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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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草加次郎事件일본에서 1962년에서 1963년에 걸쳐 일어난 일련의 폭발물 테러 및 협박 사건.
'쿠사카 지로 사건'이라는 명칭은 신원 불명의 범인이 자신을 '쿠사카 지로'라고 자칭한[1] 데서 붙은 이름이다. 명확한 단서가 있는데도 범인의 정체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일본에서는 역대급 미제사건의 예시를 들어보라고 하면 꼭 이 사건이 거론될 정도로 전후 일본 범죄사에서도 손꼽히는 미제사건이다. 일각에서는 3억 엔 사건, 제국은행 사건, 일본국유철도 3대 미스터리 사건과 묶어서 일본 4대 미제사건으로 간주하기도 한다.[2]
범인의 이름인 '草加'는 앞글자 草를 훈독한 '쿠사카(くさか)'와 음독한 '소카(そうか)'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소카 지로 사건'이라고 불러도 틀린 것은 아니며 본 문서에서는 전자를 채택하여 '쿠사카 지로 사건'으로 칭한다. 이 사건을 다룬 NHK <다크사이드 미스테리> 방영분에서는 '소카 지로 사건'으로 칭하며 요코스카선 전차 폭파 사건을 다룬 후지 테레비의 <기적체험! 언빌리버블> 방영분에서는 중간에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쿠사카 지로 사건'으로 칭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두 가지 독음을 병기하고 있다.
2. 사건 경위
10여 건에 걸쳐서 폭파 및 협박, 총격 등의 범죄가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각 사건별로 서술한다. 특히 1962년 11월에는 한 달 동안 무려 5차례에 걸쳐 유사 수법의 사건이 발생했다.2.1. 1962년: 연쇄 폭발물 사건
1962년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일련의 폭발물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2.1.1. 1차 사건: 1962년 11월 4일
오전 11시경 도쿄도 시나가와구에 위치한 가수 시마쿠라 치요코[3]의 후원회 사무실에 발송인 불명의 봉투 하나가 배달되었다. 봉투 안에는 길이 약 13cm, 폭 4cm 가량의 골판지로 된 원통이 하나 들어 있었고 이 통 안에는 화약[4]이 들어 있었으며 통 앞면에는 '祝', '呪'라는 문자가, 뒷면에는 '草加次郎'라는 이름과 'K'라는 이니셜이 각각 적혀 있었다. '草加'는 함께 적혀 있던 이니셜 K를 근거로 '쿠사카'로 읽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에 따라 수사 당국에서는 범인의 이름을 '쿠사카 지로'로 칭하게 되었다.당시 경찰과 일부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악질 극성팬의 소행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는데 사건 발생 2년 전인 1960년에 10대 소년팬이 시마쿠라의 자택 현관에 폭발물을 투척한 사건이 있었고 이보다 앞선 1957년에는 전설적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공연 도중에 동갑내기 극성 소녀팬[5]에게 염산 투척을 당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6]
한편 봉투에 찍혀 있던 소인의 일부가 지워져 'X谷'이라는 글자만 식별이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발송지가 시부야(渋谷)인지 시타야(下谷)[7]인지 불분명했으나 조사 결과 범인은 전날인 11월 3일에 봉투를 보낸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망자는 없었으나 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한 남성 사무직원(당시 23세)이 화약이 연소되면서 손에 전치 2주의 화상을 입었다.
2.1.2. 2차 사건: 1962년 11월 13일
롯폰기에 거주하던 호스티스(당시 41세)의 자택에 1차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폭발물이 배달되었으나 불발에 그쳤다. 이 사건에서는 범인의 명의가 '스기카 지로(杉加次郎)'로 표기되었는데 필적 감정 결과 1차 사건과 동일인으로 밝혀졌다.2.1.3. 3차 사건: 1962년 11월 20일
오후 5시경 유라쿠쵸의 뉴토호 극장 로비의 소파에서 약 10cm 정도 길이의 봉투가 발견되었다. 최초 발견자인 당시 19세였던 여성 관객이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이 봉투를 발견하고 들어올렸다가 뭔가가 스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봉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로 인해 이 여성은 왼손에 화상을 입었으며 봉투에는 역시 '쿠사카 지로'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2.1.4. 4차 사건: 1962년 11월 26일
오후 4시경 3차 사건이 발생한 뉴토호 극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히비야 극장 2층의 남자화장실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당시 현장에 있던 여성 청소원의 증언에 따르면 청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 화장실 안에서 폭음이 들렸다는 것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마루노우치 경찰서 수사관들의 조사 결과 세면대 위에 놓여 있던 종이 상자가 청소원이 문을 열면서 생긴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폭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시청 조사에서 이번 사건에 사용된 폭발물은 앞선 사건들처럼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상자 안에 탄환과 흑색 화약, 건전지를 넣고 전기 회로를 연결한 것임이 밝혀졌으며 비교적 간단하지만 상자에 충격이 가해지면 폭발하도록 되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 상자에도 '쿠사카 지로'의 서명이 있었다.2.1.5. 5차 사건: 1962년 11월 29일
오후 5시경 타마가와 세타정(現 세타가야구)의 한 공중전화에 들어간 20대 남성이 케이스에 들어 있는 상태로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이시카와 타쿠보쿠 시집 <한 줌의 모래> (一握の砂)를 발견했다. 남성은 누군가 두고 간 물건인 줄 알고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시집을 주워서 살펴보던 중 케이스와 책 사이에 이름이 적힌 책갈피 비슷한 종이를 발견하고 이것을 꺼내려 잡아당긴 순간 폭발이 일어나면서 왼손에 화상을 입었다. 조사 결과 책 한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는 전기 배선으로 연결된 건전지와 흑색 화약이 들어 있었다. 케이스와 책 사이의 종이를 잡아당기면 전기가 통하면서 발화, 폭발하도록 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 책갈피 비슷한 종이에도 역시나 '쿠사카 지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이 사건은 생활고를 비관한 저소득층의 범행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범행에 사용된 <한 줌의 모래>에 실린 「我を愛する歌」 중의 하나인 'はたらけど はたらけど猶わが生活楽にならざり ぢつと手を見る'[8]라는 단가를 근거로 고도 성장기임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자신의 경제적 형편을 비관해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쿠사카 지로'를 자칭해 저지른 일이라고 본 것이다.
2.1.6. 6차 사건: 1962년 12월 12일
오후 8시경 아사쿠사의 유명 사찰 센소지 관음당 앞의 향로대 근처에서 엘러리 퀸의 추리 소설 책[9]이 발견되었다. 이 책을 발견한 경비원이 초소로 가져가서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책이 펴지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고 표지를 찢어 보니 그 안에는 화약과 건전지 2개가 장착되어 있었다. 다행히 화약이 터지지는 않았고 경비원은 즉시 관할 경찰서에 이를 신고했다.2.2. 1963년
1962년 6차 사건 이후에는 경시청 측에서 기동수사대[10]를 투입하여[11] 수사를 재개했으나 기동수사대 투입 직후부터 '쿠사카 지로'가 돌연 종적을 감추면서 일련의 폭발물 테러도 종지부를 찍은 듯 보였다. 게다가 이 해 3월에 요시노부 유괴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언론과 사회의 관심이 이 쪽으로 쏠리게 되었고 자연스레 '쿠사카 지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그렇게 사회에서 잊혀지는가 싶었던 '쿠사카 지로'는 요시나가 사유리 협박 사건을 시작으로 범행을 재개했고 수법도 이전보다 더 과격해져 급기야는 총격 사건까지 일으키기에 이른다.
2.2.1. 요시나가 사유리 협박 사건[12]
배우 요시나가 사유리(사건 당시 18세)의 자택에 '쿠사카 지로' 명의의 협박편지가 배달된 사건. 1963년 8월 30일 요시나가의 가족들이 팬레터들을 정리하던 중 이상하게 두툼한 흰 봉투 하나를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봉투 안에는 총알 하나와 함께 검은 매직펜으로 쓰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박장이 들어 있었다.5월 18일, 오후 7시, 우에노역 정면 옆의 다방 '히가시'로 현금 100만엔을 당신의 아버님이 가지고 올 것. 7시 20분에 전화로 당신의 아버님을 다나카 씨라고 하면서 불러내겠음. 쿠사카 지로.
봉투의 소인은 5월 14일자 시타야 우체국으로 되어 있었으며 3개월이 넘도록 팬레터들 틈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발견이 늦어졌다. 함께 발견된 쿠사카 지로 명의의 다른 편지는 5월 23일자, 마찬가지로 시타야 우체국 소인으로 된 것으로, 돈을 가져오라는 날짜가 5월 27일로 변경된 것을 제외하면 편지의 내용과 동봉된 물품이 5월 14일자 소인의 것과 일치했다. 이 편지로 1년 전인 1962년 1차 사건에서 소인이 지워져 발송처를 알 수 없었던 봉투가 시타야 우체국에서 발송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9월 1일 가족들의 신고를 접수한 경시청 수사 4과의 담당 수사관이 요시나가의 자택을 방문하여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팬레터를 조사한 결과 가족들이 최초로 발견한 2통을 포함해 총 6통의 '쿠사카 지로' 명의의 협박편지가 발견되었다. 새로 발견된 편지의 소인은 각각 5월 9일, 7월 15일, 7월 17일, 7월 22일자로 되어 있었다.
9월 6일에 7번째 협박편지가 도착했다. 소인은 9월 5일자 시타야 우체국 소인이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9월 9일 오후 7시 10분 우에노발 아오모리행 급행 토와다를 탈 것
진행방향 왼쪽 승강구에 타서 밖을 볼 것
뒤쪽 차량에 탈 것
파랑색(녹색) 회중전등이 점멸하는 곳에서 현금 100만엔을 던질 것
8시까지 완료
쿠사카 지로
열차가 예정대로 출발하지 않을 시 10일
이 협박장은 사실 이전에도 이미 배달되었다. 5번째(7월 17일)와 6번째(7월 22일) 협박편지도 지정된 날짜만 다를 뿐 내용은 완전히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7번째 협박편지에는 시한폭탄을 의미하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협박편지에 적힌 현금 전달 방법은
미후네 토시로 주연의 영화 <
천국과 지옥>을 모방한 것이었다.[13]진행방향 왼쪽 승강구에 타서 밖을 볼 것
뒤쪽 차량에 탈 것
파랑색(녹색) 회중전등이 점멸하는 곳에서 현금 100만엔을 던질 것
8시까지 완료
쿠사카 지로
열차가 예정대로 출발하지 않을 시 10일
이후 다른 여배우 와니부치 하루코[14]와 쿠와노 미유키[15]에게도 협박편지가 배달되었음이 밝혀졌으나 소인은 불명. 여담으로 협박편지가 발견되기 전인 8월 9일 요시나가의 팬이라는 25세의 남성이 직접 제작한 사제 권총과 탄환, 나이프를 소지하고 요시나가의 집에 침입했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나 쿠사카 지로와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16]
2.2.2. 우에노 공원 노상 저격 사건
7월 15일 여름 특별 공연이 열리던 우에노공원 인근 노상에서 오뎅 노점을 열고 있던 27세 남성이 총격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남성은 당일 비로 손님이 뜸하자 오후 7시45분경 철수하기 위해 준비하던 도중 뒤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전치 3주의 중상을 입은 이 남성은 검사 결과 공기총 탄환 비슷한 금속 파편이 왼쪽 어깨를 관통하여 왼쪽 폐까지 닿아 있었는데 이 금속 파편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권총용 탄환보다 크기가 작은 것이었다.당시에는 총격 사건이라는 점 때문에 폭력단 간의 세력 다툼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경시청 수사 4과[17]가 투입되었지만 아직 '쿠사카 지로'와의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언론에서도 사건을 크게 보도하기는 했지만 이 시점에서 '쿠사카 지로'의 연관 여부에 대해서는 보도되지 않았다.
사건으로부터 10일 후인 7월 25일 우에노 경찰서에 길이 1.2cm, 직경 3mm 크기의 탄환 1발이 들어있는 봉투가 배달되었다. 탄환 이외에 편지 등은 들어 있지 않았으며 감식 결과 총격 피해자의 몸에서 검출된 탄환과 동일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봉투 뒷면에 쿠사카 지로의 서명이 되어 있었으며 필적 감정 결과 1962년에 발생한 일련의 연쇄 폭발물 우편에서 발견된 서명의 필적과 일치했다.
2.2.3. 긴자선 열차 폭파 사건
9월 5일 오후 8시 14분경 긴자선 쿄바시역에 정차한 아사쿠사발 시부야행 열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 굉음과 함께 차량 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로 승객 10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감식 결과 폭발물은 비교적 폭발력이 낮은 흑색 화약으로, 화약이 채워진 유리병을 건전지 2개가 연결된 전기 회로와 남성용 손목시계를 이용해 만든 기폭장치로 연결한 것이었다.[18]이 사건은 일련의 '쿠사카 지로 사건'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취급되는데 자세한 사항은 아래의 '사건의 영향' 문단 참조.
2.3. 번외: 토요코 백화점 연쇄 폭발물 테러 사건[19]
위의 우에노공원 저격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사건. 7월 24일 오후 3시경 시부야의 토요코 백화점(現 토큐백화점 토요코점)에 40대 가량의 남성 목소리로 현금 500만엔[20]을 요구하면서 만약 경찰에 신고하거나 현금을 가져오지 않으면 백화점을 폭파시키겠다는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백화점 측의 신고를 접수한 시부야 경찰서에서는 여경에게 백화점 직원 유니폼을 입히고 백화점 주변에서 잠복했으나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3시 55분경 백화점 서관 9층 남자 화장실에서 폭발이 일어났다.8월 11일 오후 4시 45분경에는 백화점 동관 옥상의 관상어 매장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로 유리 어항 몇 개가 파손되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8월 14일 백화점에 시즈오카현 후지 우체국에서 발송된 소포 하나가 배달되었다. 여성 직원이 소포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포장을 풀고 안에 든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소포가 폭발했으나 직원은 다행히 무사했다. 상자는 사방 11cm, 깊이 4.5cm 크기의 오동나무 상자로, 건전지와 도화선이 붙은 뇌관이 연결되어 있어 뚜껑을 여는 순간 인화되는 구조였으며 소포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박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현금 500만엔을 속달 소포로 시즈오카현 누마즈 우체국으로 보낼 것. 경찰에 신고하면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매장을 폭파할 것임. 목숨은 보장할 수 없음. 돈을 보낼 때는
요미우리 신문에 '○월 ○일에 보냄. ○월 ○일 ○시에 도착함'이라는 광고를 게재할 것.
백화점 측은 경찰과 상의 끝에 8월 17일자 요미우리 신문에 '8월 19일 송부, 8월 20일 오전중 도착 예정'이라는 광고를 게재하고 현금 100만엔이 든 소포를 우선 보내면서 다시는 폭탄을 반입하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편지를 동봉했으며 8월 19일 밤부터 수사관 15명이 누마즈 우체국에 파견되어 잠복에 들어갔으나 범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쿠사카 지로와의 연관성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범행에 사용된 폭발물의 구조에 공통점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토요코 백화점 사건은 처음부터 분명히 금전이 목적이었고 백화점 앞으로 보낸 협박편지의 필적과 '쿠사카 지로'의 필적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수사진 내부에서는 토요코 백화점 사건의 범인과 '쿠사카 지로'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3. 공소시효 만료
'쿠사카 지로'가 필적 이외에도 선명한 지문을 남겼기 때문에 단시간에 검거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경시청에서는 범인을 특정해 내지 못했다. 19,000명 이상의 수사 인력을 투입해서 화약 및 폭약 매니아 약 9,600명 가량을 수사선상에 올리고 700만 건에 걸쳐 지문 조회를 하는 한편 필적 감정도 실시했으나 끝내 '쿠사카 지로'로 추정되는 인물을 특정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에도 '쿠사카 지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수사가 계속되기는 했지만 결국 별다른 성과 없이 1978년 9월 5일자로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4. 사건의 영향
일본 사회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사건이었던 만큼 모방범죄가 극성을 부렸던 것도 사건 해결에 난항을 빚은 요인 중 하나였다. 특히 긴자선 열차 폭파 사건 전후로 이를 모방한 협박 및 폭파 테러 예고 등의 사건들이 3주에 걸쳐 무려 180건에 달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쿠사카 지로를 사칭한 전화와 협박장이 500건 이상에 달했다.2년 후인 1965년부터 이 긴자선 폭파 사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대중교통 대상의 테러 사건[21]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1968년에 일어난 요코스카선 전차 폭파 사건의 범인 와카마츠 요시키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은 '쿠사카 지로'를 존경해서 그를 모방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22] 전술한 배경 때문에 요코스카선 전차 폭파 사건은 단독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전역의 경찰서가 공동으로 수사하는 '광역 중요 지정사건'[23]으로 지정된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5. 미디어에서
만화 <도쿄 사건>과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 《물의 잠 재의 꿈(水の眠り 灰の夢)》[24]이 이 사건을 소재로 다루었다. 이 중 <물의 잠 재의 꿈>에서는 작가가 독자적으로 그려낸 범인상을 묘사하고 있다.테레비 아사히의 아침 보도 프로그램 '수퍼 모닝' 2009년 6월 23일자 '시공 미스테리' 코너와 NHK BS 프리미엄의 '다크사이드 미스테리' 2020년 7월 2일 방영분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6. 유사 사건
-
오사카 일요 연쇄 폭발물 테러 사건[25]
일명 '울트라 야마다(ウルトラ山田)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폭발물 테러 사건. 1974년 2월 18일 오사카시 텐노지구 킨테츠 우에혼마치역 구내 물품보관함 근처에서 폭발이 발생했고 현장 인근에서 킨테츠 사장 앞으로 5천만엔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협박장이 발견되었다. 이후 치바라는 이름의 형제[26]가 범인으로 체포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형제가 체포된 후 자신을 '울트라 야마다'라고 자칭하는 폭발물 테러범이 등장해 치바 형제의 석방을 요구하며 오사카시 일대에서 연쇄적으로 폭발물 테러를 벌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진범이 밝혀지고 나서 일본 사회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이없게도 범인은 사카이시에 거주하던 당시 중학교 2학년 소년이었다. 이 소년은 폭탄 매니아로, 자택에서 사제폭탄을 제조해서 테러를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또한 협박장에 쓰여 있던 이름 울트라 야마다도 사실은 사칭이었다. 1967년 1월 다이마루 백화점 고베점의 화장실에서 일어난 폭파 사건의 범인이 당시 현장에 남기고 간 협박장에 쓰여 있던 이름이 바로 울트라 야마다였는데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1]
2차 사건 제외.
[2]
앞의 세 사건도 발생으로부터 약 50~70여년이 지난 2020년대에도 많은 의혹들이 풀리지 못한 채 남았으며 제국은행 사건과 일본국유철도 3대 미스터리 사건 중
시모야마 사건은 소설가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제국은행 사건은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의 '천은당 사건'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시모야마 사건은
유리 린타로 시리즈의 미완 작품 모조 살인사건에서 작중의 살인사건이 시모야마 사건과 거의 유사한 타임라인을 따라간다는 설정으로 차용되었다.
[3]
1938년생. 오치요상(お千代さん)이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엔카 가수로
미소라 히바리와도 친했으며,
홍백가합전에서 홍팀 토리를 통산 6차례나 맡았던 당시 인기 절정의 가수였다. 2013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4]
불꽃놀이에 쓰이는
흑색화약으로 추정되었다.
[5]
미소라 히바리와 이 소녀팬 둘 다 사건 당시 19세였다.
[6]
두 사건 모두 도쿄로 상경한 지방 출신의 10대 청소년들이 인기 연예인에게 비뚤어진 열등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사건이었다.
[7]
현재의
다이토구 서부.
[8]
번역하자면 '일을 해도 일을 해도 여전히 내 생활은 편해지지 않고 가만히 손을 바라보네'. 돈벌이의 괴로움을 노래한 단가. 실제로 타쿠보쿠는 죽기 전까지 생활고와 빚에 시달렸다.
[9]
<범죄 캘린더>라는 제목의 단편집이다.
[10]
1962년 10월에 발족한 기구. 경시청 관내 광역수사 권한을 갖는 특수부대다.
[11]
이전까지 사건 발생 장소의 각 관할 경찰서에서 자체 수사를 하다 보니 혼선이 빚어지는 등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커버하기 위한 조치였다.
[12]
협박장이 처음 발견된 시기는 1963년 8월이나 뒤늦게 추가로 발견된 최초의 협박장이 5월 14일자로 시작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편의상 1963년 사건들 중 최초의 사건으로 간주한다.
[13]
같은 해 3월에 발생한
요시노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코하라 타모츠도 이 영화의 예고편에서 착안해 범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2년 후인 1965년에 코하라가 범행을 자백하고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해결되었다.
[14]
1960년대 초반 쇼치쿠를 대표하는 스타로 알려졌으며 쇼와 시대의 명배우
하라 세츠코의 재림이라는 평을 받은 여배우.
[15]
전전 쇼와 시대 인기 여배우였던 쿠와노 미치코의 딸. 1954년 아역으로 데뷔하여 쇼치쿠 작품 중심으로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가 1967년 결혼하면서 은퇴했다.
[16]
이 남성의 범행 동기가 실로 황당했는데 그는 경찰 조사에서 언젠가 요시나가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요시나가의 팔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서 기념하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17]
現 경시청 조직범죄대책부. 통칭 '마루보(マル[ruby(暴, ruby=ぼう)])'라고 불리며 폭력단 관련 범죄를 포함한 총기, 마약 범죄 등의 강력사건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부서.
[18]
일종의 시한폭탄 같은 것으로, 손목시계를 이용한 타이머와 히터를 장치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히터가 가열되면서 폭발하는 원리였다.
[19]
왜 '번외'가 붙었는지는 후술.
[20]
참고로 당시 대졸
공무원 초임이 15,700엔이었으며 500만엔은 복권 1등 당첨금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21]
대표적인 사례가 1967년에 발생한 산요 전기철도 열차 폭파 사건. 승객 2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상을 입은 대참사였으나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채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22]
와카마츠는 '쿠사카 지로'는 체포되지 않았지만 그를 모방한 자신은 체포되었다면서 '쿠사카 지로'를 훌륭하다고 치켜세우는 한편 쿠사카 지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자신도 이런 일을 저지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그를 미워한다고도 진술했다.
[23]
쿠사카 지로 사건 이후 연쇄살인범
니시구치 아키라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저지른 살인 및 사기 사건을 계기로 광역 범죄 대책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생긴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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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2011년 5월 정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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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이 일어난 날짜가 모두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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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형 44세, 동생 3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