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어 تنس
베르베르어 ⵜⴻⵏⴻⵙ
영어, 프랑스어 Ténès
1. 개요
알제리 북부의 도시. 츨레프에서 북쪽으로 30km, 알제에서 서쪽으로 110km, 오랑에서 동북쪽으로 16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5만명이고, 츨레프 협곡의 주요 항구이다. 시가지는 와디 알랄라를 중심으로 동서 5km 가량 펼쳐져 있고, 항만 시설은 동부에 있다. 프랑스령 알제리 시절 해안에 지어진 격자무늬의 시가지와 그 남쪽 산 기슭의 절벽 위에 세워진 구시가지 모두 성벽으로 둘러져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낸다.
2. 역사
테네스 지방 박물관 (신도심 서북쪽)의 유적들 |
기원전 8세기 페니키아에 의해 와다 알랄라 하구에 도시가 세워졌다. 당시 지명은 카르테네스였는데, 페니키아어로 도시를 뜻하는 카르트와 베르베르어로 '야영지'란 의미인 테네스가 합쳐진 단어이다. 따라서 테네스는 튀니스와 같은 어원인 것이다. 카르테네스는 상아, 가죽, 삼나무와 함께 현지에서 생산되는 구리 등을 교역하는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 기원전 6세기경 일대는 카르타고령이 되었다가 포에니 전쟁 후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 왕국을 거쳐 로마 제국령이 되었고, 라틴식 지명인 카르텐나 혹은 카르텐나이로 명명되었다.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는 카르텐나에 퇴역병들을 정착시키고 식민도시, 즉 콜로니아로 지정하였다. 그후 도시는 로마화되었고, 마우레타이나의 주요 교역 도시 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한편 4세기 후반 카르텐나는 도나투스파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는데, 그러던 중 현지 주교 로가투스가 도나투스파를 변형시킨 새 종파를 창시하였다. 그는 372년 피르무스와 396년 길도의 연이은 반란으로 인한 혼란기에 반대파를 박해하며 세력 확장을 시돠였다. 하지만 로가투스파는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고, 후임 주교 비켄티우스 대에는 오직 두 주교만이 그에 속하였다. 카르텐나 역시 5세기 들어서는 정통파 주교가 선임되었고, 418년 주교 루스티쿠스는 카이사레아 ( 셰르셸)에서 도나투스파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도와 및 도나투스 파의 에메리투스와 신학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로마 시대 카르텐나는 지리가 프톨레마이오스가 바코이타라 기록한 인근 베르베르 부족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요새화되었다. 그외에 시내에는 포룸, 극장, 목욕탕, 도서관, 수도교 등이 있었다. 하지만 4세기 피르무스의 반란, 5세기 반달족의 습격 등을 거치며 시가지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484년에는 티파사와 함께 카르텐나의 주교가 반달 왕국의 후네리크에 의해 카르타고로 소환당한 후 추방되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재정복도 카르텐나의 부흥을 이룰 수 없었고, 7세기 말엽 우마이야 왕조가 일대를 정복했을 때에 일대에는 파괴된 성채 만이 남아있었다.
2.1. 중세
시디 부마자 모스크 내부
그후 한세기 이상 폐허로 남아있던 카르텐나는 9세기 초엽 이드리스 왕조의 군주 이드리스 2세 ( 하산 빈 알리의 고손자)가 사촌인 무함마드 빈 술라이만에게 수여한 술라이만 왕조에 속하였다. 828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네 아들들이 왕국을 상속받았는데, 그중 이브라힘은 츨레프 협곡의 수크 이브라힘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유배지 정도로 쓰이던 카르텐나에 안달루스 출신 이주민들을 정착시켜 도시를 재건하였고, 곧 수도로 삼았다. 알 바크리에 의하면 875-76년경에 세워진 중세 도시는 방어를 위해 기존 유적보다 1.5km 가량 남쪽에 위치한 절벽의 험지에 세워졌다. 1차 정착 후 안달루스 동남부의 무르시아와 마르베야 (엘비라) 일대에서도 이주민들이 왔으나 그들 사이에 역병이 퍼지는 바람에 주민 상당수가 떠나버렸다. 그후 츨레프 협곡 수크 이브라힘의 베르베르 인들이 대신 유입되어 공백을 메웠고, 당대 지리가 알 야쿠비는 도시를 타나스라 기록하였다.
안좋은 기후 조건에도 불구하고 타나스는 남쪽 산 너머에 펼쳐진 비옥한 농지 덕에 번영하였고, 그 곡물과 과일을 유통하고 수출하였다. 이브라힘 사후 무함마드, 이브라힘, 야흐야, 알리까지 5대에 걸쳐 한세기 가량 이어지던 샤리프계 왕조는 953년 지리 왕조에 의해 멸망하였다. 마지막 군주 알리는 마그라와 부족, 그의 두 아들 함자와 야흐야는 안달루스로 망명하였다.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자얀 왕조를 거쳐 15세기 타나스에는 스페인에서 축출된 무어인들이 정착하였다. 1438년 주민들은 자얀 조의 왕공을 셰이크로 추대하며 자립하였으나 반세기 후 스페인에 복속하였다. 그러던 1517년, 알제를 기반으로 한 오루츠 레이스가 도시를 습격하였고 몇년 후에는 오스만 제국령 알제 총독인 동생 하이르 앗 딘이 점령하였다. 알제 총독령 시기에 타나스에는 수비대가 배치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유럽에 대한 곡물 수출이 끊기며 쇠퇴하였다.
2.2. 근현대
19세기 후반 타네스 시가지
튀르크 지배에 저항하는 베르베르 반란에 수차례 위협을 받던 도시는 19세기 프랑스의 침공에 직면하였다. 1830년 알제가 함락된 후 일대를 지배하게 된 에미르 압델 카데르는 타나스를 다시 항구로 부활시키려 했지만, 1843년 도시는 프랑스 군에 전투 없이 항복하였다. 이후 프랑스식 발음인 테네스로 불리게 되었고, 프랑스의 츨레프 방면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다 1847년 프랑스는 내륙의 기존 도심 대신 해안의 로마 유적을 재활용한 신도심을 개발하였다. 19세기 중반 테네스는 츨레프의 수출항으로 번영하였다. 하지만 19세기 말엽 오랑-츨레프-알제리 철도가 개통하고 오랑과 알제로 무역이 옮겨가며 테네스는 점차 중요성을 잃고 쇠퇴하였다. 1962년 독립 후 테네스는 몇개의 호텔과 박물관, 등대를 지닌 작은 관광 도시로 남아있다.
3. 갤러리
항구 일대
신도심 위성사진
구도심 위성사진
구도심의 대표 유적인 엘 바흐르 성탑 | 19세기 테네스 지도의 신도심과 구도심 |
3.1. 신도심
3.2. 구도심
엘 바흐르 성탑
옛 성벽 유구 (부르즈 엘 굴라)
길거리의 로마 시대 주두
- [테네스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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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테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