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대한민국 육군 제31보병사단장 정웅 鄭雄 | Jeong w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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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4632a><colcolor=#fff> 출생 | 1928년 4월 17일[1] |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저전리 (현 전라남도 순천시 저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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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21년 12월 23일 (향년 93세) |
서울특별시 자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
본관 | 경주 정씨[2] |
배우자 | 전성원[3] |
자녀 | 장남 정대균[4], 차남 정성균[5] |
학력 |
순천공립중학교 (
졸업) 육군호국사관학교 ( 졸업 / 1기) 육군대학교 ( 졸업) 합동참모대학 ( 졸업) 전북대학교 경영대학원 ( 경영학 / 석사과정 수료) |
종교 | 개신교( 성결교회)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13 |
경력 |
전북대학교 ROTC 단장 제31향토방위사단장 민추협 부의장 평민당총재 안보국방특보 평민당 군정치 중립화 추진 위원장 김대중 대통령후보 선대본부 부위원장 평민당 안보국방위원장 평민당 당무지도위원회 부의장 평화민주당 행정위원 대한민국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특임행정촉탁위원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보병학교 (1기)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1949년 ~ 1980년 | |
최종 계급 | 소장 (대한민국 육군) |
지휘 |
육군본부 작전참모국 차장 육군 제31보병사단장 |
참전 |
6.25 전쟁 베트남 전쟁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전직 정치인이다.2. 생애
1928년 4월 17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저전리(현 순천시 저전동)에서 아버지 정구조(鄭求朝, 1903. 7. 29 ~ 1970. 1. 3)와 어머니 나주 정씨(羅州 丁氏, 1916. 10. 8 ~ 1978. 5. 3)[6]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945년 3월 순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서 근무하다 1949년 육군호국사관학교에 지원해 합격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소집되어 호남 지구 공비토벌전과 저격 능선 등 전방에서 전투부대 중대장으로 싸웠다. 휴전협정 이후 소령으로 진급하여 대한민국 육군본부 감찰관실에서 일하다 중령으로 진급하고 군 교육기관 교관과 전방사단의 사단 작전참모, 정보참모로 근무했다. 1968년 대령이 되면서 연대장을 하다 전북대학교 ROTC 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사단 참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국을 거쳐 1974년 사단 부사단장 재임 당시 국방부 유엔군 참전 기념비 건립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6.25에 참전한 유엔군 16개국 중 미국, 프랑스, 필리핀, 그리스 등 12개국의 기념비를 건립했다. 1976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관구 참모장과 군사령부 인사참모로 근무했다. 1980년 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제31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돼 광주로 부임했다.
3. 5.18 민주화운동 시기
5.18 민주화운동 초기, 그 당시 육군 제31향토방위사단장으로서 "첫 번째"로 학생시위 진압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강경 진압"을 기대했던 신군부 측의 바람과는 다르게, 현장에 있는 시민들의 말을 경청하며 "유혈진압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병력을 적절히 운용하지 못했고 분산 운용으로 효율적인 진압을 하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진압군 지휘권을 박탈당했다.이후 신군부는 익산에 있는 특전사 제7공수특전여단을 "2번째 진압부대"로 파견했으며, 이들 2차 진압부대들은 고층 건물 옥상을 하나씩 점유해가는 한편, "민간요소(civilization)"를 고려하지 않고, 학생-일반시민 구분없이, "전투적인(combat) 행위"를 최우선으로 두는 행태를 보였으며, 특히 5월 21일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기발포"를 자행, "주민등록이 된 사망자" 수만 165명(후유증 사망자 376명)이 나오는 유혈사태를 불러오고 말았다.
강경 진압에 미온적이었던 정웅은 이후 반강제로 육군 소장 예편되었다.
4. 영향
당시 사단장이던 정웅 소장( 1980년 예편)은 강경진압에 부정적이었다. 전남북계엄분소장 및 전투교육사령부(현 육군교육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윤흥정 중장의 출동명령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정웅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던 31 향토사단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인터뷰 기사[7] 에 따르면 향토사단에게는 심지어 빵이나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고 할 정도다. 31사단 병력은 공수부대와 달리 온건한 대응을 폈다는 증언이 다수 있다.
신군부에서 내린 강경진압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정웅 장군은 강제예편되었고, 이후 김대중에게 광주의 진상을 폭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광주 북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가 당선되었을 때 90%가 넘는 지지율을 받으며, 정웅 장군의 과잉진압을 거부하며 강제예편 당한 희생을 광주 시민들이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군내에서 지휘관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었다. 나아가, 아무리 상급자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부당하면 그것을 무마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양심과 강단이 있느냐, 없느냐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다만 그렇다고 민간인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항쟁 3일째인 5월 20일, 이날은 시민들이 시내버스와 택시로 차량시위대를 조직하여 계엄군의 만행에 정면으로 맞선 날이었다. 이 과정에서 광주역과 광주시청 사이에서 작전 수행한 3공수여단을 31사단이 지원했고 그 결과 이들에게 4명이 사망했다.
뿐만 아니라 23일 해남에서 총격 사망자 2명 포함해서, 31사단의 유혈진압으로 총 6명이 사망했다고 5월단체는 밝혔다.( "광주 향토사단이 5.18 진압중 시민 사살") 이 해남에서의 사망자 수 2명도 축소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실제 해남 사망자는 4~7명으로 추정된다. ( "해남군부대서 시신 봤다"...청문회 증언 막아, 5.18 당시 해남 우슬재와 상등리에서 일어난 집단총격) 당시 23일부터 계엄군이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영춘리 경계에 있는 고개인 우슬재를 점령하고 군중과 차량들에게 발포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5.18 민주화운동/전개 참고.
서울고등법원 1996. 12. 16. 선고 96노1892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류위반(뇌물) |
이런 것들이 밝혀지면서 31사단이 시위대를 향한 특전사에 비해 학살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손놓고 보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31사단에 의한 사망자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보면, 31사단장이던 정웅 소장이 근무지를 이탈하면서 휘하 참모장과 참모들이 명령을 이행한 것으로 보인다. 정웅 소장은 자신의 근무지를 벗어나서 지휘하지 않는 방식으로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했고, 실제로 민주화 운동이 끝나고, 상황 종료 이후 보안사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전역조치 당했으며 전역조치 사유도 근무지 이탈로 알려져 있으므로 상황을 종합하여 추즉해 보면 정웅소장이 명령을 거부하고 근무지 이탈 후, 참모장 등 차상급지휘관이 진압작전을 이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일 정웅 장군이 신군부의 의도대로 강경진압을 주도했었더라면 공수여단 및 20사단 등이 광주까지 출동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당시 마찬가지로 강경진압에 소극적이었던 윤흥정 장군의 뒤를 이어 온 소준열처럼[8] 그 해 강제전역 당하지 않고 오히려 진급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강제전역과 그 이후 한동안 보안사의 감시를 받은 것, 김대중을 도와 광주의 진상을 밝힌것이 그가 강경진압을 반대하고 나아가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5. 정치 활동
대한민국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려고 했지만, 외부의 강압으로 후보자에서 사퇴하는 등 7년 동안 제약받는 사회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1988년 6공화국 출범 후, 평화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광주 북구 후보로 나가 5.18 희생자와 광주시민의 명예 회복을 내걸고 "초선 출마", 9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9] 이후 평화민주당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1992년 2월 제14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뒤 민주당을 탈당하고 박찬종이 창당한 신정치개혁당에 입당해 전국구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고, 이후 합당으로 자유민주연합 소속이 되었다.6. 정계 은퇴 이후
이후 자민련을 탈당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2021년 12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7. 매체에서
8.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 광주 동구·북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후보사퇴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 광주 북구 |
[[평화민주당| |
127,579 (91.5%) | 당선 (1위) | 초선 [11]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전국구 |
[[신정치개혁당| |
369,044 (1.8%) | 낙선(3번) |
9. 둘러보기
광주직할시 제13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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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2월 27일.
[2]
문헌공파-참의공파 63세 병(炳) 항렬. 족보명은 정병웅(鄭炳雄).
[3]
1937년 8월 7일생.
용궁 전씨(龍宮 全氏) 전달조(全達兆)의 딸이다.
[4]
鄭大均. 1963년 1월 1일생. 경희대 교수
[5]
鄭成均. 1965년 2월 7일생. 신한대 교수
[6]
정하태(丁河泰)의 딸이다.
[7]
해당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이와 관련하여 광주 사태를 목격했다는 박 모씨(38)는 『광주 사태 때 광주 시민들이 정 장군의 향토 사단 병력에는 빵, 음료수 등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공수부대는 얼룩무늬 군복을 , 향토 사단은 초록빛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향토 사단 병력은 시민들을
과잉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향토 사단마저 발포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라고 말했다. (후략)
[8]
소준열은 대장까지 진급했다.
[9]
당시 전국 최고 득표율 기록이였다. 이후 2024년 4월 10일에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81세의 박지원이 전남 해남, 완도, 진도 지역구에서 92.35%를 달성하면서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10]
제 5공화국에서는 12.12 당시 헌병감
김진기역
[11]
92.2.11 민주당 탈당 및 신정치개혁당 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