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3대 행정안전부장관인 전해철의 생애에 대해 다룬 문서.2. 생애
2.1. 초년 시절
1962년 5월 18일,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사범학교 출신으로 평양시에서 생활하다가 6.25 전쟁으로 목포시에 정착하였다. 목포에서 대성초등학교와 영흥중학교를 졸업했다.고등학교는 형이 직장 생활을 하던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다녔다.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보면 동남 억양이 묻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한 학년에 600여 명이었던 고등학교에 호남 출신 학생은 그를 포함해 단 2명이었다. 원래 혼자인 줄만 알았는데 2학년에 올라가보니 한 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1981년 마산중앙고등학교(4회)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85년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90년 5월 18일 육군 군법무관으로 임관하여 제2보병사단에서 복무하였으며, 1993년 2월 28일 중위로 전역하여 병역을 마쳤다.
2.2. 변호사 활동
병역을 마친 뒤 1993년부터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부터 안산시에서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의 변호사로 생활하며 안산시에서 터를 닦았다. 법무법인 해마루는 노무현과 천정배가 1993년에 함께 설립했던 법무법인.1996년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대외협력위원장, 노동위원회 대외협력부장, 언론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며 민변의 대표 변호사로 떠올랐다. 민변에서 맡은 사건의 70%~80%는 노동법이나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었다.
변협인권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2000년 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형사고소를 대리하여, 살인죄 공소시효 완성 직전 주범에 대한 검찰의 구속기소를 이끌어냈다. 이때 유가족에 대한 법원의 42억 원 배상판결이 나오자, 형식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건일지라도 기관에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므로, 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소멸시효이론이 정립되었다. 이 판례로 인해 공안사건으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게 되면서 법조계에 '전해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2.3. 정치 입문
참여정부 당시 한명숙 전 국무총리, 노무현 전 대통령, 전해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왼쪽부터) |
2004년 5월 탄핵 기각 판결 이후 직무에 복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다시 했고, 결국 2004년 5월부터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 5월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임명되어 1년 7개월 가량 민정수석을 지냈다.[2] 당시 44세의 나이로, 전현직 통틀어 역대 최연소 민정수석이다.[3] 이렇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인사청문회 등의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해, 참여정부 역대 민정수석들 가운데 전해철 시절에 청문회 통과가 가장 잘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에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도입된 과정에서도 실무작업은 전해철이 총괄했다고 한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산시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런데 김영환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표를 갈라먹는 바람에 한나라당 이화수 후보에게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후 법무법인 해마루의 대표 변호사가 되었고, 민주통합당 안산시 상록구 갑 지역위원장직도 계속 수행하였다.
검찰에 출두한 노무현 전 대통령[4] |
2.4. 제19대 국회의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60.76%의 득표율을 기록, 새누리당 박선희 후보[5]를 누르고 당선되었다.[6]그 후 문재인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으나 친노 비선 실세 논란에 휘말려[7] 논란이 커지자 이른바 '3철'로 불리는 양정철, 이호철 등과 함께 캠프에서 일괄 사퇴하였다.
민주통합당 BBK 진상조사위원회 위원, 정봉주 구명위원회 위원, 국회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특위 위원,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위원, 민주당 대통령 기록물 열람위원, 국정원법 개혁추진위원회 위원, 새정치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 국회 서민주거복지특위 위원, 박상옥 대법관 인사청문특위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 (2014~2015년)으로 활약하며 세월호 관련 입법을 모두 주도하였고, 결국 2014년 10월 세월호 관련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특별법, 2015년 1월 세월호 배보상 특별법 등을 통과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머니투데이가 평가한 제19대 국회의원 의정활동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내 9위를 기록했다. 관련 기사
2.5. 제20대 국회의원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상록 갑에 출마해 1여 다야의 환경 속에서도 35,481표, 38.8%를 득표하며 새누리당 이화수 후보를 9,000표 차이로 따돌리며 비교적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정무위원회의 더불어민주당 간사로 선임되었다.2016년 8월에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격차로 당선되었다. 권리당원 ARS 투표와 대의원 현장 투표를 합산한 결과, 63.3%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경쟁자였던 이언주 의원을 상대로 압승했다. 이언주 의원이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에서 인심을 잃고 전해철 의원이 노무현재단 운영위원을 맡은 경력으로 반사 이익을 톡톡히 본 결과물이라는 평가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고위원 제도를 당의 각 시도당 위원장들이 호선하는 권역별 대표위원제로 바꾸면서 전해철 전 의원은 경기도 & 인천광역시 권역 대표로 당 최고위원이 됐다. 전해철 전 의원이 1년,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위원장인 박남춘 전 의원이 나머지 1년을 맡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친문 지지층에서는 김경수, 조국, 임종석과 함께 전해철 의원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 보수 야당에서 삼철이라고 공격 했던 것이 오히려 이득이 된 셈.
2018년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했으나, 4월 20일 발표된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 결과 일반 여론조사에서 31.70%(652표), 권리당원 여론조사에서 46.86%(33,375표)의 득표율을 기록해 도합 36.80%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59.96%의 총 득표율을 기록한 이재명 전 성남시장에게 큰 차이로 패배하였다. * 권리당원 조사에서는 불과 2.52% 차이밖에 나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인지도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8] 다만 강성 친문 성향 사이트 등지에서는 경선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재명 후보에 대한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는 터라(심지어 경선 패배 후, 이재명을 떨어뜨리기 위해 상대 당 남경필 후보에게 투표하자고 각 커뮤니티에서 대대적으로 게시물과 댓글 작업을 하는 등 비정상적인 광기를 보였었다.)[9], 이러한 당심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후보가 이긴 걸 보고 이 정도로 강경한 친문 당원들의 숫자가 실제로는 많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3차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당 대표에 도전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국 불출마했다. *
2019년 재보궐선거에서 경상남도 통영시·고성군에 출마한 양문석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선거 운동을 지원했다.[10] 하지만 양문석 후보는 35.99% 득표에 그치며 58.48%를 득표한 자유한국당 정점식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2.6. 제21대 국회의원 및 행정안전부장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안산시 상록구 갑에 출마하여 59,021표, 58.5%를 득표하며 미래통합당 박주원 후보와 2만여 표라는 넉넉한 차이로 당선되었다.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의 첫 원내대표 선출을 위한 경선에 출마했으나 # 72표를 획득하면서 1차 투표에서 과반인 82표를 얻은 김태년 의원에 밀려 2위로 낙선했다. #
제21대 국회 전반기 정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
2019년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퇴 이후 후임 장관 하마평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2020년 12월 4일 진영 전 행정안전부장관의 후임으로 내정되었다. # 12월 22일 인사청문회가 개최되었으며 다음날인 12월 23일, 경과보고서가 채택되었다. # 12월 24일 공식 취임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G7 정상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수 있게 만들 때의 장관 #으로 취임 당일부터 전국 식당 5인 이상 모임금지, 겨울 스포츠 시설 운영 금지 등의 조치를 시행하는 등 코로나19 대응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지방분권에도 적극적이었다. 2020년 12월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이로 이해 신설된 것이 특례시) 이후 재정분권까지 추진하여 '지방분권 2.0' 시대를 만들겠다는것이 포부였다. # ##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승리하여 정권교체가 확정되자, 4월 27일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사퇴계를 제출했다. # 하지만 차기 정부 장관 지명자들이 여러 논란으로 임명이 지연되면서 국무회의조차 열지 못할 가능성이 생기자 문재인 전 대통령이 제출된 사퇴계 일부를 수리하지 않았고,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후 직접 논란이 있었던 장관 후보자들의 임명을 강행한 뒤 사퇴계를 수리하면서 드디어 정부를 떠나게 됐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할거라는 예측이 있었으나 불출마했다.
2022년 6월 15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당대표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경쟁자인 이재명 의원을 향해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례와 비교하며 출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일주일 뒤 최종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이재명 의원에게 동반 불출마를 제안하기도 했다. ## 하지만 이재명 의원은 전해철, 홍영표 전 의원 등의 불출마 압박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당대표 선거 출마를 강행했다.
2022년 7월 22일, 제21대 국회 후반기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2023년 2월 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노동조합법 제2, 3조 개정안(일명 노란봉투법)을 전체회의 통과시켰다. 이후 노란봉투법은 2023년 11월 9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단독 표결로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 이후 환경노동위원장 직을 같은 당의 박정 의원에게 넘기고 외교통일위원회로 사보임되었다.
2.7. 2024년 이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안산시 상록구 갑 예비 후보로 등록하면서 4선에 도전하였다. #2024년 2월 29일 선거구 조정에 따라 안산시 상록구 갑이 안산시 갑으로 조정되었다. 하지만 기존 7개동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이름만 바뀐 셈.
2024년 3월 13일 경선에서 양문석에게 패배하여 공천 탈락하였다.
2024년 9월 경기도 도정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될 예정이다. #
[1]
생일이
5월 18일이다.
[2]
참여정부에서 두 번째로 오래 지냈다. 참고로 가장 오랫동안
노무현 정부의 민정수석 자리를 지킨 이는 두 번에 걸쳐 2년 4개월 가량을 지낸
문재인.
[3]
불과 44세의 나이로 대통령, 국무총리, 각 실장 다음가는 실질적인 행정부 5~6인자가 된 것이다. 참고로 전해철 다음으로 젊은 나이에 민정수석이 된
우병우조차 전해철보다 5살이 많았다. 물론 그 젊은 나이, 사법시험 기수 때문에 검찰과 법무부가 전해철의 말을 잘 안 들었지만..
[4]
사진 맨 왼쪽부터 당시
문재인 전
변호사(맨 뒷쪽 안경에 흰 머리.),
주영훈 전
봉하마을 경호팀장, 문용욱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대통령 수행비서)(문용욱 전 부속실장은 정치일선에 나서지는 않았고 이후 삼양식품에 스카웃되어 현재 상임고문과 이사회 의장을 지내고 있다. 친노 진영에 또 다른 문용욱(1967년생)이 있었으나 이 사람은 안희정계로 세종특별자치시교육감 비서실장직을 수행하던 도중인 2018년 1월에 사망했다.), 전해철 전
변호사,
노무현
전 대통령,
김경수 전 비서관. 이 중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는 문용욱 전 실장과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훗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치권 최일선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수석 변호인 역할을 한
문재인은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됐고, 경호 책임자였던
주영훈은
문재인 정부의 초대
대통령경호처장이 됐으며, 측근 변호인 전해철은
친문계의 핵심 3선
국회의원과
행정안전부장관까지 내정되었고, 마지막 비서관인
김경수는 초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후
경상남도지사에
당선되었으나, 여론조작 혐의로 징역형에 처해지면서 도지사직 상실과 함께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5]
희대의 도망녀로 잘 알려져 있다.
영상 참조
[6]
박선희 후보가 30,297표(39.23%), 전해철 후보가 46,927표(60.76%) 득표하였다.
[7]
당의 대선 지휘 라인을 전해철 등
친노 비선이 완전히 장악했다는 비판이었다.
[8]
엄밀히 말해 권리당원 투표 자체를 진 것이 아니다. 투표 자체는 근소하게 이겼지만 현역의원 10퍼센트 감점을 받아 지는 결과가 나온 것.
[9]
굉장히 온건하게 표현한 게 이렇고, 실제로는 이재명이 될 바에는 남경필이 되는 게 낫다며
여러가지 네거티브 공세들을 펼치고 있다. 실제로 남경필은 지사 시절 더불어민주당 인사인 이기우와 강득구를 정무부지사로 임명해 협치를 실현한 적이 있어 중도 성향 민주당 인사들에게는 평가가 좋았다.
[10]
이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박을 깨뜨리겠다며 전해철 전 의원의 지역구인 안산시 상록구 갑에 응징 출마하게 된것이 역사의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