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 파스토리우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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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F13><colcolor=#fff> 자코 파스토리우스 Jaco Pastor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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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프랜시스 앤소니 파스토리우스 3세 John Francis Anthony Pastorius III |
출생 | 1951년 12월 1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노리스타운 | |
사망 | 1987년 9월 21일 (향년 35세) |
미국 플로리다 주 포트로더데일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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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음악가, 작곡가, 프로듀서 |
장르 | 퓨전 재즈 |
악기 | 베이스 기타, 콘트라베이스, 기타, 피아노, 드럼, 타악기 |
소속 | 웨더 리포트 (1976~82) |
활동 | 1966년 ~ 1987년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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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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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 목소리를 내듯 베이스를 연주합니다. 내 연주는 내 이야기 같은 거죠. 마치 가수처럼."
자코 파스토리우스는 미국의 재즈 뮤지션이었다. 연주하던 악기는 베이스 기타이다.
동시대의 아티스트로는 스탠리 클락, 제프 벌린, 마크 이건 등이 있다.
대략 자코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재즈에서 일렉 베이스가 메인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이 늘었다.
그의 이후에 나타난 재즈 베이시스트들 중 자코에 영향받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로 재즈 일렉 베이스의 연주 기법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마이클 맨링은 스스로 자신을 '자코의 수제자'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를 존경했으며, 마커스 밀러도 젊은 시절 그의 음반을 틀어놓고 그의 플레이와 똑같이 연주하기 위해 몇 주를 연습했다고 한다[1]. 재즈 베이스의 주법을 개척한 연주자로서 상당수 뮤지션들이 존경하는 베이스 연주자를 꼽으라 하면 십중팔구 나오는 이름이다. 요약하자면, 재즈계의 지미 헨드릭스.[2] 그만큼 재즈 베이스 레퍼토리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일렉트릭 베이스가 멜로디컬한 악기도 될 수 있다고 인식시켜 준 동시에 프렛리스 베이스의 대표자이기도 하다.[3] 자코의 플레이로 인해 프렛리스 베이스의 표현력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및 활동 내역
2.1. 어린 시절
1951년 자코는 펜실베니아주의 작은 마을 Norristown에서 독일과 아일랜드 혈통의 아버지 잭 파스토리우스(Jack Pastorius)와 스웨덴계인 어머니 스테파니 하팔라(Stephanie Haapala)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남동생인 그레고리와 로리가 있다.그리고 7살때 가족들과 함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1963년 12살이던 자코는 초등학교 친구들과 밴드 소닉센스를 결성하여 음악 생활을 시작한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베이스를 연주한 건 아니며, 맨 처음으로 시작한 악기는 드럼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드러머였기 때문에 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훗날 웨더 리포트의 명작 < Heavy Weather>의 Teen Town을 녹음할 때는 직접 드럼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13세 때 미식 축구를 하다 손목 골절상을 당해 드럼을 포기해야 했다. 이렇게 자코는 정착할 악기를 쭈욱 찾아보다가[4] 17살 때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에 매력을 느껴 돈을 모았고 이윽고 샀지만 그가 살던 플로리다는 매우 습한지라 아침에 일어나니 그의 말로는 '100만개로 쪼개 질 것 같은 크랙'이 생겼다고..[5] 결국 여러모로 관리하기 힘들었는지 나중에 재즈 베이스랑 교환했다고 한다.
2.2. 웨더 리포트의 멤버로
그는 10대의 나이로 포트 로더데일에 있는 여러 밴드에서 베이스와 편곡을 하였다. 그러다 1968년에는 플로리다에서 베스트 플레이어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21살이었던 1972년에는 다양한 밴드를 전전하며 세션으로 참가하고, 미국 남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였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코는 마침내 시야를 넓혀 리틀 비버, 폴 블레이, 팻 메스니 등 뮤지션들의 음반 작업에 참여한다. 그리고 1975년에는 뉴욕으로 건너가 재즈 퓨전 밴드인 웨더 리포트의 멤버가 되었다.자코가 웨더 리포트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웨더 리포트는 어느 음악대학에 초청 받아서 그 곳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곳에는 그 유명한 자코가 베이스 강사로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웨더 리포트의 리더 조 자비눌이 자코를 만나러 갔지만, 그들의 첫번째 대화는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끝나고 말았다[6]. 얼마 후, 당시 웨더 리포트의 베이시스트였던 알폰소 존슨[7]의 후임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왔고, 자비눌은 예전에 잠깐 만났었던 자코를 떠올리고 마침내는 그를 영입하였다.
이듬해 1976년, 자코는 데뷔 앨범 <Jaco Pastorius>를 발매하였다. 그리고 같은 멤버인 자비눌과 웨인 쇼터와 함께 "Metheny" 앨범을 레코딩하였다. 이 때 자코는 스테이지에서의 카리스마와 레코딩에서의 열광적인 모습으로 범세계적으로 언론과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였다.
그는 주로 프렛이 붙어 있지 않은(프렛리스) 일렉트릭 베이스를 연주하였다. 그의 베이스가 프렛리스가 된 이유는 연습하다가 베이스에서 나는 버징 소리가 짜증 나서 박혀있던 프렛을 그대로 칼로 뽑아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그의 사이코적인 행보의 인트로에 불과했다.
그의 연주는 언제나 도입부부터 놀랄 만한 멜로디와 리드미컬한 자유를 주어 '베이스'라는 악기의 가능성들을 보여줄 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Joni Mitchel의 1977년 걸작 'Hejira'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리드하는 많은 레코드에서 들을 수 있다.
자코는 1982년 웨더 리포트를 탈퇴한다.
2.3. 밴드의 리더, 그러나 마약 중독
자코는 1981년에 자신의 밴드 워드 오브 마우스(Word of Mouth)를 결성한다. 그리고 1982년 Warner Bros에서 자신의 두 번째 솔로 앨범 "Word of Mouth"를 세상에 내놓았다. 흥미롭게도 미국에선 실패했지만 일본에서는 흥행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밴드를 이끌고 순회 공연을 다녔다. 이때 25살의 천재 드러머 브라이언 멜빈이 합류하는 등 잘 나가는 듯 했다.하지만, 1984년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2명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술과 마약에 빠지면서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원래 양극성장애가 있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곧 관두었으며 결혼생활까지 실패하자, 술과 마약에 찌들어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8]
이후 술과 마약에 취한 나머지 각종 사고를 치고 다녔다. 술 먹고 술집에서 곁에 있던 손님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감옥에 가질 않나, 만취해서 남의 집을 멋대로 무단침입해서 감옥가는 일이 예사였다. 더 심하게는 술과 마약에 취해서 도로 한복판에서 옷을 홀랑 벗고 자다가 경찰한테 체포당하기까지 했다.
결국 자코는 정신 불안 증세로 감옥과 정신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하였다. 이로 인해 자코는 가뜩이나 안좋은 이미지가 더욱 나빠져 나락까지 추락한다. 후에 자코는 잠깐동안이라도 정신을 차렸는지 브라이언 멜빈과 함께 명반 "Standard Zone"을 레코딩한다. 하지만 이게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2.4. 죽음
1987년 9월 11일 자코는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의 공연에 난입했다가 쫓겨나고 플로리다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의 한 클럽인 미드나잇 보틀 클럽(Midnight Bottle Club)에 들어가려다 입구에서 쫓겨난다. 그 이후로도 들여보내달라고 문을 걷어차며 행패를 벌이다 클럽 문지기인 룩 하반[9]에게 폭행당한다. 이 여파로 자코는 얼굴 부분 두개골에 다수의 골절상 및 우측 안구 파열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결국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열흘 후인 1987년 9월 21일 뇌출혈로 사망하며 짧은 생애를 마쳤다. 향년 35세.3. 기타
3.1. 가족 관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기혼이었다. 2번 결혼했고 첫번째 부인 트레이시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10] 두었고[11] 두번째 부인 잉그리드와도 슬하에 2남[12]을 두었다.잉그리드와의 친아들 펠릭스 파스토리우스가 있는데, 그도 아버지를 이어 베이시스트로 활약 중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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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펠릭스 파스토리우스의 베이스 시연 |
쌍둥이중 한명인 줄리우스 파스토리우스는 드러머로 활동중이다. 참고로 그는 아들이 있는데 할아버지를 매우 닮았다.
3.2. 마커스 밀러와의 관계
자코에 관한 마커스 밀러의 회상 # 자코 사후 마커스 밀러는 어느 인터뷰 중 자코와 자신을 비교해달라는 요청에 나는 그의 연주를 들으며 음표 하나하나까지 모두 분석했고 따라하고자 했다며 선배 베이시스트에게 존경을 표했다. 자코와 마커스에 관한 여러 이야기 중 하나.3.3. 4현 베이스?
흔히 해외 베이스 커뮤니티에 가서 다현 베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자코는 4현밖에 안썼다! 4현만 있어도 니들보다 잘친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코는 하이C 셋팅의 5현 어쿠스틱 베이스도 썼다.(아래 사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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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4현 베이스가 베이스의 시작이고, 기본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다현 베이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쟤 봐라 겉멋만 들어가지고", "자코는 4현만 써도 너보다 잘침" 이라 말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다현 베이스는 말그대로 4현 보다 많은 수의 현으로 보다 폭넓은 음을 내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보다 폭넓은 음을 낸다는 핑계로 Low B, C, D만 연주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3.4. 여담
- 메탈리카의 베이시스트 로버트 트루히요가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팬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012년경 자코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Jaco를 프로듀스 하였고, 자코 사망 직전에 분실되었으나 2006년에 다시 발견된 자코의 베이스 Bass of Doom을 입수하여 유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는데 성공하였다. #
[1]
어느 인터뷰에서 밝히길 "음표 하나하나를 분석해서 따라했다."고 한 적도 있다.
[2]
두 사람은 매우 비슷한 삶을 살아서 자주 비교된다. 둘은 한 악기의 가능성을 크게 확장하였고, 마약 중독 경험이 있으며, 황당한 사인으로 요절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3]
다만 프렛리스 베이스의 창시자는 자코가 아니며 그 이전에도 프렛리스 일렉트릭 베이스는 있었고, 연주자도 있었다.
[4]
이때 속성으로 기타, 건반을 배웠다고 한다.
[5]
나무로 만든 악기는 습도에 매우 취약하다. 나무는 성격상 습기를 머금었다 뱉었다 하는데 그 와중에 변형이 생기기 때문. 그래서 악기 제작자들은 바디나 넥에 탑이나 피니쉬를 올려 변형을 막기도 한다. 하지만 콘트라 베이스의 경우 나무가 그대로 드러나는 악기다.
[6]
이 일화는 남무성의 만화 <Jazz It Up>에서 다뤄지는데,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다.
[7]
팀의 오리지널 베이시스트 미로슬라프 비토우스에 이은 두번째 베이시스트였다. 이후 그는 퓨전 락 그룹 ‘산타나’의 베이시스트가 된다.
[8]
이 무렵의 인터뷰 영상
#, 정상적인 인터뷰가 거의 불가능해서 억지로 달래가며 진행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9]
자코가 사망한 후 2급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상충 문제로 논거가 약화되어 피해자 가족의 동의 하에 형량 조정에 합의해 21개월의 징역형과 5년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자코의 전처인 잉그리드는 하반이 받게 될 형량보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했다. 하반은 복역 4개월 뒤 가석방된다. 이는 당시 주 교도소 복역기간과 직업 프로그램, 당시 감옥 과밀을 완화하기 위한 일시적 감형 등이 적용된 결과로, 이후 잉그리드는 이에 대해 아버지를 잃은 아이 네 명에 대해 각 한 달씩 형이 부과된 꼴이라며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면 형량 조정에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힌다.
[10]
아들은 존이고 딸은 매리다. 솔로 2집에는 John and Mary 라는 곡을 만들어 실었고, 거기엔 존과 매리의 육성까지도 녹음했다.
[11]
이 사람 첫 결혼을 19세에 했다.
[12]
쌍둥이
[13]
펠릭스 파스토리우스는 밴드 Yellow Jackets 소속이었으며, 이 밴드 소속으로 2014년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 때 내한한 적이 있다. 2015년 이후로는 Yellow Jackets에서 나와 따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