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에서 / 내륙에서 본 전경 |
콜로 시가지의 항공 사진
1. 개요
아랍어 القل 베르베르어 ⴽⵓⵍⵍⵓ
영어, 프랑스어Collo
알제리 북부의 도시. 지젤과 콩스탕틴에서 각각 동북쪽과 북쪽으로 60km, 스킥다에서 서북쪽으로 3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스킥다 만 서안의 항구도시로, 인구는 3만명이다. 콜로는 고대의 지명 출루에서 유래되었다. 바다 외에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방어에 유리한 지형 덕에 먼 옛날부터 도시로 발전하였고, 중세 시기에는 콩스탕틴의 외항으로 번영하였다. 1820년 전에는 프랑스의 조차지이기도 하였다. 다만 19세기 중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이후 동쪽의 스킥다가 대신 개발되었기에 역사에 비해 19세기 말 이전의 옛 건물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2. 역사
1756년 콩스탕틴의 아흐메드 베이가 세운 시디 알리 엘케비르 모스크 |
기원전 6세기경 페니키아 인들이 세운 거점 출루에서 유래되었다. 포에니 전쟁 후 누미디아에 속하였고, 기원전 106년 유구르타 전쟁 당시 보쿠스 1세에게 배신당한 유구르타가 이곳을 통해 로마로 압송되었다. 대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출루는 수도 키르타 (콩스탕틴)의 외항으로, 한때 누미디아 제2의 도시였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에 병합된 후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 콜로니아 (식민도시)로 승격되었고, 키르타-밀레우 (밀라)-루시카데 (스킥다)와 함께 누미디아 도시 연맹을 이루는 네 도시들 중 하나였다. 로마 시기 지명은 출리였고, 보라색 염료를 통한 염색과 목재 등으로 유명했다.
4세기 기독교화 후 주교구가 되었고, 411년 정통파와 도나투스파가 합동으로 거행한 카르타고 공의회 당시 출루에서는 정통파 주교 빅토리우스와 도나투스파 주교 피덴티우스가 동시에 참석하였다. 442년 협정을 통해 일대는 반달 왕국령이 되었다. 484년에는 티파사, 카르텐나 ( 테네스), 루수쿠룸 ( 델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출루의 정통파 주교 퀴드불테데스는 반달 국왕 후네릭에 의해 카르타고로 소환된 후 추방되었다. 이후 쇠퇴하던 도시는 6세기를 전후로 하여 전쟁 혹은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며 한동안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2.1. 중세
그러다 이슬람 정복 후 다시 정착되었고, 아랍식 발음인 엘콜로 불렸다. 쿠타마 베르베르인들에 이해 재건된 도시는 함단 왕조 시기 콩스탕틴의 외항으로 번영하였고, 제노바와 피사 상인들이 왕래하여 가죽 / 곡물 / 밀랍 등을 거래하였다. 한편 1279년 하프스 왕조의 내전에 개입했던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는 1281년 튀니스 정부에 반기를 든 콩스탕틴 총독 부그론 이븐 엘 와지르를 도와 하프스 조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였다. 1282년 6월 그와 아라곤 함대는 콩스탕틴의 외항 엘콜에 당도했는데, 이미 베자이아의 아미르가 부그론을 처형하고 반란을 진압한 상태였기에 우선 주둔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같은해 8월, 숨겨진 목적이던 시칠리아의 반앙주 반군이 그를 군주로 추대하자 팔레르모로 향하였다.2.2. 대프랑스 항쟁
프랑스에 의해 세워진 성당. 현재 문화원을 활용 중이다.
16세기 엘콜은 오스만 제국 산하 알제 총독령에 속하였고, 프랑스 상인들이 왕래하며 정착하거나 가게를 열 수 있었던 일종의 조차지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운영을 일임받은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콜로라 불리게 된 도시를 개발하여 1만의 장정이 상주할 정도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주변 카빌리 베르베르 부족들을 선동하여 1803년 그들의 반란으로 콩스탕틴의 베이 오스만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이에 1820년 콩스탕틴의 베이는 유럽계 거주민들을 축출하였고, 프랑스측 상관을 철폐하는 쇄국을 단행하였다. 1835년경 콜로는 셰이크 제구드, 메사우드 벤만수르, 셰리프 모하메드 벤압델라 등의 격렬한 저항 끝에 프랑스 군에 점령되었다. 수 차례 전투 끝에 인구는 5백으로 줄었고, 매우 빈곤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1846년 주민들은 '산중 술탄' 부 바게리체, 1847년에는 모하메드 벤압델라의 주도 하에 재차 보기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하지만 1848년 이번에는 아샤쉬 (아차체) 부족이 프랑스 군을 축출하고 콜로를 장악하였고, 따라서 프랑스 측은 콩스탕틴으로 향하기 위해 필리프빌 (스킥다)를 대신 이용해야 했다. 다만 결국 1852년 프랑스 군은 대규모 작전 끝에 부족군을 제압하였고, 1856년과 1858년의 반란은 가혹히 진압되었다. 1871년 셰이크 엘 모크라니의 반란을 마지막으로 40여년에 걸친 콜로 주민들의 반프랑스 봉기는 일단락되었다. 반란에 지친 프랑스 당국은 콜로 대신 스킥다를 개발하여 전자는 별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알제리 독립 전쟁기인 1955년 8월 20일에는 독립군이 콜로의 프랑스 군을 습격하여 지휘관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1962년 독립 당시 콜로의 인구는 7천이었고, 이후 개발을 통해 현재는 3만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