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00:02:48

이태현(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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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000><colcolor=#ffffff> 이태현
李太鉉 | Lee Tae-hyun
파일:이태현용인대교수.jpg
출생 1976년 1월 17일 ([age(1976-01-17)]세)
경상북도 김천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의성고등학교 (졸업)
용인대학교 무도대학 (격기지도학 / 학사)
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1])
용인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박사[2])
현직 용인대학교 무도대학 무도스포츠학과 교수
종목 씨름
소속 청구건설 씨름단 (1993~1997)
현대삼호중공업 코끼리 씨름단 (1998~2006)
구미시청 씨름단 (2009~2011)
신체 196cm, 138kg, O형
가족 배우자 이윤정(2003년 결혼)
아들 이승준(2005년생)
딸 이하경(2010년생)
1. 개요2. 선수 경력
2.1. 씨름 선수 경력(~2006년)2.2. 종합격투기 선수 경력(2006년~2008년)2.3. 씨름 복귀(2009년~2011년)
3. 우승 목록4.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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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씨름 선수. 현재는 용인대학교 무도스포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 선수 경력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씨름판을 지배했던 천하장사 출신으로 별명은 '모래판의 황태자' 혹은 '모래판의 지존'이다. 2006년 7월 씨름 은퇴를 선언한 뒤, 일본 종합격투기 단체 프라이드에 진출했으나 큰 실패를 맛보고 씨름판으로 복귀했다. 2009년부터 2년 가량 현역 씨름 선수로 활약한 후 2011년 3월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민속씨름 데뷔 첫 해인 1994년 부터 1차 은퇴를 선언한 2006년 까지의 전적은 630경기 472승 158패( 승률 74.9%)로 역대 최다 전적, 최다승 기록을 보유했다. 2006년까지 집계된 역대 총 상금 역시 5억 9,000여 만원으로 1위. 씨름판으로 복귀한 후 2009년 1월부터 은퇴할 때까지 총 32경기에 출전해 25승 7패( 승률 78.1%)의 전적을 남겼다. 복귀 후의 전적까지 합친 최종 승률은 75.1%(497승 165패)를 기록했다.

천하장사 3회(1994, 2000, 2002), 지역장사 12회, 천하대장사 1회(1994), 백두장사 20회 등을 포함하여 공식 대회에서 총 40회의 장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특히 백두장사 20회 기록은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의 백두장사 18회를 뛰어넘는 대기록이다. 또한 민속씨름 최우수선수(MVP)로 총 5차례 선정(1994, 1995, 2000, 2002, 2003) 되었고, 대한씨름협회가 시상하는 2010년 최우수 씨름 선수로 선정되었다.

선배인 '슈퍼두꺼비' 김정필과 '천재 씨름꾼' 백승일을 비롯하여, 동시대의 라이벌인 '골리앗' 김영현, '봉팔이' 신봉민, '들소' 김경수,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 그리고 2003년에 민속씨름에 데뷔한 후배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 등 커리어 동안 쟁쟁한 선수들이 즐비했으나, 큰 체격에 기술까지 두루 겸비한 완전체로서 가장 많은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이태현이 이만기- 강호동을 잇는 최고의 씨름 선수로 평가받는다. 야구로 비유하면 이승엽 같은 슈퍼스타였으며 공교롭게도 이태현과 이승엽 모두 나이도 동갑에 활동 시기도 겹치며 대경권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3]

2.1. 씨름 선수 경력(~2006년)

의성고등학교를 거쳐 1993년 9월 계약금 3억원에 청구건설 씨름단과 입단 계약을 체결하고 1994년 민속 씨름에 데뷔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7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는 등 고교 시절 그 연령대의 지존으로 통했으며, 민속씨름에 첫 선을 보인 1994년부터 두각을 나타내더니 9월에 열린 제32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절친이자 라이벌인 백승일[4]을 꺾고 처음으로 천하장사에 올랐다.

하지만 이태현이 천하장사로 결정된 과정은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5판 3선승제로 치러지는 결승전에서 12판(1시간 25분)의 지루한 승부가 펼쳐진 끝에, 계체를 통해 체중이 더 적게 나가는 이태현이 천하장사로 결정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3번째 판을 전부 비긴 뒤 4번째 판은 백승일이 이기고 5번째 판에서는 이태현이 승리하여 1:1이 되자,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두 선수가 공격을 들어가면 되치기로 당한다는 생각에 섣불리 기술을 못 걸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관중들로부터 욕설과 야유가 쏟아졌다.[5] 다섯 판 내리 승부가 나지 않자 10번째 판이 끝난 후 연맹에서는 긴급 이사회를 소집했고, 12번째 판까지 승패를 가리지 못할 경우 두 선수의 체중을 측정하여 더 가벼운 쪽을 승자로 한다는 황당한 규칙을 신설하였다. 12번째 판이 무승부로 끝나면서 계체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당시 백승일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몸무게를 좀 더 가볍게 유지하던 이태현이 결국 계체승[6]을 거두었다. 이후 한동안 이태현에게는 저울장사라는 오명이 따라붙었고, 백승일은 의욕을 잃고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1994년 10월에 생애 첫 백두장사에 등극한 이태현은 이듬해인 1995년 지역장사[7] 5개 대회 중 4개를 석권하고 백두장사도 4차례나 차지하는 등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10월 원주대회까지 1995년 한 해 동안의 승률은 무려 90.8%(65전 59승 6패)였고, 역대 최다인 30연승[8]의 기록을 수립했다. 하지만 11월 천하장사 대회를 앞두고 오른쪽 무릎 부상이 심각해져 제 기량을 발휘하기 힘들었고, 한 해를 지배하고도 정작 가장 중요한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8강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1996년과 1997년에는 '들소' 김경수, '봉팔이' 신봉민과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여 라이벌리를 이루었는데, 셋 중 우승 횟수 및 승률이 가장 좋은데다 훤칠한 외모까지 곁들여진 이태현은 '모래판의 황태자'라는 칭호을 얻으며 최고의 스타로 우뚝섰다. 그러나 1996년에는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에서 김경수에 1:3으로 지면서 준우승에 그쳤고, 1997년에는 8강에서 신봉민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천하장사에는 오르지 못했다.

1998년부터는 무지막지한 밀어치기를 앞세워 급부상한 '골리앗' 김영현이 치고 올라왔고, 2년 간 이태현과 김영현의 강력한 양강 구도가 형성되어 사실상 둘이 씨름판을 양분하다시피 했다. 1998년과 1999년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2차례 모두 김영현과 결승전에서 맞닥뜨렸는데, 2년 연속 승자는 김영현이었고 이태현은 2인자에 머물러야 했다.

각종 대회에서 수차례 황소트로피를 들어 올리고도 유독 천하장사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이태현의 생애 2번째 천하장사 타이틀 획득은 2000년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5월 하동 대회에서 당한 무릎 부상으로 5개월간 시합에 나서지 못하는 등 시즌 내내 컨디션이 좋지는 못하였으나, 천하장사 대회 4강에서 김영현을 2:0으로 물리친데 이어 결승전에서는 천적인 김경수[9]를 3:0으로 완파하며 천하장사 등극에 성공했다.

2001년 5차례나 준우승에 머물며 무관에 그쳤던 이태현은 절치부심한 2002년을 다시 한 번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3월 용인 대회에서 백두장사와 지역장사를 독식함으로써 부활을 선언했고, 이후 민속씨름 사상 최초로 400승 고지를 밟는 등 최고 승률로 승승장구한 끝에 자신의 통산 3번째 천하장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2003년에도 3차례 백두장사를 차지하며 전년도의 기세를 이어갔으나, 천하장사 대회 4강에서 김영현에게 패해 2연패 달성에는 실패했다. 2004년에는 7월 훈련 도중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어 연말에 열리는 천하장사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2005년과 2006년에 백두장사를 각각 1회씩 더 추가해 이만기와 타이(통산 18회)를 이룬 이태현은 2006년 7월 은퇴를 선언했다.

2.2. 종합격투기 선수 경력(2006년~2008년)

전적: 3전 1승 2패

그러나 2006년 한국씨름연맹[10]의 막장 행정, 세력 간 정치 다툼으로 흑화가 되고 최홍만 K-1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자, 이태현은 소속팀 현대삼호중공업과 2012년까지 맺었던 계약을 파기하며 종합격투기에 뛰어든다.[11] 이태현은 국내 복귀 후 인터뷰에서 "그저 관중이 있는 곳에서 시합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었는데, 종합격투기의 화려한 조명과 관중들의 환호, 매스컴의 관심 등을 보면서 천하장사 타이틀이고 뭐고 그저 그 무대에 대한 선망만이 남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파일:external/file2.nocutnews.co.kr/11031414984_60400010.jpg

하지만 2006년 9월에 있던 Pride 데뷔전에서 브라질 히카르도 모라이스[12]에게 1라운드 8분 8초만에 TKO패를 당했다.(얼굴에 싸커킥 '짝!') 경기는 그래도 씨름선수답게 여러번 테이크 다운을 성공시켰지만 그때마다 파운딩에 대한 이해도 부족으로 주먹에 크게 힘이 실리지도 않아 성공시킨 후에도 큰 이득을 못봤다. 결국 모라이스가 전체적으로 타격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둘 모두 체력이 빠진 상태에서 이태현이 기권의사를 밝혔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이태현은 스파링과 실전 경기는 달랐다면서 자신의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다는 걸 절감하고[13] 도저히 안되겠으니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는 생각에 기권을 했는데, 그 이후 평생 못 겪어볼 악플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이후 절치부심해서 당대 최고의 MMA 선수였던 효도르의 체육관으로 전지훈련을 떠났고, 타격 훈련을 중점으로 종합격투기 선수로 거듭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며 MMA를 수련했다고 한다. 첫 경기의 1년 후 10월에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K-1 히어로즈 대회에서 일본의 야마모토 요시히사를 미들킥을 적중시키고 다운을 받아내서 백을 잡고 파운딩을 날리며 1회 TKO로 꺾어 데뷔 첫 승을 거두면서 효도르 체육관에서의 전지훈련 효과를 보는듯 했다.[14] 2008년 다음 상대는 다름아닌 알리스타 오브레임. 당시 오브레임은 서서히 약크업 중이었고, 결국 1라운드 KO패를 당했다. 경기 내용은 타격에선 열세라고 생각해서 그나마 장기인 그래플링으로 끌고가려 테이크다운을 시도했지만 오브레임은 꿈쩍도 하지않았고 클린치에서 니킥으로 얻어맞자 이태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15] 얼마 지나지 않아 강력한 양훅을 허용하며 의식이 날아가 고꾸라지는 와중에 카운터 니킥까지 먹이며 이태현을 36초 만에 완전히 잠재웠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이 때 당시 경기 비하인드에 대한 썰을 격투기 기자 이교덕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 라이브에서 풀었는데, 당시 이태현 매니저가 이태현 상대로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을 고를 수 있게 되어서 이교덕 기자에게 문의했는데 이 매니저가 상대방 선수 이름부터 제대로 파악 못한 상태로 이교덕 기자에게 문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교덕 기자는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 알리스타 오브레임인 줄 알지 못했고 그래서 알리스타 오브레임을 무명의 선수로 추측했다고 한다. 이교덕 기자 이야기로는 당시 알리스타 오브레임인 걸 확실히 알았다면 무조건 경기를 말렸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다른 한 명의 선수가 러시아계 이름이었기에 이태현 매니저는 무명의 선수로 오해한 알리스타 오브레임을 상대 선수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태현의 인터뷰에서는 K-1 측에서 몇몇 후보를 추려줬고 최고와 붙어봐서 자기견적을 내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으나 이교덕 기자의 썰과 연결시켜볼 때 처음 선택할 때는 누군지 모르고 지목했고 그 이후 일본 측에서 오브레임에 대해 이야기하며 말렸지만 이태현이 호기로서 시합을 강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16] 결국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종합격투기에서 거둔 전적은 1승 2패를 기록했다. 이태현의 타고난 힘과 씨름을 응용한 기술로 상대를 테이크 다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결국 타격부분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던게 실패의 요인이었다.

어쨌든 대한민국 최고의 천하장사가 종합격투기에서 엄청난 굴욕을 겪자, 씨름 팬들은 비록 이태현이 씨름을 저버리고 종합격투기로 전향해서 비난했을지언정 이태현의 고전 앞에서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씨름계의 전설인 이만기는 이 장면을 보며 오열했다고 한다.[17] 씨름계의 흑화와 더불어 씁쓸하면서도 슬픈 장면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의 종합격투기 팬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선수이자 인재가 이태현이다. 천연스테로이드의 덕을 본 최홍만을 제외하고 가장 확실하게 내추럴 헤비급의 피지컬을 갖춘 선수가 이태현 선수였다. 3전째에 당시 약물 증량 중이었던 오브레임을 만나지 않고 차근차근 밑바닥부터 단계를 밟고 올라왔다면 최소 아시아권의 MMA무대는 호령할 수 있는 피지컬과 발전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도 많은 종합격투기 팬들이 오브레임전 이후 스스로 한계를 단정짓고 씨름판으로 돌아간 이태현의 선택에 아쉬움을 갖고 있다.

2.3. 씨름 복귀(2009년~2011년)

결국 종합격투기를 떠나 초등학교 때 은사인 구미시청 김종화 감독의 권유로 모래판으로 돌아왔고, 2009년 1월 설날장사 대회를 통해 복귀전을 치렀다. 복귀 첫 해인 2009년에는 비록 정상에 오르지 못했으나, 10월 백두장사 및 12월 천하장사 대회에서 각각 준우승을 차지해 다시 돌아온 씨름판에 잘 적응한 모습을 보여줬다.

2010년 들어서는 1월 설날장사에 등극하며 약 4년 만에 우승 꽃가마를 탔고, 이후 백두장사 2회를 더 추가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백두장사 최다 기록을 20회로 갱신했다. 2011년 2월 설날장사 대회 결승에서 이슬기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고, 이는 이태현의 현역 마지막 시합이 되었다.

복귀 후 2년 여간의 전적은 25승 7패(승률 78.1%)로 상당히 우수했으며, 2010년에는 '최우수 씨름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다만, 4번의 공식 대회 중 3번이나 우승하며 컨디션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0년, 구제역의 여파로 12월 안동에서 열릴 예정이던 천하장사 대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커리어에 천하장사 타이틀을 더 추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 건 아쉬움으로 남을 따름이다.

2011년 3월에 전격 은퇴를 선언했고, 같은 해 11월 27일 자신의 고향인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치러진 천하장사 씨름대축제에서 공식 은퇴식을 가졌다.

3. 우승 목록

천하장사(3회)
구분 대회 날짜 장소
1 32대 1994년 9월 21일 부산 사직체육관
2 38대 2000년 12월 10일 안양체육관
3 40대 2002년 11월 24일 구미 박정희체육관

백두장사(20회)
구분 대회 날짜 장소
1 81대 1994년 10월 23일 진주시 생활체육관
2 82대 1995년 4월 3일 부산 구덕체육관
3 83대 1995년 5월 6일 여수 진남체육관
4 85대 1995년 9월 10일 광주 구동체육관
5 86대 1995년 10월 13일 원주 치악체육관
6 90대 1996년 9월 27일 대구 실내체육관
7 93대 1997년 4월 4일 충주 실내체육관
8 97대 1998년 3월 6일 양평체육관
9 101대 1998년 10월 6일 대구 실내체육관
10 102대 1999년 4월 16일 합천 실내체육관
11 107대 2000년 3월 17일 장흥체육관
12 119대 2002년 3월 15일 용인 명지대체육관
13 121대 2002년 5월 9일 강진 스포츠센터
14 125대 2003년 3월 16일 영천 실내체육관
15 127대 2003년 5월 11일 보령 대천체육관
16 129대 2003년 10월 20일 순천 팔마체육관
17 136대 2005년 12월 10일 부산 기장체육관
18 137대 2006년 3월 25일 안동체육관
19 2010년 6월 19일 문경체육관
20 2010년 9월 23일 구미 박정희체육관

지역장사(12회)
구분 대회 날짜 장소
1 1회(부산장사) 1995년 4월 4일 부산 구덕체육관
2 2회(여수장사) 1995년 5월 8일 여수 진남체육관
3 3회(청주장사) 1995년 6월 7일 청주 실내체육관
4 4회(광주장사) 1995년 9월 12일 광주 구동체육관
5 10회(대전장사) 1996년 10월 28일 대전 충무체육관
6 11회(구리장사) 1997년 3월 10일 구리체육관
7 12회(충주장사) 1997년 4월 7일 충주체육관
8 15회(울산장사) 1997년 7월 14일 울산 KBS홀
9 18회(여수장사) 1998년 5월 5일 여수 진남체육관
10 21회(합천장사) 1999년 4월 16일 합천 실내체육관
11 22회(삼척장사) 1999년 5월 24일 삼척체육관
12 38회(용인장사) 2002년 3월 17일 용인 명지대체육관

기타 장사(5회)
구분 대회 날짜 장소
1 제3회 천하대장사 1994년 11월 20일 마산 실내체육관
2 민속씨름 독일대회 1995년 7월 8일 독일 쾰른 스포츠홀
3 96 설날장사 1996년 2월 20일 서울 장충체육관
4 98 백제장사 1998년 10월 12일 부여 구드래광장
5 2010 설날장사 2010년 2월 15일 서울 KBS 88체육관

4. 은퇴 이후

2001년 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체육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2006년 2월 용인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대중의 시선에서 다소 멀어졌던 씨름의 부활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은퇴 직후인 2011년 3월 모교 용인대학교 격기지도학과의 씨름 전공 교수로 정식 임용된 후 용인대 씨름부 감독으로 재직 중에 있으며, 이와 함께 2014년부터는 이만기의 뒤를 이어 KBS에서 씨름 해설위원으로[18] 활동하고 있다. 아울러 아육대에도 출연해 여자 씨름 해설을 했으며, 출전자들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씨름 홍보대사로 활동(2019.5.8~2021.5.7) 했고, 2019년부터 사단법인 인류무형문화유산 씨름진흥원의 이사장을 맡아 씨름의 부흥과 세계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2022년 7월 19일부터 9월 13일까지(매주 화요일) tvN 스토리에서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인 씨름의 여왕에 감독 겸 해설위원으로 출연했다.

[1] 석사 학위 논문: 민속 씨름경기의 변천 과정에 관한 연구(2001) [2] 박사 학위 논문: 민속씨름 선수들의 체급별 유·무산소성 운동능력과 최대운동 후 회복기 산화적 스트레스 차이에 관한 연구(2006. 2) [3] 물론 이태현은 빠른 76년생이라서 이승엽보다는 한살 형이다. [4] 2004년 LG투자증권 씨름단 해체 사태 후 순천시청에서 잠시 뛰다가 2005년 2월 설날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다. [5] 당시 경기를 다시 보면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두 선수가 2분 가까이 가만히만 있는게 전부였다. 관중과 시청자는 물론이고 아나운서와 이만기 해설마저 답답해 했으며 심지어 부심은 그 광경을 보고 욕을 하기도 했다. [6] 계체 결과 이태현은 132.95kg, 백승일은 135.85kg로 측정되었다. [7] 1년에 3번 있었던 천하장사 대회가 1995년부터 1년에 1번으로 줄어들고, 그 대신 지역장사 대회가 신설되어 1년에 5~6회 열렸다. 지역장사 대회는 2002년을 끝으로 폐지됐으며, 8년 간 총 43차례 개최됐다. [8] 설날장사(2월) 2승 + 부산대회(4월) 13승 + 여수대회(5월) 10승 + 청주대회(6월) 5승 [9] 유일하게 상대 전적에서 밀리는 선수로, 2006년 설날 대회까지 27승 30패로 열세였다. [10] 흔히 (프로)씨름을 관장하는 단체가 대한씨름협회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됐다. 쉽게 말하자면, 야구로 치면 대한씨름협회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한국씨름연맹은 한국야구위원회와 같은 위치의 단체들이다. [11] 이 때 소속 팀인 현대삼호중공업이 이태현에게 계약파기에 대한 소송을 걸었다가 취하했을 정도로 이태현은 종합격투기 진출 선언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12] 러시아, 일본 등의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활약했으며 초기에는 7연승으로 전성기를 달렸으나 PRIDE에서는 마크 콜먼, 에밀리아넨코 알렉산더 등에게 연패를 당하며 은퇴 기로에 놓인 선수였다. 특히 알렉산더에게는 경기 시작 12초만에 KO를 당하고 바닥에 고꾸라지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며 나이도 당시 39세로 노쇠한 상태로 이태현에게는 매우 좋은 떡밥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이태현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종합격투기에서 은퇴했다. [13] 그도 그럴 게 전향 선언을 한 지 1달 만에 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 정도면 기본기라도 겨우 갖추면 다행이다. [14] 야마모토 요시히사는 비록 패가 더 많은 파이터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 전적 30전이 넘는 베테랑이었다. [15] 그 와중에 오브레임은 여유가 생긴 듯 피식 웃고 있던 것이 압권... [16] 물론 오브레임 지목 이후 오브레임의 실체를 알게 됐지만 시합상대를 바꾸거나 무를 수 없어서 그렇게 인터뷰에서 이야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더군다나 이 때의 오브레임은 프라이드 미들급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온갖 금지약물로 풀도핑을 하며 몸을 개조하던 단계였고 이때 몸무게가 이미 110kg 대였다. 풀도핑 상태의 무시무시한 쇳덩이 주먹에 맞았다. [17] KBS가 2011년 추석특집 2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던 '천하장사 만만세'에서 이같이 술회했다. 당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씨름이 얻어터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이만기는 은퇴 당시 이종격투기에서 제안이 있었지만 조상 대대로 쌓아 온 것이 무너질까 우려해 응하지 않았다고 아는형님에서 밝혔으니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18] 해설 데뷔 당시 중계 파트너가 스포츠 중계의 달인으로 알려진 유수호 캐스터였다. 다만 유수호 캐스터의 주 전공은 사실 씨름이 아닌 야구 배구다. 고령의 유수호 캐스터가 씨름 중계에 나섰던 것도 당시 KBS 양대 노조가 동시 총파업을 하고 있어서 인력이 부족했기에 정년 퇴임한 유수호 캐스터를 불러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