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29:26

정일우(신부)

정일우
鄭日祐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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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1]
미국명 존 빈센트 데일리(John Vincent Daly)
출생 1935년 11월 21일 미국 일리노이 주
사망 2014년 6월 2일 (향년 79세)

1. 개요2. 상세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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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가톨릭 신부.

2. 상세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부로, 세례명 사도 요한. '빈민 사목의 대부'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1960년 9월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대한민국 땅을 밟은 후, 1963년 사목 실습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가 사제서품을 받았다. 4년 뒤 고등학교 은사인 바실 프라이스 신부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에 해외선교사제로 파견되어 돌아왔다.[2]

정 신부는 프라이스 신부와 함께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하던 1972년 학생들이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것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에 눈을 떴다. 이때 정 신부는 "대한아 슬퍼한다. 언론자유 시들어간다."고 쓴 피켓과 상복차림으로 명동에 갔다가 반정부 시위로 잡혀갔다. 경찰이 "왜 그랬냐?"고 물어보자 정 신부는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가 없고 죽어간다." 라고 답했다. 이에 경찰이 "아니요, 한국에는 얼마든지 언론자유가 있어요." 라고 말하자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비참하게 살아가는 빈민들의 삶을 접한 뒤 청계천 양평동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들을 위한 사목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제정구를 만나 일생의 동지가 되었다. 빈민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의식 교육을 하고 판자촌 철거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 빈민의 '정신적 아버지'로 자리잡았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곳곳에서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상계동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도왔고 이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았다. 정일우 신부가 철거민들을 돕는 모습은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인 상계동 올림픽에도 기록이 되었다.

1998년 귀화한 뒤 충청북도 괴산군에 농촌 청년 자립을 돕기 위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농촌 사목에도 힘을 쏟았다.

정일우 신부는 1986년에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제정구 전 의원과 공동 수상했다.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이름 없이 남들을 돕다 2014년 6월 2일 사망하였다. [PBC뉴스] 정일우 신부 선종

3. 여담

  •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전반에는 재야 운동가로서 반미 집회에 자주 참가했는데, 시위대가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치면 마지막에 ' 나는 빼고!'라고 애드립을 덧붙였다고 한다(...). 아일랜드계이긴 하지만 미국 태생이고, 미국 선교사로서 한국에 왔고, 1998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미국 단독 국적이었으니...
  • 정일우 신부 얘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 내 친구 정일우'가 만들어져 2017년 10월 26일 개봉되었다. 감독은 송환으로 유명한 김동원 감독. 예전부터 친한 사이였다고 하며, 정일우 신부의 사망 후 어떻게 친구를 알릴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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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8년 귀화. [2] 프라이스 신부는 서강대학교 설립의 주역 중 한명으로 1966년 국내 최초로 노동문제 연구소를 열어 34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노동법, 노조 활동, 단체교섭 방법 등을 가르치며 국내 노동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