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00:26:06

최은희(배우)

최은희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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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보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4년
이름 최은희
분야 배우
보관문화훈장(3등급)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우수국산영화상 여우주연상
( 1958년) ( 1959년) ( 1960년)
주증녀 최은희
(어느 여대생의 고백)
최은희
(동심초)
( 1959년) ( 1960년) ( 1961년)
최은희
(어느 여대생의 고백)
최은희
(동심초)
최은희
(이 생명 다하도록)
한국최우수영화상 여우주연상
( 1960년) ( 1961년) 제1회
( 1962년)
최은희
(동심초)[1]
최은희
(이 생명 다하도록)
최은희
( 상록수)
여우주연상
( 1961년) 제1회
( 1962년)
제2회
( 1963년)
최은희
(이 생명 다하도록)[2]
최은희
( 상록수)
도금봉
(새댁)
제3회
( 1964년)
제4회
( 1965년)
제5회
( 1966년)
황정순
( 혈맥)
최은희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최은희
(민며느리)
제4회
( 1965년)
제5회
( 1966년)
제6회
( 1967년)
최은희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최은희
(민며느리)
문정숙
(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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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崔銀姬
파일:external/image.munhwa.com/2011061701033630136005_b.jpg
본명 최경순(崔慶順)
출생 1926년 11월 20일
경기도 광주시
사망 2018년 4월 16일 (향년 91세)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
가족 배우자 신상옥, 자녀 1남 1녀[3]
종교 가톨릭 ( 세례명 : 소화 데레사)
데뷔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
파일:attachment/redmuffler.jpg
1964년 영화 빨간 마후라 포스터

1. 개요2. 활동3. 사망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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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반도의 여배우이자 영화감독. 1947년 데뷔하여 활동한 배우다.

2. 활동

파일:external/file.koreafilm.or.kr/tn_DSHT047850.jpg
1943년 극단 <아랑>의 연구생이 된 후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영화계에 데뷔, 연기력과 미모로 주목받는 신예로 떠오른다. 이 때 촬영기사 김학성과 만나서 동거했다.[4]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결별. 이 때 최은희는 서울에 있다가 심영 황철에게 1차로 납치된다.[5] 하지만 청천강 인근에서 탈출했는데, 이 때 ' 북한군에게 윤간당했다.'라는 괴소문이 돌게 된다. 문제는 이후 국군을 따라 위문공연을 하고 다녔는데, 이 과정에서 진짜로 한국군에 의해서 성폭행 당했다는 것이다. 윤간은 아니지만 머리에 총을 겨누고 성폭행했다니 빼도박도 못한다. 이는 최은희 본인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신상옥을 만났고,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를 계기로 신상옥 감독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김학성은 둘을 간통죄로 고소했으나, 법적으로 김학성과 최은희는 사실혼 관계였지 혼인신고는 하지 않은 동거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죄 판결이 나온다. 다만 지금 세대들 중에는 저때 무죄 판결이 나온 사실은 모르고, 간통죄를 지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최은희와 신상옥이 불륜을 저질렀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걸 알 수 있다(...).

자서전을 보면 당시 최은희는 김학성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결혼 생활중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입양을 하였다.[6] 신상옥은 이후 자녀를 보았기 때문에, 최은희가 불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50~60년대 영화계를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나눌 정도로 스타가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후배 김지미와 경쟁했는데, 흥미롭게도 ' 춘향전'을 비슷한 시기에 김지미(홍성기 감독)와 최은희(신상옥 감독)가 각자 버전으로 찍고 동시 개봉하면서 라이벌전을 벌이기도 했다.[7] 이 시절 그녀는 정말 다양한 연기를 선보였는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전통적 여인상에서 <지옥화>처럼 서구적인 글래머상까지 소화하면서 그녀는 초창기 한국영화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1965년에는 대한민국의 3번째 여성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며 총 3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이 때에 연출한 영화가 본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민며느리>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페미니즘 어젠다와 텍스트를 보여준 시대를 앞서간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민며느리>는 제20회 국제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그 이후 신상옥 감독이 중간에 배우 오수미[8]와 사귀게 되면서 이혼하였다. 1967년부터는 신상옥이 이사장으로 있던 학교였던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며 후진양성에 주력했지만 1978년 1월 14일에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었으며 동년 7월 19일에 신상옥 감독 역시 홍콩에서 납북되었다.

그 후 북한에서도 영화 활동을 이어 나가면서 1985년에는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1986년 3월 13일, 신상옥과 함께 오스트리아 에 있던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해 10년 넘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9년에 영구 귀국했다.

마릴린 먼로가 주한미군 위문 공연으로 내한했을 당시, 같이 동행했으며 사진도 남아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동갑이다.

3. 사망

2018년 4월 16일에 향년 91세로 사망했다. 사망 전 1년 동안은 계속 투병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뒤늦게야 전해졌다. 슬하에 친자녀는 없지만 입양한 자녀 2명(1남 1녀)이 있다.

4. 여담

당시 기준으로 꽤 동안이었는데, 35세에 춘향 역할을, 38세에 여고생 역할을 맡은적도 있고, 43세에 21세 여대생 역으로 나온 적도 있다. 40대 초반까지도 주연급 배우로서 군림한 것이다.[9][10] 동갑내기 탑여배우였던 주증녀가 주로 어머니 역할로 출연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로맨스 빠빠에서는 그녀의 로 분하기도 했다.


[1] 1960년까지는 우수국산영화상으로 수상 [2] 1961년에는 한국최우수영화상으로 수상 [3] 둘 다 남편 신상옥家 친척조카를 입양했다. 아들 신정균 씨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출연하면서 어머니의 실종사건 당시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하였다. 그외에 남편의 내연녀였던 오수미 소생의 1남 1녀도 양육했다. [4] 김학성은 최은희가 언니처럼 잘 따르던 선배 김연실의 남동생이었다.두 사람의 나이차이는 열 살 이상이 났고, 김학성에게는 전부인 소생의 자녀도 있었다. 다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고. [5] 전쟁 발발 직전에 지방에서 영화 촬영 중이었는데,서울에 있던 남편과 친정 식구들이 걱정되어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고 한다. [6] 신상옥의 친척 조카 둘을 입양했다고 한다. [7] 결과는 신상옥&최은희 페어의 승리로 끝났다. [8] 본명은 윤영희로 나중에 실종되는 윤영실의 언니다. 오수미 본인도 1992년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9] 이렇게 본인의 나이보다 훨씬 어린 배역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신상옥 감독이 출연료를 아끼려고 나이든 마누라를 부려먹는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10] 후세대의 속칭 트로이카 여배우들 중에 윤정희 이미숙을 제외하면 모두 30대 초중반 이전에 은퇴하거나 조연급으로 내려간 걸 고려하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