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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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Great Raid (1220–1223)몽골 제국의 장수 제베와 수부타이가 서방으로 실시한 정찰 중에 일어난 일련의 전쟁
2. 배경
1219년 말, 몽골-호라즘 전쟁에서 칭기즈 칸은 사막을 횡단하는 모험을 통해 수도로 눈깜짝할 새에 도달하게 된다. 수도를 지키던 무함마드 2세는 카스피해 방향으로 도주했고, 칭기즈 칸은 별동대에 속해 있었던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샤를 쫓을 것을 명한다.별동대의 계속되는 추격 속에서 무함마드 2세는 군대를 집결시킬 수 없었고, 그렇게 수십만의 병력을 자랑하던 호라즘 제국은 명령체계가 분열되며 파괴된다. 몽골 제국군의 추격에 대한 공포로 떨던 무함마드 2세는 1221년 초 카스피해에 있는 섬의 어촌 마을에서 병에 걸려 죽는다. 이는 자신을 '두 번째 알렉산더'라 칭했던 사람에게는 불명예스러운 최후였다.
한편 1219년 겨울, 수부타이와 제베는 서아시아에서 추격전을 벌이며 하나의 발칙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
3. 칸의 허락
1221년 초, 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칭기즈 칸은 수부타이를 이제는 점령이 완료된 사마르칸트로 소환한다. 여기서 칭기즈 칸과 죽은 무함마드 2세의 뒤를 이은 잘랄 웃 딘을 격파하는 방법을 함께 논의한다. 수부타이는 잘랄 웃 딘을 제압할 완벽한 계책을 제시하는 한 편, 자신은 이 작전에 참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새로운 군사작전을 제시한다.바로 카스피해를 한 바퀴 돌아 서쪽 기슭과 그 너머의 대초원을 정찰하자고 제안한다. 징기스칸은 이 계획을 수락하고 수부타이와 그의 다른 최고 장군인 제베에게 2개의 투멘 (20,000명)을 배정한다. 단, 작전이 2년 이상 걸리지 않고 귀환에서 동쪽에서 칸의 아들인 주치를 찾아 합류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렇게 1221년 2월, 수부타이와 제베는 더욱 더 서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4. 조지아 침공
근처의 소부족들을 근근히 약탈하고 살해하며 서방으로 정찰을 가고 있던 중, 정찰대는 카스피해에 위치한 조지아에 다다르게 된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조지아령이었던 나흐츠반의 식량과 백성을 약탈하고 죽였고, 그당시 군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던 조지 4세는 전쟁에조지아는 몽골 정찰대가 아란에서 계속 머무른다고 생각했고, 군사를 모으고 주변 나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보는 몽골 정찰대의 정보부에 입수되었고, 정찰대도 군대를 모아 전쟁에 대비하게 된다. 정찰대는 쿠르드족과 튀르크족의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조지아의 수도였던 트빌리시 근처에서 몽골군은 조지아군과 맞붙었고, 조지아군은 튀르크족을 무찌르는데 성공하지만 후위의 몽골 본대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수부타이는 군사들에게 십자가를 들고 행군하게 한다거나, 스파이를 이용해 우리가 조지아를 지원하러 온 기적의 기독교 동맹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등 조지아군을 기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지 4세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조지아인과 아르메니아인들 3만명을 모아 마지막 한타를 준비하게 된다. 두 군대는 9월에 쿠난 평원에서 만났다. 수부타이는 나머지 군대와 함께 전진한 반면, 제베는 5,000명의 기병으로 매복을 준비했다. 몽골의 전술은 주력으로 공격한 다음 후퇴를 가장한 후, 두 번째 몽골 군대가 후방에서 내려와 적을 포위하고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전술에 대비하지 못한 조지아인들은 중기병으로 초기 몽골의 돌격을 분산시키고 코트만 강까지 추격했지만, 매복한 제베가 갑자기 기습하면서 전투는 몽골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몽골군은 조지아군을 포위, 섬멸했고 왕과 이바네는 도망쳤다. 오른쪽 측면에서 싸우게 된 바흐람 가겔리 왕자 는 살아남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 조지 4세는 가슴에 중상을 입어 사망한다. 몽골군이 패퇴시킨 조지아군은 원래 5차 십자군에 지원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조지 1세의 여동생이었던 루수단이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조지아의 군대가 완전히 붕괴되었기 때문에 십자군에 지원하지 못할 것 같다는 편지를 써야 했다. 만약 조지아의 군대가 5차 십자군 전쟁에서 동쪽에서 이중전선을 형성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수부타이와 제베는 정복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찰하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조지아를 점령하지 않고 약탈만 하고 북상한다.
5. 쿠만족(킵차크인)과의 전쟁
수부타이와 제베는 1222년 겨울,몽골군은 쿠만족과 교전하지만 불리한 입장으로 인해 진전을 이룰 수 없었다. 몽골군은 조지아에서 빼앗은 전리품의 절반을 쿠만족에게 뇌물로 주고 쿠만족이 몽골군에 합류하도록 했다. 쿠만족은 이를 수락했지만 돈을 받은 후 밤에 진영을 철수하고 동맹군을 떠났다.
비록 먹튀이긴 했지만 쿠만 족은 연합군에서 이탈했고, 수부타이와 제베는 쿠만족이 없는 연합군을 간단히 섬멸한다. 그리고 남은 병사들을 강제로 징집한다.
몽골군은 연합군의 전투 소식을 듣고 볼가 강에서 아스트라한으로 후퇴하던 쿠만족 군대를 엄청난 속도로 추월하여 섬멸했다. 유리와 다니엘은 모두 죽었고 쿠만 족은 학살당했다. 몽골군은 '뇌물'에 사용된 보물을 회수했다. 이 패배 소식을 듣고 많은 쿠만족이 서쪽으로 도망쳐 헝가리 국경과 아조프 해에 있는 비잔틴 제국의 무역 기지로 갔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이제 남부 러시아를 손에 넣었고, 대도시였던 아스트라한을 마음껏 약탈하게 된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이제 돈 강에까지 다다랐고 아조우 해를 지나고 있었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군대를 나누어 제베는 돈 강을 향해 진군하고 수부타이는 남쪽의 아조우해로 진군하여 잔여 쿠만족으로부터 후방을 지키기로 한다. 수부타이의 군대는 해안가의 마을들 파괴하며 진군하다가 유럽에서 온 베네치아 상인들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그는 서부에 대한 정보와 그곳 왕국들에 대한 군사 정보를 대가로 그당시 베네치아와 전쟁 상태에 있던 제노바의 무역기지를 파괴하기로 약속한다.
수부타이는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약속대로 크림반도에 있는 솔다이아(수다크)의 제노바 무역 기지를 파괴한 다음 제베와 다시 합류한다. 그들의 군대는 이제 약 25,000명이 되었고 그들은 저항 없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인 드니스테르 강까지 진군했다. 이제 그들은 충분히 전리품을 챙겼고, 정찰도 완료했다고 생각해 몽골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방향을 돌린다. 그러나...
6. 키이우 루시 연합국 침공
먹튀의 대가 코티안은 가능한 한 많은 쿠만족의 잔당과 함께 북쪽으로 도망쳤고 몽골에 대항하여 러시아 군주들과 동맹을 맺기를 간청했다. 회의에서 갈리시아의 러시아 군주, 그의 사위 볼리니아의 다니엘, 쿠르스크의 올렉 군주, 키예프와 체르니고프의 군주들이 코티안과 합류하여 몽골을 막기로 합의한다. 수즈달의 유리 공작은 그의 조카인 로스토프 군주의 지휘 하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동맹군의 명목상 병력은 80,000명에 달했다.몽골은 스파이와 정찰병을 통해 러시아와 쿠만 연합군이 여러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자신들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몽골군이 드네프르 강을 건너는데, 주치와의 예상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치는 동쪽에서 병이 나서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주치는 칭기즈 칸의 몽골로 오라는 명령도 듣질 않았는데, 그때도 사유는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쁘락치가 실제로는 아프기는 커녕 사냥만 하고 있다고 일러바치자 대격노한 칭기즈 칸이 직접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 전에 죽었다. 실제로 아팠을지도.
한편 수부타이와 제베는 체르니고프와 키이우의 왕자들에게 대사를 파견하여 평화를 시도하지만 러시아는 대사들을 처형한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러시아군의 도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드네프르 강 동쪽 기슭에 하마벡의 지휘 하에 1,000명의 병력을 남겨둔다. 이 후위대는 결국 압도당해 파괴되었고 하마벡은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다.
1223년 5월, 몽골군은 아조프해 북쪽의 육로를 통해 천천히 후퇴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동성 덕분에 러시아군을 쉽게 앞지를 수 있었지만, 그들은 러시아군과 대결하기로 결정했다. 1223년 5월 31일 그들은 칼카 강(칼뮤스) 서쪽에서 멈췄다. - 칼가강 전투
이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해 루시군의 야전 수행 능력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학자들에 따르면 최소 2/3 이상의 루시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공작 6명이 사망했고, 포로로 잡힌 귀족들은 몽골군에 의해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루시군 수뇌부는 강가의 모든 배를 파괴해 몽골군이 강을 건널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데 급급했다고 한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키예프의 왕자는 칼카에서의 무모한 돌격에 가담하지 않고 군대를 거의 손상시키지 않은 채 150마일 떨어진 드네프르 강으로 후퇴했지만 결국 몽골군에게 추격당해 요새화된 진영에서 학살당했다.
역시 이번에도 수부타이와 제베는 정복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찰하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루시 공국들을 점령하지 않고 약탈만 하고 회군한다. 그러나 루시 공국들은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올때까지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회군은 240년 동안 기다려야 했다.
7. 볼가 불가리아와의 전쟁
1223년 가을에 벌어진 케르네크 전투는, 불가리아족이 매복을 통해서 몽골군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다. 이븐 알-아티르가 기록한 원문에는,루스(Rus)와 키프자크(Qipjaq) 땅에서 타타르족이 통치자에게 돌아온 이야기
타타르족이 우리가 묘사한 대로 루스족을 대하고 그들의 나라를 약탈한 후, 그들은 철수하여 620년[1223-1224]에 불가리아족에게 갔습니다. 불가리아족은 그들의 접근을 듣고 여러 곳에 매복을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진군하여 그들과 맞서 싸우고 그들이 매복 장소를 지날 때까지 그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등 뒤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은 중간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사방에서 칼에 쓰러졌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죽었고 소수만이 탈출했습니다.
타타르족이 우리가 묘사한 대로 루스족을 대하고 그들의 나라를 약탈한 후, 그들은 철수하여 620년[1223-1224]에 불가리아족에게 갔습니다. 불가리아족은 그들의 접근을 듣고 여러 곳에 매복을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진군하여 그들과 맞서 싸우고 그들이 매복 장소를 지날 때까지 그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등 뒤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은 중간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사방에서 칼에 쓰러졌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죽었고 소수만이 탈출했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다른 기록이 없는만큼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몽골군의 파르완 전투이후 두 번째, 수부타이와 제베 원정군의 첫 번째 패배가 된다.
게다가 이븐 알-아티르에 따르면 전투 이후의 남은 몽골군은 4천명 뿐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냥 패배도 아니고 대패다.
8. 후일담
정찰을 마친 제베는 돌아가다가 병사하고 만다.그리고 이 원정에서 수부타이 밑에서 싸우던 젊은 장수가 있었으니 주치의 아들로 훗날 몽골 제국 서부 원정군을 이끌고 돌아오는 바투다. 수부타이는 이때의 정찰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때도 노쇠한 몸으로 충실한
9. 여담
이 원정에서 몽골군은 처음 2만명으로 시작했지만 서로 다른 나라의 군대 20만명을 죽였다고 한다.
[1]
실제로 임하기 싫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