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배우 차승원의 생애를 다룬 문서.2. 패션모델로서의 활동과 명성
'후배양성은 1989년부터 했는데 첫 제자가 차승원이었다. 차승원씨는 내가 아카데미에서 근무할 때 친구와 같이 왔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교복을 입고 왔다. 너무 멋있었다. 당시 차승원씨만 보였다. 처음에는 자긴 그런 것(모델) 모른다, 안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너는 타고난 모델이니깐 일주일동안 고민해보고 와라했다. 그런데 3일만에 왔다. 1년은 고생하고, 그 다음부터 승승장구하며 지금의 위치까지 올랐다.'
-고은경 대표 인터뷰 중-
-고은경 대표 인터뷰 중-
'키가 3~5cm 이상 다른 모델들보다 컸고, 현대적인 마스크에 잘생겼어요. 눈에 확 띄었죠.'
-시간은 달리는 tv에 디자이너 장광효 인터뷰 중-
-시간은 달리는 tv에 디자이너 장광효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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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말 패션모델로 데뷔하여, 현재는 배우로서 카리스마 있는 연기, 진지하고 심각한 정극 연기부터 무서운 악역, 능청스럽게 망가지는 개그 캐릭터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넒은 연기 스펙트럼을 지닌 몇 안되는 배우다.
3. 배우로서의 길
3.1. 1990년대 후반
최초로 모델에서 배우로 전향한 케이스며, 모델 출신 남자 배우들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 중 하나였다. 사족이지만, 이천희의 모델 데뷔 날이 공교롭게도 차승원의 모델 은퇴식 하는 날이었다고 SBS의 한 토크쇼에서 나왔을 때 말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이야 배정남 같은 잘 나가는 모델도 있고, 김우빈이나 이종석처럼 모델 출신 배우들도 많지만, 당시는 남자가 모델을 한다고 하면 완전 정신병자 내지 게이 취급받을 정도로 인식이 안 좋은 시절이었기에,[3] 모델계 입성 당시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차승원은 담임한테서 빠따까지 맞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심지어 키가 안 닿으니 점프해서 뺨을 날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요즘 단대 부고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선생은 그때 차승원 때문에 골치 아팠지만 그래도 그때 일에 대해서는 차승원에게 미안해한다고 한다.모델 생활 이후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등에 출연하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가 연기생활을 시작한 것은 90년대 말부터였다. 1997년 영화 《홀리데이 인 서울》의 단역에 출현해 세기말적 암울한 분위기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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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변지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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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엉뚱하게도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는 연기가 아닌 다른 분야였으니 그게 바로 토크쇼였다. 1998년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에 보조MC로 기용되기 시작하면서 김혜수의 플러스유까지 '''계속해서 연속해서 대박이 터졌던 것. 여기서 차승원은 특유의 입담으로 대중들의 뇌리에 본인의 이름 석 자를 확실히 각인시켰다.[4] 토크쇼의 맹활약 덕분에 연기자로서도 지위가 상승,'98년 후반기부터 99년까지 각종 TV 드라마, 시트콤 등지에서 주연으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영화 쪽에서도 99년 이성재, 김희선 주연의 판타지멜로 <자귀모>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는 조연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중의 인식은 그냥 얼굴만 잘생긴 예능인 + TV배우 정도에 불과. 인기를 얻었지만 필모그래피 자체도 얼굴만 강조하는 뻔하디 뻔한 TV 멜로드라마였을 뿐이었다. TV 쪽보다 까다로운 영화계에서도 이런 인식은 마찬가지였던 상황. 이 당시 차승원에 대해 발연기 운운하는 얘기[5]도 있었으나, 엄밀히 말해 그냥 99년 후반기 이전의 차승원은 연기력 자체를 보여줄 무대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뭐 여기까지라면 그냥 잘생기고 예능감 있는 TV 연기자 내지 방송인 정도로 커리어가 흘러갔을 터인데 1999년 연말 개봉한 송능한 감독의 《 세기말》에서 평가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에서 차승원이 자신에게 얼굴만 있는 게 아니라 연기력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던 것. 당시 전문적인 평자들이 이 영화를 논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언급한 부분이 "차승원에게 저런 연기력이 있었는 줄 몰랐다"는 얘기다. 덕분에 영화계에서 차승원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6] 단순한 미남배우가 아니라 흥행력과 연기력을 갖춘 특급 유망주로 인정받게 된 것. 이렇게 되어 이듬해인 2000년 작품인 《신혼여행》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게 되었고, 같은 해 연말 개봉한 당대 최고의 블록버스터 《 리베라 메》에서도 당시에 최고 톱스타였던 최민수, 유지태와 동급으로 지위가 격상했다. 특히 《리베라 메》의 경우, 대중들에게 배우로서 차승원을 처음 각인시킨 첫 작품이다. 《 세기말》은 흥행에서 폭망했던 터라 대중들에게 차승원의 연기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7]
어쨌든 이런 차승원의 경우는 매우 드문 케이스다. 모델출신으로 연기자나 얼굴로 주목받은 배우들은 부지기수지만, 차승원처럼 데뷔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연기력까지 인정 받은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3.2. 제 1의 전성기: 2000년대 초반
이후로는 충무로 특급 흥행카드가 되었다. 2003년 보디가드로 외도한 것을 제외하면, 2000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근 십 년 동안 이런저런 흥행작들의 타이틀롤로 출연하였다. 특히 2001년부터 2004년까지가 차승원의 제1의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로, 강우석 감독이 운영하는 '시네마 서비스'에서 제작한 《 신라의 달밤》, 《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 선생 김봉두》, 《 귀신이 산다》등의 코미디 영화가 연속 대박 행진을 기록하자 믿고보는 배우 라는 수식어를 얻게 된다. 또한,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약간 어딘가 어쩌면 매우 부족할지도 모르는 캐릭터에서 코미디 연기를 하자 잘생긴 바보 형, 오빠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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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선생 김봉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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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귀신이 산다》 속 우는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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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장과 군수》 |
이후 2005년 《 혈의 누》에 출연하며 코미디 연기 편향에서 벗어나 필모그래피가 다양해지고 혈의 누는 연기력과 작품성으로 인정받고 흥행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다만 문제가 없진 않아 있었는데, 이 당시 필모그래피가 코미디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 데뷔 초창기 필모는 코미디가 아닌 정극 연기였고 2004년 이후로 코미디 편향에서 벗어나 다양한 연기를 시도했지만, 이 당시 커리어 탓에 코미디 전문 배우라는 선입견을 벗어나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 신라의 달밤》 감독이었던 김상진이 당시에 전성기였고, 작품 내외적으로 차승원과의 가장 호흡이 좋았기 때문에 필모그래피가 자연스럽게 코미디 영화로 흘러갔던 것으로 보인다.
3.3. 2000년대 중반~지금까지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마땅한 흥행작이나 대표작이 별로 없다는 게 다소 아쉬운 편이다. 폭망까지는 절대 아니고 아직도 충분히 많은 수요가 있는 배우이며, 현재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지만, 본인도 2000년대 중반 이후 영화 커리어에 다소 위기감을 느꼈는지 2009년부터 꾸준히 TV드라마 작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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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홀》의 조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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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전쟁의 여신》의 손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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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사랑》의 독고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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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포위됐다》의 서판석 |
2017년 드라마 화유기 출연 이후로는 영화에서만 4편[8]을 작업했으나 2021년 김수현과 공동주연을 맡은 드라마 '어느 날'에서 신중한 역으로 오랜만에 드라마 복귀를 알렸으며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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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의 최한수 |
드라마에서는 아테나:전쟁의 여신 같은 평작·범작도 있고 화정 같은 망작도 있긴 하다. 드라마 쪽으로는 약간 부침이 있긴 해도 호성적[9]을 어느 정도 거뒀다.
반면, 영화 쪽으로는 2000년대 후반부터 본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들 중에 평가나 흥행 어느 한쪽이라도 좋은 성적을 거둔 작품이 없다시피 하다. 사실 눈빛, 억양, 표정, 액션, 애드립, 사소한 행동 등등 하나하나 아주 완벽한 연기력을 골고루 갖춘 차승원이 코믹 연기하나로 대박을 터트리자 오로지 흥행에 눈이 먼 제작자들이 계속 코미디로 차승원의 재능을 낭비해서 그렇다. 차승원은 장르 관계없이 연기력이 매우 출중한데 흥행파워가 꺽여 매우 아쉬울 따름이다. 예를 들어 2006년 국경의 남쪽은 30만명도 동원하지 못하며 차승원의 네임밸류에 큰 타격을 입힌 망작이 되었고, 이후 장진 감독과 여러 편을 함께하면서 2005년의 박수칠 때 떠나라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아들과 하이힐은 실패. 하이힐 같은 경우, 개봉 당시 아직은 트랜스젠더의 대한 정체성을 다룬 소재들이 조금은 거부감이 들 뿐더러 젠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그닥 좋지 않을 때 개봉했기에 흥행에 득이 되지는 못했으나, 지금 개봉하면 호응이 좋다는 평과 '차승원의 액션연기와 눈빛연기가 소름돋는다는 평'이 있다.
2016년에는 강우석 감독과 재회하여 고산자, 대동여지도로 컴백했지만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실패했다.[10] 다만, 2000년대 후반부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포화속으로, 독전 등 빌런으로 나오는 영화들은 흥행했던 편이었다. 이중 독전에서 차승원 특유의 목소리로 인한 연기 때문에 차승원 성대모사가 화제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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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군》의 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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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란》의 선조 |
독전과 낙원의 밤 이후로 진중하고 속 모르는 캐릭터를 맡아 '본업'이라고 불리던 코믹적인 모습을 많이 덜어냈고, 이후 작품들에서 진지한 캐릭터를 맡아 열연하다가 폭군과 전,란에서 비로소 차승원만의 새로운 캐릭터 세계를 구축해 연기 인생의 새로운 막이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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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능 《삼시세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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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능 《스페인 하숙》 |
[1]
현재는 배우로 전향하며
YG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
[2]
김우빈,
이수혁,
한혜진,
홍종현 등이 있다.
[3]
당시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게이와 같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취급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썩 좋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홍석천 같은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그래서 희화화되는 개그 소재로라도 편하게 쓰일 수 있지만, 당시엔 게이가 정신병자와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였다.
[4]
지금이야 김혜수의 진행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김혜수의 플러스유 초창기에는 토크쇼 진행에 미숙하여 전임자였던 이승연과 비교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보조MC로 들어온 차승원이 이를 잘 메워줬기 때문에 PC통신 게시판에서는 '김혜수가 아니라 차승원의 플러스유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니냐'는 반응까지 있었다.
[5]
이런 반응은 1999년에 방영했던 MBC 주말연속극
장미와 콩나물에서 두드러졌다. 차승원의 경우 캐릭터성이 뚜렷한 배역에서 강점을 보이는데 이 드라마에서의 셋째 아들 배역은 거의 생활연기 위주였기 때문에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밋밋한 감이 있었다.
[6]
한국에선 이런 경우가 아직 흔치 않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짐 캐리, 아담 샌들러나 멜리사 맥카시, 크리스틴 위그와 같은 코미디 전문 배우들이 정극 배우로서 실력을 인정받는 경우가 꽤 흔한 편이다. 극에 잘 녹아들 정도로 코미디 연기를 잘 소화할 경우 다른 장르에서의 연기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7]
다만 리베라 메도 흥행에는 참패했다. 서울관객 53만을 모아 나름 성공하지 않았냐는 얘기가 나올 수 있는데,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던 45억 원을 투입한 작품이었다.
[8]
독전,
힘을 내요, 미스터 리,
낙원의 밤,
싱크홀이 있다.
[9]
시청률은 낮아도
연기력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MBC 사극의 종말이라고도 불린
화정에선 광해군 역으로 화정 초중반부의 시청률을 거의 혼자 이끌었다.
[10]
2018년 여름에 개봉한
독전은 5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차승원도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캐스팅 목록 상으로는 조연이 아니고 카메오다.
[11]
선조는 권력욕과 왕권 강화에 관심이 많은 왕이었지만 공을 세운 노비를 면천하고, 재능있는 신하들의 활동을 장려하는 등 긍정적인 모습도 있어 영화 속에 구현된 인물과는 다소 괴리감이 있다. 물론 왜란 시기의 행동은 선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후대의 역사가들도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기행을 보여주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