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15 00:16:31

존 클레어

<colbgcolor=#000><colcolor=#C49102> 존 클레어
John Clare
파일:John_Clare.jpg
출생 1793년 7월 13일
잉글랜드 노스햄프턴셔 헬프스턴
사망 1864년 5월 20일 (향년 70세)
잉글랜드 노스햄프턴 세인트 앤드류스 정신병원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시인
종교 개신교( 성공회)
서명 파일:John_Clare_signature.svg
너의 까만 눈동자는 볼 것이니
슬픔 속에서 내가 모은 꽃들을

자유로이 홀로 걸을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이구나
그래도 너와 함께 걷고 싶어라
- 존 클레어 <메리(Mary)> 中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청년 시절2.3. 시인으로서의 시절2.4. 말년
3. 작품성
3.1. 특징3.2.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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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노스햄프턴셔 출신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퍼시 비시 셸리, 바이런 경과 같은 당대 유명한 시인들과 함께 영국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했지만 이들의 그림자에 묻혀 평생을 무명으로 살아온 비운의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시의 대부분은 주로 자연을 찬미하고 시골 생활을 묘사하는 내용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존 클레어는 집안이 매우 가난한 탓에 소싯적부터 일꾼인 아버지를 도우며 쟁깃질, 풀베기, 타작질 등등을 하며 자랐다. 목축업자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문맹이었지만 자기 자식인 클레어에게는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야겠다는 의지가 컸다. 그 덕분에 클레어는 마을 학교를 다니게 됨으로써 열광적인 독서를 하게 되었고, 특히 13살 때 제임스 톰슨의 <사계절(The Seasons)>라는 시를 접한 뒤에 그 후로 시를 적기 시작하였다.

2.2. 청년 시절

청년이 되었을 무렵 같은 학교에 다녀 친하게 지냈던 '메리 조이스'[1]란 농부의 딸과 깊은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크게 반대를 한 탓에[2] 둘과의 관계는 1816년 끝났다. 슬픔에 잠긴 클레어는 엑시터 후작의 저택 정원사로 취업을 했고 이후 군대에 입대해 군 복무를 이행했다. 제대한 후에는 러틀랜드 주에 있는 석회 제조업에 종사했다. 그렇게 분주한 일상을 보내게 되어 헤어진 메리 조이스를 잊은 것 같았겠지만 사실 클레어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했다.

2.3. 시인으로서의 시절

그는 시집을 내고 싶었지만 직접적인 인맥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출판하려고 해도 당시 종잇값이 워낙 비쌌던지라 가난한 일꾼 집안 출신인 클레어에겐 그것은 그저 꿈이었다. 비록 엑시터 후작 저택의 정원사로 일해서 그에 대한 연금[3]을 받고 있었지만 택도 없는 돈이었다. 대신 그는 자주 찾아가던 마을 서점 주인에게 자신의 시를 보여주었고 그의 재능을 알아챈 서점 주인은 출판사[4]를 운영하던 사촌인 존 테일러에게 클레어의 시를 보여준다.인맥의 힘 그렇게 해서 1820년, 그의 첫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집 <시골 생활을 묘사한 시들(Poems Descriptive of Rural Life)>이 출판된다.

같은 해 클레어는 목장에서 우유 짜는 일을 하는 '마사 터너'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첫 시집이 나름 수익을 얻게 되자 1821년 그는 두 번째 책, <마을의 음유시인(The Village Minstrel)>을 출판하고, 1827년에는 장편시 <양치기의 달력(The Shepherd's Calendar)>했지만 그는 여전히 문학계에서 주목을 받지를 못했다. 경제적인 이익을 중시하던 출판 관계자들은 안 그래도 종잇값이 비싼데 그의 작품들은 번번이 쓴맛을 보게 되니 그의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출판하기를 꺼렸을 지경.

한편 이러한 궁핍한 삶과 실패의 연속으로 인해 그는 정신적으로 심각한 이상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극도의 우울함, 의심과 좌절의 증세를 보인 클레어는 자신의 고향 마을을 떠나 노스보로우(Northborough)에 정착했지만 그의 정신 상태는 더욱 불안해졌고, 그의 시에는 점점 어두움과 상실감이 가득한 내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2.4. 말년

그의 마지막 시집인 <시골의 뮤즈 (The Rural Muse)>가 출판되었던 해인 1837년까지도 불안한 정신 상태를 회복하지 못했던 클레어는 결국 그해 7월 런던 하이비치(High Beech)의 정신병원에 입원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심해져서 1841년 자신이 첫사랑이었던 메리 조이스와 결혼했다는 망상에 휩싸여 병원을 탈출하고, 고향 마을이 있는 노스햄프턴셔까지 걸어가 그녀를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메리는 이미 1838년 세상을 떠났었고 클레어는 크게 낙심했다. 이윽고 그는 노스햄프턴 일반 정신병원(현재 세인트 앤드류스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1864년 숨을 거두었다.

3. 작품성

3.1. 특징

영국 낭만주의 중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찬미하는 자연파 시인[5]이지만 같은 계열인 윌리엄 워즈워스와는 다른 자연파 작품을 내놓았다. 오랫동안 농가 일꾼으로 생활하고 시골에서 살아온 영향으로 그는 자연과 가난한 일꾼들의 삶을 조화롭게 엮어내어 묘사하는 시들을 썼다.

그의 시를 잘 보면 여느 낭만주의 시인들의 작품보다는 부족함이 느껴진다. 나름대로 풍족한 집안에서 자라나 교육도 제대로 받은 덕분에 편한 유년 •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뭇 낭만주의 시인들[6]과는 달리 그는 빈곤한 집안의 자식에 어렸을 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노동을 하고 그나마 문맹을 면할 정도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단어 선택이 풍부하고 수려한 문체를 가진 낭만주의 시들과는 상반되게 클레어의 시들은 대부분 단어 선택이 폭넓지 못하고 지역 사투리로 쓰인 경우도 많으며 투박한 문체를 지니고 있다. 물론 지금은 시가 어떤 문체로 쓰였든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이라고 평가되지만, 주로 도시 사람들이라던지 귀족들이 즐겨 읽던 그 당시의 '시'에서 지역 사투리와 투박한 문체가 들어가는 것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투박하고 정갈한 문체로 인해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적인 낭만주의 시들과는 다른 진정성과 더불어 시골에서 서정적이고 소박한 삶을 물씬 느낄 수가 있다. 이렇게 클레어의 시들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어 현대 문학계에서 뒤늦게 재평가되고 있다.

3.2. 대표작

  • 시골 생활을 묘사한 시들(Poems Descriptive of Rural Life and Scenery)
  • 마을의 음유시인(The Village Minstrel, and Other Poems)
  • 양치기의 달력(The Shepherd's Calendar with Village Stories and Other Poems)
  • 시골의 뮤즈(The Rural Muse)
  • 스워디 웰의 슬픔(The Lament of Swordy Well)


[1] 상단에 나온 시 <메리(Mary)>가 자신의 여친이었던 메리 조이스에게 바치는 시다. [2] 아무래도 자신의 딸이 가난한 집안에 마땅한 직업마저 없던 클레어와 만나는 걸 보기 싫었던 것 같다. [3] 당시 연금은 15기니였다. 15기니는 지금으로 치면 약 790 파운드의 값, 한화로 약 120만 이다. 월급 120만 원으로도 시원찮을 판에 1년에 120만 원으로 생활하기란 가난한 것을 모자라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을 못할 정도다. [4] 존 키츠의 시를 출판하던 회사였다. [5] 대표적으로 윌리엄 워즈워스가 있다. [6] 예를 들자면 윌리엄 워즈워스는 초대 론즈데일 백작의 법정 대리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나름 유복한 생활을 해 명문대 케임브리지 대학교까지 나온 후 훗날 영국 왕실에서 임명하는 왕실 소속 시인인 계관시인으로 말년을 보냈고, 바이런 경은 바이런 남작 집안에서 태어나 이후 남작 지위를 물려받았으며 대학도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나왔다. 퍼시 비시 셸리는 당시 영국 휘그당 소속 국회의원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튼 칼리지를 거친 후 옥스퍼드 대학교를 입학한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반면 존 클레어와 같이 예외는 있다. 영국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인 존 키츠는 그의 아버지가 마차 대여업을 했지만 집안이 변변치 못했고 일찍이 존 키츠는 그의 부모님을 여의어 결국 할머니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할머니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되어 고아 신세처럼 살다가 다행히 할머니가 지명한 후견인이 지원해 준 덕분에 악착 같이 공부를 해 명문대 킹스 칼리지 런던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