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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술

최용술
崔龍述 | Choi Yong-sool
파일:Choi_Yong-sool_portrait_888.jpg
일본명 요시다 아시오/타츠주츠[1]
吉田朝男
출생 1899/ 1904년[2] 7월 21일
충청북도 황간군 오곡면 광평리
(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광평리)
사망 1986년 10월 27일 (향년 81/87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무술가( 합기도[3])

1. 개요2. 상세3. 수련 스타일4. 여담5. 팩트 논란6. 동영상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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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암 최용술(德庵 崔龍述).

대한민국의 합기도 1대 도주. 한국에서 합기 관련 무술의 시조격 되는 인물이다.

2. 상세

본인 주장에 의하면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일본인 부부랑 일본으로 건너갔다. 양친과 알던 사이로 최용술을 이뻐해 데려갔다는 말도 있고 그냥 유괴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인 경력을 소개하는 매체마다 말들이 좀 다르게 나왔다. 건너간 후 적응을 잘 못하자 결국 주지스님[4]에게 맡겼다. 나중엔 주지스님의 친구였던 다케다 소가쿠가 데리고 갔다. 그 뒤 다케다 소가쿠 양자가 되었다는 소리도 있고 그냥 제자가 되었다는 소리도 있고 해서 자세한 부분이 글마다 좀 다르다.

이후 다케다 선생의 집안에서 최용술은 자랐고, 다케다 선생이 제자들과 입산할 때 같이 대동류 합기유술을 수련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갑론을박이 이어지는데, 자세한 건 후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최근엔 대동류를 배우긴 했다는 데까진 인정하는 분위기. 오늘날까지도 최용술의 행적은 여러 시각에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발굴되는 중이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에 한국으로 귀국했는데 도중에 짐을 도난당했고[5] 이후 대구에 정착했다고 한다. 풀빵을 만들어 팔며, 남자 아이들에게 '자신의 딸을 제압하면 풀빵을 공짜로 주겠다.'며 호객했다고도 한다. 진짜로 덤벼드는 남자 아이도 있었지만 역으로 그의 딸에게 혼쭐 났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길거리에서 힘 꽤나 쓰는 양조장에 쌀포대를 들고 나르던 장정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키도 작은 최용술이 그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광경을 그의 첫번째 제자이자 당시 양조장 집 사장 아들이던 서복섭이 목격했다. 회고에선 한눈에 저것이 유술인 것은 알았는데, 형(型)이 특이해서 놀랐다고 한다. 유도 유단자였던 서복섭은 최용술의 진가를 바로 알아보고,[6] 최용술 도주는 서복섭의 제안으로 양조장의 2층에서 무술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합기도의 시초가 되었다.

최용술은 자신의 무술을 야와라(柔) 혹은 주지스라고 했다는데 가르칠 때는 야와라, 혹은 합기유권술이라 칭했다. 가끔 대동류라고도 했다고 한다. 야와라(柔)는 유술이라는 뜻이고, 유권술은 서복섭이 제안한 것으로 '유술기에 권술까지 아우르는 무술임을 천명하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합기 유술의 실력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던 모양. 심지어 본토인 일본 대동류 쪽에서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좀 심하게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최용술의 성격에 대해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다는둥 깐깐했다는둥 글마다 좀 다른 부분이 있지만, 확실한건 최용술은 초기 제자들에게도 수련비에 따라 기술을 철저히 차별하며 가르쳤는데, 쉽게 말해 무술로 돈벌이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예 이해 못할건 아닌게, 당시엔 최용술도 돈이 별로 없는 처지긴 했다. 1948년에 양조장 사건이 있은 후 8년이 지난 1956년 들어서야 겨우 자기 집과 도장을 마련했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도 그랬다면..

그는 제자에 따라 그냥 유술 합기가 들어간 유술의 차이를 두었는데, 유술만 가르칠 제자에게는 합기 올리기를 위한 단전호흡을 왜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을 정도였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이 술기는 쌀 몇 가마짜리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늘 강조하여, 제자들이 수전노라고 비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도장 안에 기다란 커튼을 설치하고 큰 돈을 지불한 특별 제자에게만 특별한 술기를 가르쳤음은 초기 제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덕분에 당시 돈이 궁했던 한국 합기도의 원로 중 한 명인 지한재는 훗날 최용술한테 맺힌 것이 많은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이런 최용술의 방식 덕분에, 오늘날 한국 합기도는 지한재처럼 돈을 많이 내지 못한 제자들이 최용술에게 배운 것을 대충 더듬어서 실전된 무술을 새로 복원하는 수준으로 해체시키고 붙이고 재창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의 대동류와는 완전히 다른 짬뽕 무술이 되어버렸다. 다만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동류 특유의 유사과학스러운 특징은 어느 정도 희석되고 좀 더 합리적인 호신술로 바뀌면서 의도치 않게 한국 무술로 정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1960년 들어선 3월 정식으로 '대한합기술무도회(협회)'를 설립했고, 1963년 9월 '대한기도회'를 창립하고 제1대 총재로 취임, 1968년에는 '대한무도회 전국합기도통합 제1회 전국시범대회'에 나가 시범을 보이는 한편, 추대로 "대한합기도"라는 명칭의 도주로 취임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국에서 '합기도'라는 명칭을 공식 사용하게 되었다.[7]

3. 수련 스타일

딱히 정해진 술기의 체계나 교육과정이 없이 가르쳤다. 용술관 김윤상 총재도 1970년대 스승을 처음 만나 대구에서 몇 가지 술기를 한꺼번에 배운 후, 금산에 돌아와 수련하고 익힌 다음, 다시 대구에서 최용술의 재가를 받고 진도를 나가는 식으로 수련을 받았다. 원래 최용술 도주는 가장 기본적인 술기들을 가르쳐 주면 이후에는 술기의 형태를 자주 바꾸어 보여주었고, 어디가 혹은 무엇이 합기임을 쉽게 알려주지 않고 시간을 들여 깨닫도록 유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이유 때문에 다른 합기도 유파의 술기가 형태나 과정에 많은 변화가 가해졌다. 한풀이나 용술관 또한 술기 과정을 재정리하였다.

호흡을 특히 강조했는데, 모든 술기는 히이-후우(하나, 둘)의 단합에 끝남과 그에 맞는 호흡을 강조하였다. 그 때문인지 담배를 피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최용술 본인은 후계자이자 아들인 2대 도주 최복열이 사망한 후, 담배를 자주 피웠다고 한다.

초기엔 낙법은 가르치지 않았으나[8] 낙법이 없다 보니 수련생들이 다치는 경우가 속출하여, 당시 유도를 배웠던 초대 제자 서복섭의 도움으로 유도 방식의 낙법을 도입했다고 한다. 덕분에 최용술 도주에게서 시작된 한국의 합기 계열 무술들의 낙법은 아이키도처럼 구르면서 상대와의 거리를 만드는 방식이 아닌, 일반적인 유도식 낙법(落法) 형태를 띠게 된다. 다만 최용술 선생의 직계 제자인 김정윤 선생의 한풀 무술에서는 유도식 낙법이 아닌 아이키도와 비슷한 낙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낙법이라 하지 않고 구르기라고 말한다.

최용술의 기술이 현재 아이키도나 대동류를 생각하기 쉬운데, 손으로 하는 타격기, 발로 하는 차기 및 막대를 휘두르는 법 등 다양했다. 제자에 맞게 같은 원리에서 파생된 여러 형태의 기술을 가르쳤다는 말도 있다.

원래 최용술 도주는 단조로운 발차기만 가르쳤다.[9] 제자들이 발차기를 하면 어디서 발을 놀리냐며 거부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술기를 일본어 그대로 가르치고 사투리도 섞다보니, 명칭이 난잡해져 이후 제자들이 다시 정리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다만 전부 통일하지는 못했는데, 4개조의 기술의 명칭만 해도 합기도쪽에서는 아훈넣기라 부르고, 다른 단체에서는 작은 칼넣기라 부르고 있다.

4. 여담

  • 한글을 거의 모르던 문맹이었으며, 그 외에도 전반적으로 무식한 편이었다고 한다.
  • 키가 150cm대로 추정되는 단신이었는데, 최용술의 딸 최복선 여사에 의하면 다케다 소가쿠의 키가 아버지보다도 더 작았다고 한다.
  • 언론과의 인터뷰 때 다케다 소가쿠의 성씨를 다케다(竹田)라 적은 적이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다케다 소가쿠는 19세기 말 농민 집안이던 자신의 성(竹田)을 유명 다이묘였던 다케다(武田)로 바꿨다는 의혹이 존재한다.
  • 본인 말에 따르면 다케다 소가쿠로부터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혹독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 부엉이같이 생긴 다케다 선생이 너무 보기 싫어서 잠을 잘 때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숱하게 느꼈다.”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실제 다케다 소가쿠는 느닷없이 방문하여 최용술 선생 가족이 보는 앞에서 최용술을 다짜고짜 두들겨 패는 등 그야말로 천하의 망나니였다고 한다. 문제는 최용술 선생 역시 괴팍한 성격이 대물림되었는지, 김정윤 선생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김정윤을 때려 피가 낭자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근데 지금은 고인이 된 김윤상 말에 따르면, "최용술 선생님이 돌아가기 직전에 병석에서 다케다 선생을 보고 싶다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학대받으셨는데 그분이 보고 싶으십니까?' 하니 선생님 왈, '그분만 보고 싶다.'고 하십디다."라고 하니 애증 관계였던 모양.
  • 최용술에 따르면 다케다 소카쿠는 몇 십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전쟁터에 징병되었고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10] 다케다는 조선인이 전쟁에 참전할 이유가 없다며 멀쩡한 최용술에게 치질 수술을 받게 했고 최용술은 징병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다케다 선생은 무술을 가르치면서 돈을 벌었고 번 돈을 유흥에 탕진하며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돈을 많이 내면 단증 또는 허가 등을 내어주었던 모양인데, 최용술 선생도 이를 따라했는지 단증 및 면허를 남발하였고, 결과적으로 다 배우지도 못한 제자와 단체가 우후죽순 생기게 되었다.

5. 팩트 논란

최용술이 1986년 사망한 후, 지금까지도 그의 행적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요는 양자든 수제자든 뭐든 다케다 소가쿠랑 특별한 관계였느냐, 대동류 합기유술을 제대로 배운게 맞느냐 2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인데, 이에 대해선 후술되어있듯 상당히 방대하고 때때론 엇갈리는 진술과 자료들이 상존한다.

일단 최용술 본인 말을 들어보면 매체마다 본인의 이력에 대해 좀 오락가락했다. 관련 블로그 칼럼.

최용술 도주의 딸 최복선 여사가 다케다 소가쿠에 관해 언급한 적도 있다. 1998년 한 인터뷰에 의하면, 본인도 일본 홋카이도에 살던 당시 실제 최용술 집에 주기적으로 머물다 가는 다케다 선생을 보았으며, 오히려 이땐 다케다만 오면 좌불안석인 부모가 어린 마음에 잘 이해가 안되 다케다 선생을 미워했다고 한다. 사망 2달 전에도 홋카이도에 있던 아버지 집에 머무르다 갔는데, 그로부터 2달 후 소카쿠가 객사했다는 부고장이 집에 도착해서[15] 최 여사가 문맹인 아버지 최용술에게 직접 알렸다고 한다.

최용술과 장인목[16] 모두에게 배운 바 있는 박병관은 최용술이 자신에겐 대동류를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기에 자신이 보기엔 대동류를 배운 것이 아닌 것 같다며, 스승이 까막눈이라 역사왜곡을 하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휘둘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히려 최용술의 스승은 '스님'이었다는 말도 했는데, 이게 다케다한테 소개해줬다는 주지 스님을 말하는건지는 알 수 없다.

2018년 10월 15일 무예신문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수미노 사토시(住野聡) 세계평화무도연합 사무총장이 대동류 합기유술 도쿄본부에서 직접 다케다 소카쿠가 작성한 영명록에서[17] 최용술이 수련한 기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는데, 20일 수련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고 한다. 아래는 관련 사진이다.
파일:1539694005315.jpg
파일:20181016_225946.jpg

파일:external/www.martialartstoronto.ca/SenseiKimImage3-219x300.jpg
왼쪽은 리처드 킴, 오른쪽은 요시다 코타로.

한편, 미국의 저명한 무술가 리처드 킴[18][19]이 1984년 미국 하와이의 합기도인 글렌(Glenn)의 최용술이 정말 대동류 합기유술을 배운 것이 맞는지 묻는 질문이 담겼다고 하는 편지에서, 최용술이 일본의 우익 조직 흑룡회의 멤버이자, 다케다 소카쿠(武田惣角)로부터 스승을 대신해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인 교수대리(敎授代理)를 받은 요시다 코타로(吉田幸太郞)의 뛰어난 조선인 제자였으며(=자기 선배), 그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가 자신이 배운 무술에 합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증언한다. 또 최용술 도주의 일본 이름이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였다고 증명한다. 이 때문에 일본을 비롯한 많은 위키백과에서는 최용술을 요시다 코타로 쪽의 제자로 분류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다케다 소카쿠한테 배사하되 실질적으론 요시다 코타로한테 배운 것 아니냐는 추측도 하는데[20], 해당 주장은 위 영명록을 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영명록을 보면 최용술은 다케다 소카쿠를 왼쪽 2번째 글 기준 '다케다 대선생(武田大先生)'이라 칭하고 있는데오른쪽 1번째는 선생도 보이긴 하다 번역가가 필요하다, 대선생은 (수련자 본인의) 선생을 가르친 선생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영명록을 보면 최용술이 다케다 소카쿠보다는 요시다 코타로의 제자였음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것.

한편, 최용술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이미 어린 시절 다케다에 의해 거두어져 아버지로 여기며 자랐으므로, 굳이 형식적으로 스승-제자 관계로 입적할 사항은 아니었다고도 보여지는데, 한편으론 상기되어있듯 영명록에 수련 기록이 적혀는 있다.

참고로 흑룡회란 일본 제국 시대 국가주의 우익조직으로, 일제가 헤이롱장(흑룡강黑龙江) 일대를 차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흑룡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적극 앞장섰고, 일진회를 배후에서 조종하였으며, 이후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조선인 학살을 주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연유로 일본 무술계는 최용술 도주가 반일감정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해방된 고국에서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것 아니냐고 추정하기도 한다.

다음은 리처드 킴의 답신 전문.
dated November 26, 1984:

The founder of Hapkido, Mr. Choi -- Japanese name Yoshida, is not related to Yoshida Kotaro, Samurai extraordinary.

Mr. Choi was a student of Yoshida Kotaro. In fact he was an excellent student. You must realise that before Japan surrendered in August 15, 1945, all Koreans had Japanese citizenship and names.

Mr. Choi returned to Korea and taught Daito Ryu Aiki Jujutsu. He named it Hapkido which in Japanese is Aikido. Since his time Hapkido has become modified with a distinct Korean flavour. It is an excellent art.

I would that the thrust and direction of Hapkido where it is different from what originally Mr. Choi had taught is in a number of sophisticated kicks which is unique to the Korean style of fighting. Probably, according to some, it may have improved the art for modern day consumption. That would be a matter of debate.

You are learning a good art. Stay with it and practice until perfection.

Sincerely,

Richard Kim, Hanshi [21]

합기도의 창시자, 최용술 -- 일본명 요시다, 는 비범한 사무라이인 요시다 코타로의 혈연은 아닙니다.[22] 최용술은 그의 제자였습니다. 실제 그는 우수한 학생이였지요. 일본이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하기 전에, 모든 한국인들은 일본의 시민권과 일본식 이름이 있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최용술은 귀국 후 대동류 합기유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일본어로는 아이키도라 불리는 합기도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합기도는 한국인 입맛에 맞게 독특하게 수정됩니다. 합기도는 우수한 무술입니다. 첨언하자면, 합기도에 한국의 무술 스타일인 수준 높은 발차기가 도입되면서 원래 최용술이 가르치고 추구하던 것과 달라진 듯합니다. 아마, 일부의 주장대로 합기도는 현대인의 기호(선호)에 따른 무술로서 개량된 듯합니다.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요.

당신은 좋은 무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완벽해질 때까지 수련에 매진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리처드 킴 범사

한편, 최용술 측은 아이키도의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관련해서도 아이키도 측과 상반되는 진술을 한 적이 있는데, 자세한건 해당 문서로. 여담으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혼자가 아니라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및 요시다(吉田)가의 부자(父子) 등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수련했고 관련 증언들도 존재한다.

아이키도 측에서 최용술과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친분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는데, 1988년 Aikido journal 77호의 우에시바 기쇼마루(植芝吉祥丸) 아이키도 2대 도주 인터뷰를 보면, 자신의 아버지이자 아이키도의 1대 도주인 우에시바 모리헤이 개조가 최용술 도주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97년 10월, 한풀의 신상득 기자 또한 인터뷰를 통해 같은 내용의 답변을 들었다. 신상득 기자에게 기쇼마루는 "최씨 성을 가진 조선인이 다케다의 제자로서 열심히 수련하는 것을 보았다고 들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추정된다는 내용도 덧붙인다.
Q: On another subject, it is true that a Korean named "Choi" who founded "Hapkido" studied Aikido or Daito-ryu?

A: I don't know what art it was but I understand that there was a young Korean of about 17 or 18 who participated in a seminar of Sokaku Takeda Sensei held in Asahikawa City in Hokkaido. It seems that he studied the art together with my father and would refer to him as his "senior".

Q: If that's the case the art must have been Daito-ryu.

A: I've heard that this man who studied Daito-ryu had some contact with my father after that. Then he returned to Korea and began teaching Daito-ryu on a modest scale. The art gradually became popular and many Koreans trained with him. Since Aikido became popular in Japan he called his art Hapkido[written in Korean with the same characters as Aikido], Then the art split into many schools before anyone realized it. This is what my father told me. I once received a letter from this teacher after my father's death.

질: 다른 질문입니다만, 합기도를 창시한 한국의 '최'라는 인물이 아이키도 혹은 대동류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답: 어떤 무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에서 다케다 소카쿠 선생의 강습회에 17,8세의 한국인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23] 그 사람은 아버지를 "선배"라 부르며, 같이 운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질: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대동류겠군요.

답: 그 후에도 그 대동류 수련생과 아버지와 약간의 교류가 있었다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도 작은 규모로나마 대동류를 계속 지도하였으며, 인기몰이를 하며 다수의 한국인들이 그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아이키도가 일본에서 유명세를 타자, 그는 이름을 [아이키도를 한글로 쓴] 합기도(合氣道)라고 지었는데, 이 후 많은 유파로 분열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그 사람에게서 편지가 온 적도 있습니다.

6. 동영상 자료


최용술 도주의 지도.[24]


최용술 도주의 인터뷰. 여기서 '합기술의 기틀을 잡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 도장마다 기술이 다 다르고 제자들은 몇 달만 배우고 모두 독립해서 도장 차린다.'라고 발언했다.


[1] 아사오가 아니라 타츠주츠라고 불렸다는 기록도 있기에 이렇게 작성했다. 타츠주츠란 '용龍'의 훈독 '타츠'와 술述의 음독 '주츠'로 최용술의 이름을 뜻한다. [2] 주민등록상으론 1904년이란 설이 있다. [3] 다만 항목에도 있듯 오늘날 한국의 합기도는 유파가 갈라져 최용술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진 형태긴 하다. [4] 야마모토 히데오(山本英雄)의 아버지인 주지스님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있다. [5] 돈, 목록과 오의 등 두루마리, 두 자루 등 병장기가 있었다 한다. 딸 최복선 여사 말에 의하면 22개 박스가 있었는데 이 중 1박스를 나르겠다고 도와주던 청년이 있었는데 가고 보니 1박스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전재산이 다 털린 수준은 아닌지,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도 황간에도 가고 어머니 외가에도 갔다가 여차저차해 대구에 정착했다고 한다. [6] 이 당시 일화로 서복섭은 그의 유도기술을 이용하여 최 도주를 제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제압당했다고 한다. 30대 초반의 자신이 한참 나이가 많던 최용술에게 꼼짝도 못하자 제대로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후일 그는 용술관의 유래를 듣고, "최옹의 기술이 아직도 전수되느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는 후문도 있다. [7] 전후 맥락을 보면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끌던 아이키도(합기도)를 그대로 따왔을 가능성도 있지만(일본에서 재단법인 아이키카이(합기회)는 1948년 설립되었다), 합기라는 단어 자체는 최용술이 자주 사용하였고, 합기도란 말 자체를 일본 아이키도(합기도)보다 먼저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합기라는 말 자체는 다케다 소가쿠 생전부터 쓰던거니(다만 우에시바 쪽에서 다케다에게 이 개념을 합기란 단어로 하자고 건의했다고 알려져있긴 하다) 이전부터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어찌됐든 공식적으론 아이키카이가 먼저 설립된 건 맞는다. 그래서인지 일본 아이키도(合氣道) 협회에선 한국에 합기도 명칭을 쓰지 말라고 은근히 요구하기도 하는 모양인데(이는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아이키도를 창시하면서 기존의 기술적 '합기'라는 용어를 아이키도에선 철학적인 개념으로 치환하고, 기술적인 부분은 '호흡력'이란 용어로 대체하려 한 맥락 때문도 있어보인다.), 최용술 제자인 김윤상은 2010년대 인터뷰에서 덕암류 합기유술은 대동류 합기유술에서 파생된건데 (배다른 형제격인) 아이키도랑 상관없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8] 다케다 토키무네 종가의 증언에도 나오지만, 원래 대동류에서는 한국의 합기도나 초기의 일본의 아이키도와는 달리 낙법이 없었다. 검을 맞대고 대결하는 무사의 세계에서 낙법으로 넘어졌다가 일어선 뒤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9] 다만 대동류는 윗수로 갈수록 발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의견도 있다. 4분 36초부터 보면, 발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나온다. [10] 다만 면허개전을 받은 히사 타쿠마나 아이키도를 창시한 우에시바 모리헤이 등을 봐도 알 수 있듯 제자들이 모두 죽은건 아니었다. 현재 일본 대동류의 경우 말년에 얻은 아들이 이은 케이스. [11] 최용술 도주의 무술을 최대한 원형대로 수련한다지만, 최 도주부터가 체계와 교육과정이 제대로 없었던 만큼, 술기를 배우는 순서는 다르다. 특히 유급자 과정에서는 합기를 위한 몸을 만드는 과정에 주안을 둔다고 한다. 용술관에선 합기도와 구별하기 위해 '덕암류 합기유술'이라고도 부른다. [12] 최용술 집에서 거주하다시피 하며 글자 그대로 옛날 스승과 제자 방식처럼 배웠다고 한다. [13] 최용술의 진가를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다. 후일 정치에 입문한 부친 서동진의 경호 담당으로 최용술 도주를 소개하며, 합기도가 정치인들이나 대중에게 알려지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사이클 선수 서준용 친할아버지기도 하다. [14] 10대 시절인 1949년에 최용술 도주를 만나 7년 조금 넘게 배우고 독립해 1957년 서울 종로에 성무관이란 도장을 차렸다. 기도회 당시 월장낙법 등 현란하고 아크로바틱한 낙법과 발차기를 도입하고서는 신무 합기도 때는 다시 최용술과 유사한 술기 형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 손 술기만 가르친다는 것도 특징. 최용술 도주에게는 야와라를 배웠지, 합기를 배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돈 때문에 차별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스승에게 맺힌 것이 많은 듯. 2000년대 방송 고수를 찾아서에 잘 나와있다. [15] 참고로 다케다 소카쿠의 마지막, 즉 임종까지 함께 했던 인물은 동행했던 제자인 야마모토 카쿠요시와 가족들이라고 한다. [16] 최용술 외에 한국에서 대동류를 가르친 또다른 인물로, 마츠다 토시미에게 홋카이도에서 대동류를 배운 뒤, 해방 후 대구에 국무관을 설립하여 대동류를 가르쳤다. 둘이 만난 적도 있다고. 다만 대동류의 적극적인 전파보다는 접골원을 운영하는게 주 생계 유지였기 때문에 장인목은 지압과 같은 건강유지에 집중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17] 생전에 다케다 소카쿠는 모든 수업생의 이름을 영명록에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다만 스탠리 프래닌이 소카쿠의 장남 무네미츠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영명록의 일부가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18] 하와이에서 활동한 무술가로 일본의 일부 사람들은 리처드 킴이 오키나와 사람이라며, 그의 성을 金武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데, 정말로 金武였으면, 자신을 소개한 영문 이름에 Kim이라는 발음을 사용했겠는가? 참고로 金이 단독으로 발음될 경우, 일본은 こん(kon)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Jin이라고 발음한다. Kim을 사용하는 지역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19] 리처드 김(1917~2001)은 하와이 태생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미해병대에서 복무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요시다 코타로 밑에서 대동류를 수련했다. 어릴 때부터 유도 가라데를 수련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오키나와 무기술을 수련했다. 청장년기와 노년기는 주로 북미와 유럽에서 활동하였다. [20] 중국 무술계의 예를 들면, 스승 집에서 잡일을 하고 대신 사형에게 무술을 배우는 경우도 많은데, 이렇게 배운 사람들도 스승에게서 배웠다 하지 사형에게서 배웠다고 하진 않는다는 것. [21] Hanshi (範士)는 무술에서 8단 이상의 유단자의 호칭을 뜻한다. [22] related는 혈연, 관련되었다는 수동태인데, 이를 빌미로 일본에서 최용술이 요시다 아사오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 당연하지만, 후술할 '해방 전까지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름이 있었다.'는 문장 때문에라도, 최 옹의 일본 이름인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와 요시다 코타로(吉田幸太郎)는 '혈연(친족) 관계가 아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애초에 바로 뒤에 제자라는 표현을 썼으니 관계가 없다는 해석은 불가능하다. [23] 최용술 도주와 아이키도 창시자인 모리헤이가 처음 조우한 것은 1915년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서였고, 최용술이 1913~1917년에 스승 다케다와 함께 일본 전역을 순회하던 중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24] 중간에 대동류의 칠리 끌기(七里引技)도 나온다. 당연히 아이키도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