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성이 같은 동명의 미국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존 벨 에드워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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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 상원의원 (노스캐롤라이나 주 클래스 3) | ||||
제103~105대 런치 페어클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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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108대 존 에드워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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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117대 리처드 버 |
미합중국 제106~108대 연방 상원의원 조니 리드 "존" 에드워즈 Johnny Reid "John" Edward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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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 1953년 6월 10일 ([age(1953-06-10)]세)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세네카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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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섬유공학 /
B.A.)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 법학 / J.D.) |
가족 |
엘리자베스 에드워즈(1977년 결혼~2010년 별거) 자녀 5명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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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 침례회) |
경력 |
노스캐롤라이나
내슈빌 법원 서기 (1977) 노스캐롤라이나 롤리시 변호사 (1978~現) 연방상원의원 (1999~2005/노스캐롤라이나)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부통령 후보 (2004)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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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정치인 겸 前 변호사.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 케리 대선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 출마 및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를 위한 민주당 후보로 나갔으나 두번 모두 낙선했다. 이후 불륜 의혹으로 불명예 은퇴했다.2. 생애
1953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일용직 공장노동자 아버지와 신문배달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고 여러번 이사를 다녀야 했다. 아버지가 공장 감독관으로 승진할때까지 제대로 된 집 한번을 가져본 적이 없는 전형적인 화이트 트래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1974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면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그는 1978년 로펌에 취업했지만 3년만에 퇴직해 1981년 노스캐롤라이나 롤리시에서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는데, 기업이나 거대 이익단체를 위한 변호가 아닌 소수자, 약자의 소송을 전담하는 인권변호사로 인망이 높았다. 그는 1980년대 내내 의료과실 소송, AIDS 소송 등 기업, 병원, 단체를 상대로 개인의 소송을 도와 지역에서 인지도를 얻게 된다.인권변호사 활동 이외에 존 에드워즈의 평가를 높여준 것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아나니아 에드워즈였다. 엘리자베스 에드워즈는 동성애 지지 등 여러 진보적인 활동에 앞장서며 두각을 드러냈고, 1996년 아끼던 아들을 사고로 잃은 비극적인 스토리로도 주목을 받았다. # 이런 배경을 등에 업고 1998년, 존 에드워즈는 민주당 소속으로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 상대는 현직 의원 로크 페어클로스였는데, 당시 선거가 빌 클린턴의 레임덕 기간에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83,000표 차이로 페어클로스 상원의원을 꺾고 당선되어 주목받았다.
의원 임기 도중에는 신민주연합에 소속되었고 중도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었다. 의정 활동에서도 소수자나 약자를 위한 입법을 많이 처리해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99년에는 빌 클린턴 탄핵안에서 클린턴 측의 변호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앨 고어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될뻔했지만 낙마했다. 2002년, 이라크 전쟁 결의안에서 에드워즈는 사담 후세인을 "제거해야할 폭군"으로 묘사하며 힐러리 클린턴 등과 함께 민주당에서 가장 앞장서 이라크 전쟁을 찬성했다.
2.1.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04년 대통련 선거에서 존 에드워즈는 3~4위권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초 유력 후보자였던 하워드 딘 버몬트 주지사가 무리한 네거티브로 미끄러지고, 미국 남부에서 에드워즈가 유의미한 득표를 거두면서 에드워즈는 19%의 득표를 거두어 존 케리에 이은 2위를 차지했다. 존 케리는 존 에드워즈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북부 엘리트 출신인 존 케리의 경력을 남부 노동계급 출신인 존 에드워즈로 보완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존 에드워즈는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명확한 정책 기조나 공약 없이 포퓰리즘적인 수사를 반복했고, 무엇보다 2002년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다가 2004년 대선 기간동안에는 반대한 것으로 인하여 플립 플롭(Flip-flop)[1]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딕 체니와의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더러 산전수전 다 겪은 중진 정치인 딕 체니에 비해 존 에드워즈는 경험이 부족한 것으로도 비판받았다.더구나 자신이 경선 때 강점을 보였던 지역인 남부에서 존 케리가 단 한 주도 승리하지 못하며 민주당 지지층에게서는 "왜 에드워즈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냐?"라는 비아냥만 들었다. 조지아(41.4%), 플로리다(47.1%), 테네시(42.5%), 버지니아(45.5%) 등 민주당 기반이 어느정도 있는 남부 주에서 오히려 2000년에 비해 지지율이 떨어졌고 심지어 에드워즈의 홈스테이트인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13%p차(56.0% vs 43.6%)로 광탈당하며 전혀 강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존 에드워즈는 2000년 조 리버만, 2016년 팀 케인과 함께 민주당의 가장 큰 러닝메이트 지명 실패 사례로 남게 되었다.
2.2.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Tomorrow Begins Today
2008년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 후보 슬로건
2008년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 후보 슬로건
200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존 에드워즈는 클린턴과 오바마와 함께 3강의 톱을 이루었다. 에드워즈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30%를 득표, 오바마에 이은 2위를 거두며 유의미한 실적을 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약속한 오바마와, 중량감을 강조한 힐러리에 비해 존 에드워즈는 명확한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공약도 포퓰리즘에 기반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존 에드워즈는 힐러리와 오바마로 좁혀진 양자 구도에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에드워즈의 선거운동 기간, 에드워즈가 헌신적인 아내를 내팽겨치고 선거운동원과 혼외정사를 했다는 엄청난 스캔들이 터지며 에드워즈의 지지율은 땅을 뚫고 폭락했고, 네바다 코커스에서 4%라는 처참한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 슈퍼화요일을 앞두고, 에드워즈는 오바마를 지지하며 사퇴했다.
2.3. 그 이후
후술할 혼외정사 스캔들은 존 에드워즈의 정치 인생을 완전히 끝장내버렸을 뿐더러 공인으로서의 인생도 끝장냈다. 존 에드워즈는 정계를 은퇴한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지역 변호사로 되돌아갔고 현재까지 그 어떠한 공직도 맡지 못한채 은둔의 생활을 하고 있다.3. 혼외정사 논란
존 에드워즈의 혼외정사 논란은 르윈스키 스캔들, 게리 하트 불륜 스캔들[2]과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섹스 스캔들 중 하나였다.2007년 9월, 한 타블로이드 언론사에 존 에드워즈가 자신의 대권 가도를 도운 선거운동원 릴 헌터(Rielle Hunter)와의 불륜 의혹을 폭로했다. 존 에드워즈는 처음에는 이를 철저한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며 자신과 자신의 아내 엘리자베스 에드워즈가 30년동안 금슬 좋게 살아왔음을 어필했다. 하지만 2007년 12월 릴 헌터가 임신한 사진이 언론사에 도배되고, 존 에드워즈가 필요 이상으로 불륜 논란에 과민 대응하며 존 에드워즈의 불륜설은 점점 확산되었다. 결국 존 에드워즈는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낙마한다.
그러던 2008년 7월, 타블로이드지 언론인이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서 릴 헌터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존 에드워즈의 모습을 포착했다. 존 에드워즈는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주류 진보 언론사도 이 논란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FOX가 이 논란을 끌고 오면서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당시 활성화되었던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불륜 의혹은 일파만파 확산되었다. 2008년 8월, 존 에드워즈는 특별 성명을 내고 릴 헌터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강변하며 친자 확인을 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존 에드워즈의 미숙한 대응은 에드워즈의 주장을 더욱 신빙성 없게 만들었고(...) 민주당 중앙당(DNC)에서도 에드워즈를 없는 사람 취급하기에 이른다.
결국 2010년, 존 에드워즈는 릴 헌터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맞음을 시인하고 정계 은퇴하였다. 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존 에드워즈가 2008년 대선 과정 도중에 타블로이드 언론사를 입막음하기 위해 공적 자금을 유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존 에드워즈가 불법 선거 자금까지 받으며 입막음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법원에서 위증을 했다는 사실도 드러나, 에드워즈는 2011년 선거자금법 위반 혐의 4건, 횡령 혐의 1건, 위증 혐의 1건으로 총 6건의 혐의로 기소를 당했다. 에드워즈는 각각의 사안에서 검찰로부터 징역 5년형을 구형받아 최대 30년의 징역형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증거가 다소 불충분한 면이 있었고, 배심원단 투표에서 이 구형은 아주 근소한 차이로 무효 처리 되었다. 그럼에도 부통령 후보까지 지낸 정치인이 징역 30년형을 구형 받은 것은 매우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공인으로서 에드워즈는 끝장이 났다.
이런 법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도 심각했다. 상술했다시피 존 에드워즈가 정치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기도 했다. 존 에드워즈의 아내는 "제2의 엘리너 루스벨트"라 불릴만큼 미국인들에게 존경받았고, 여러 진보적인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그런데 전직 인권변호사라는 양반이 그런 아내를 내팽겨치고 선거운동원과 바람이 난데다가 수습을 위해 온갖 불법을 다 저질렀다는 사실은 존 에드워즈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충격을 받은 존 에드워즈의 아내는 불륜 사실을 듣자마자 구토했고 그 충격으로 암에 걸렸다고...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존 에드워즈의 아내는 2010년 1월 존 에드워즈와 별거에 들어갔고, 그해 연말 암으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존 에드워즈는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으며 민주당에서 철저히 흑역사, 언급 금지 취급하는 정치인이 되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9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노스캐롤라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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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237 (51.15%) | 당선 (1위) | 초선 |
2004 | 미국 부통령 선거[A] | 미합중국 | 59,028,444 (48.27%, 251명) | 낙선 (2위) |
5. 관련 문서
- 게리 하트 - 존 에드워즈와 비슷한 길을 걸은 정치인.다만 비교선상에 두는것은 하트에게 크나큰 실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