 출전했다. 45세의 그는 랭포드와의 경기에서 3 대 2로 승리하며 선제골을 넣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카니자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시기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의 주역인 호르헤 발다노가 부상으로 인해 은퇴하고 디에고 마라도나의 기량이 전보다 떨어져 있던 시기에 카니자는 23살의 어린 나이로 아르헨티나 주전 윙어로 기용되었다.

밀라노에서 열린 카메룬과의 첫 경기에서 벤자민 매싱이 공을 들고 앞으로 나가면서 한 번에 세 번 파울을 당하며 카메룬에게 직립 레드 카드를 얻었지만[2] 아르헨티나는 카메룬에게 1:0으로 패하며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후 경기에서 카니자는 선발로 나섰다.
파일:maradona brazil assist 1.gif
파일:maradona brazil assist 2.gif
브라질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는 카니자
이 대회에서 카니자의 하이라이트는 16강전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대륙 라이벌 브라질을 만나 경기 내내 탈탈 털리고 있었는데, 브라질의 집중 마크로 고전하고 있던 마라도나가 환상적인 드리블 돌파에 이은 킬 패스를 페널티 에어리어 반대쪽의 카니자에게 연결, 카니자가 골키퍼를 제치고 득점하여 정규 시간 종료를 10분 남기고 단 한 방으로 브라질을 가라앉혔다. 경기는 그대로 1-0으로 종료. 세바스티앙 라자로니 당시 브라질 감독이 경기 종료 후 남긴 말은 "왜 졌는지 모르겠다."였다. 카니자의 킬러 본능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당시 브라질은 브라질이 대대로 추구하던 공격 축구의 화려함이 절정에 달해 "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팀"이라는 평까지 나왔고, 월드컵에서도 우승 후보 0순위였기에 역습 한 방으로 탈락한 건 꽤 충격적인 결과였다. 2014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의 안방에서 우승할 기회를 잡자 이 카니자의 골 이야기가 들어간 노래를 브라질 거리 곳곳에서 부르고 다녔을 정도이다.[3]

8강에서 아르헨티나는 승부차기 끝에 유고슬라비아를 이기고 4강에 진출했다.
파일:maradona 1990 italy2.gif
이탈리아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는 카니자
스타디오 산 파올로에서 이탈리아와의 준결승전에서 전반 17분에 살바토레 스킬라치에게 선제골을 실점했으나 카니자는 후반 67분에 517분 동안 골을 내주지 않던 발테르 쳉가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으며 1:1 동점으로 연장전에 들어갔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세르히오 고이코체아의 맹활약으로 승부차기 끝에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카니자는 소련과의 경기에서 경고를 받은 뒤 이탈리아를 상대로 고의적으로 공을 처리한 것에 대해 옐로카드를 한 장 더 받아 출전정지를 당하는 바람에 스타디오 올림피코 관중석에서 아르헨티나가 결승전에서 서독에게 1:0으로 패하는 걸 지켜보았다.

199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카니자는 대회 내내 2골 4도움을 기록하면서 우승에 기여했다. 또한 1992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어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도왔다. 1993년 2월, 카니자는 마르 델 플라타에서 열린 아르테미오 프랑치 트로피에서 덴마크와의 결승전에서 1:0으로 끌려가던 중 동점골을 넣었고, 아르헨티나는 마침내 우승하였다.
파일:마라도나 카니자.gif
마라도나의 패스를 받고 골을 넣은 카니자
카니자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나이지리아와의 2차전에서 2골을 터뜨려 아르헨티나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마라도나는 도핑 때문에 퇴출을 당하고 말았다. 불가리아와의 세 번째 경기에서도 카니자는 출전했지만 26분만에 교체아웃 되면서 아르헨티나가 0-2로 패하는 걸 지켜보았다.[4] 이후 루마니아와의 16강전에서 아르헨티나는 3-2로 패해 탈락했다.

다니엘 파사레야 감독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긴 머리를 자르는 것을 거부한 그는 몇 년 동안 대표팀에서 출전하지 못했다. 카니자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 덕분에 잠시 복귀했지만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스웨덴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심판에게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레드카드를 받아 월드컵 벤치에서 퇴장당한 첫 번째 선수가 됐다.

3. 플레이 스타일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선수.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초월적인 스피드로 유명했으며,[5]일관되게 목표를 득점할 수 있는 능력 외에도 그는 다른 포워드를 똑같이 플레이하고 팀 동료를 위한 기회를 창출을 할 수 있었으며 종종 고급 플레이 메이커 또는 창의적인 포워드로 배치되었다.

4. 기타

  • 카니자는 아르헨티나 모델 마리아나 나니스와 결혼하여 아들 케빈 액셀, 아들 알렉산더 디미트리, 그리고 딸 샬롯 찬탈의 세 아이를 슬하에 두고 있다.

[1] 야구팬들에게는 이종범의 별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카니자의 별명으로 먼저 쓰였다. [2] 매싱은 카니자를 발로 걷어찼다. [3] 아르헨 우승하면… 브라질 ‘깊어지는 악몽’ [4] 0-1로 패했다면 조 1위를 유지할수 있었지만, 0-2로 패하면서 3위까지 추락하며 와일드카드로 16강 진출을 하였다. [5] 실제로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100m 기록을 세웠으며 현재까지 유지 중이다. 이 때 기록은 10.2로 올림픽 100m 달리기 예선전에 나갈 수 있는 엘리트 육상선수 수준의 기록이다. 같은시기 한국 최고기록보다 0.1초 이상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