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8:56:11

이생규장전


1. 개요2. 특징3. 줄거리(전문)

1. 개요

호귀야, 나를 잡아먹어라. 차라리 승냥이의 뱃속에 백골을 묻었으면 묻었지, 내 어찌 개돼지만도 못한 네놈의 짝이 되겠느냐!



15세기 조선 세조 김시습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소설. 금오신화에 포함되어 있다. 이생과 최랑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작품이다. 제목 '이생규장전()'은 성이 이씨인 선비가 담장을 엿보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2. 특징

자유연애, 최랑이 이생과 부부로 살다 죽은 후 여귀로 화하여 다시 나타나는 전기적 성격, 비극적 결말 등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한 삽입시를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 중간에 배치하여 과거사건을 요약하고 인물의 심리를 제시한다.

3. 줄거리(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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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개성 낙타교 밑에, 이생이라는 18세의 총각이 살았다. 얼굴이 말끔하고 재주가 비범하며 학문에 뜻이 있어, 국학에 다닐 때 길가에서도 부지런히 글을 외우곤 하였다.

선죽리에 최랑이라는 귀족 집안의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17세였고, 태도가 아름답고 수예에 익숙하며 시문에 능통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을 찬미하였다.

이생이 학교에 가려면 최랑의 집 북쪽 담 옆을 지나가야 했다. 어느 날 우연히 담장 안을 엿보니, 을 맞아 만발하였고 벌과 새들이 노래 부르는 사이로 자그마한 다락이 하나 보였다. 어여쁜 아가씨가 수를 놓다가 바늘을 잠깐 멈추고, 시를 읊는 것이었다.
사창(紗窓)에 홀로 비겨 수놓기도 귀찮구나. 꽃 숲의 꾀꼬리 다정도 하네. 마음에 부는 봄바람 원망하고자, 바늘 멈추고 생각에 잠겼도다.

이생은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담은 높고 안채가 깊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궁리 끝에 흰 종이에 시를 적어 기와 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졌다.
고운 임 외로운 꿈 수고롭게 하지 마오. 행여 운우되어 양대에서 만나보세.

최랑이 시녀 향아를 시켜 가져다 보니, 이생이 보낸 시였다. 최랑은 기뻐하며 얼른 종이에 시를 써서 담 밖으로 던져주었다.
님이시여, 의심 마오. 황혼 가약 정합시다.

이생은 날이 어두워지자 최랑의 집으로 갔다. 복숭아나무 가지 하나가 담 위로 휘어지며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생은 그 줄을 잡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 최랑은 향아와 함께 꽃을 머리에 꽂고 시로 맞는다.
복숭아 가지 속 꽃 피어 화려하고, 원앙새 베개 위 달빛도 곱구나.

이생이 답한다.
어쩌다 봄소식 누설되면 무정한 비바람에 가련하지 않을까.

최랑은 얼굴빛을 바꾸며 말했다.
당신과 부부가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 하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마음이 태연한데, 대장부 의기로 그런 염려까지 하겠나이까? 나중에 규중의 비밀이 누설된다 하더라도, 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녀는 향아에게 과일을 가져오게 했다. 집안은 고요하고 인기척도 없었다. 이생은 물었다.
이생: 이곳은 어딥니까?
최랑: 예, 뒷동산 작은 다락 밑입니다. 부모님이 무남독녀인 저를 유난히 귀여워해, 따로 연못 가운데 이 집을 지어주시고 향아와 함께 놀도록 하셨습니다.

최랑은 이생에게 술을 권하며 또 시를 읊는다.
부용못 깊은 곳에 솟은 난간 굽어보니, 꽃다발 사이에서 속삭임 들리네. 향기로운 안개 끼고 봄빛 화창할 때, 새 곡조 지어 사랑 노래를 부르누나.

이생도 서슴지 않고 화답한다.
신선을 잘못 찾아 무릉도원에 왔구나. 비바람 불지 마오, 나란히 핀 이 꽃들에…….

주연이 끝나자 그녀는 이생에게 말했다.
작은 인연이 아니오니, 저와 함께 백년의 기쁨을 이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둘은 북쪽에 있는 들창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문구류와 책상이 잘 정돈되어 있고, 한쪽 벽에는 연강첩장도와 유황고목도가 있는데 모두 명화였다.

다른 한쪽 벽에는 사시경 4수가 있는데, 자체가 매우 곱고 단정하였다. 또 다른 한쪽에는 별당이 있는데, 깨끗하고, 장 밖에 사향을 태우는 냄새가 풍기고, 촛불이 대낮처럼 밝았다. 이생은 그녀와 더불어 즐거움을 만끽하며 며칠 동안 유숙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이생은 최랑에게 말했다.
옛 성인 말씀에 '어버이 계시오면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방향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소. 내 어버이를 떠나온 지 사흘이 지났으니, 어버이께서 응당 문에 비겨 바라실 것이오.

최랑은 두말 없이 이생이 돌아가는 것을 응낙하였다. 그날 이후 이생은 저녁마다 그녀를 만났다. 하루는 아버지가 이생을 꾸짖었다.
아침에 나가 저물어야 돌아옴은 옛 성인의 말씀을 배우려 함인데, 황혼에 나가 새벽에 돌아옴은 어찌 된 일이냐? 분명 못된 행실을 배워 남의 집 담장을 뛰어넘는 것이렷다. 이 일이 남의 눈에 띄면 모두 내가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지 못했다고 책망할 것이요, 그 처녀 또한 너 때문에 문호를 더럽힐 것이니, 죄가 적지 않을 것이다. 어서 빨리 영남 농촌으로 내려가, 일꾼을 데리고 농사일을 감독하거라. 함부로 올라오지 말지어다.

아버지는 다음날 바로 아들을 울주[1]로 내려보냈다. 최랑은 저녁마다 화원에서 기다렸으나, 이생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병이 난 것 아닌가 싶어서 향아를 시켜 알아보니,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듣고 영남 농촌으로 내려간 지 벌써 여러 달 되었다 한다. 최랑은 침상 위에 쓰러져 일어나질 못했다. 음식도 안 먹고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놀라 병의 증세를 물었으나, 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는 우연히 대바구니를 들추다가 딸이 이생과 함께 주고받은 시를 보고는, 그제야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아아, 하마터면 귀중한 딸을 잃을 뻔했구나." 부모는 딸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생이 누구냐?" 최랑은 더 숨기지 못하고 솔직히 고백한다.
저를 고이 길러 주신 아버님과 어머님께 어찌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남녀가 서로 사랑을 느낌은 인간의 정리로서 가장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혼기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시경”의 ‘주남(周南) 편’에도 나타나고, 여자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흉하다는 것은 “역경”에 경계하여 있습니다. 저는 냇버들 같은 연약한 자질로서 용색이 시드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옆 사람의 비웃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새삼 덩굴과 여러 이끼가 다른 나무에 의지해서 살듯이 벌써 위당의 처녀 행세를 하게 되었으니, 죄가 이미 가득 차 수치가 가문에 미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장난꾸러기 도련님과 정을 통한 후에야 도련님께 대한 원망이 첩첩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저의 연약한 몸으로 괴롬을 참고 살아가려니 사모하는 정은 날로 깊어 가고 아픈 상처는 날로 더해 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한 맺힌 귀신으로 화해 버릴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남은 생명이나 보전되겠습니다만, 만약 저의 이 간곡한 청을 거절하신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도련님과 저승에서 다시 함께 만날지언정 절대로 다른 가문에는 시집가지 않겠습니다.

그 뜻을 안 부모는 더 이상 병의 증세를 묻지 않고, 중매의 예를 갖추어 이씨에게 보내었다. 이씨는 먼저 최씨의 문벌을 물은 뒤 말했다.
우리 아이가 어려서 바람이 났다 하여도, 학문에 정통하고 얼굴이 유달라 장차 대과에 급제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 것이니, 함부로 혼사를 정하지 않겠소.

중매인은 이 말을 최씨에게 전하였다. 최씨는 다시 중매인을 이씨에게 보내었다.
중매인: 귀댁 도령의 재화가 뛰어나다 하니, 빨리 만복의 날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씨: 귀족 댁에서 무엇을 보고 가난한 선비를 취하겠소? 아마도 일 벌이기 좋아하는 이가 나의 문벌을 과장되게 소개하여 속이려는 것 아니오?

중매인이 다시 돌아와 최씨에게 알리니, 최씨는 또 그를 이씨에게 보내었다.
모든 예물과 의장을 저희 집에서 담당할 것이오니, 다만 좋은 날을 택해 화촉의 예를 치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씨는 최씨의 간절한 요청에 마음을 돌려, 곧 사람을 울주에 보내어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희보를 접한 이생은 기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여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깨진 거울 합쳐지니, 이 또한 인연이라. 은하의 오작인들 이 가약을 모를소냐……

이생을 그리워하던 최랑은, 이생의 시를 받아보고 병이 나아 답시를 지었다.
악연이 호연인가. 옛 맹세 이루련다. 아이야, 날 일으켜라. 꽃비녀 정리하게……

둘은 혼례를 치렀다. 부부는 서로 사랑과 공경을 지켰다. 그 다음 해에 이생은 대과를 거쳐 높은 벼슬에 올라, 이름을 세상에 날렸다. 신축년에 홍건적이 서울을 노략하자 상감 왕비께서는 복주[2]로 옮겨가셨다. 놈들이 건물은 파괴하고 인축을 전멸시키매, 백성은 동서로 분산되었다. 이생 가족도 산골에 숨었는데, 도적 하나가 칼을 들고 뒤를 쫓아왔다. 이생은 겨우 도망하였으나, 최랑은 잡혀 정조를 빼앗길 처지에 이르렀다. 최랑은 소리쳤다.
이 창귀놈아! 내가 죽어 시랑의 밥이 될지언정, 네놈에게 몸을 주겠느냐!

도적놈은 그녀를 무참하게 죽여버렸다.

이생은 온 들판을 헤매다가, 도적들이 이미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찾아갔다. 최랑의 집에 이르니, 쓸쓸하고 그 주위에 쥐들이 우글거리고 새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는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다락 위에 올라가 눈물을 삼키며 한숨을 깊이 쉬었다. 날이 저물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옛일을 회고하니, 모든 게 꿈 같았다.

밤이 되어 달빛이 들보를 비추자, 낭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최랑이었다. 이생은 그녀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의아하게 생각지 않고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하여 생명을 보전하였소?" 최랑은 그의 손을 잡고 통곡하며 말했다.
저는 원래 귀족의 딸로서 어릴 때에 모훈을 받아 수놓는 일과 침선에 열심이었는데, 어느 날 당신이 복숭아꽃 핀 담장 위를 엿보셨을 때 저는 스스로 벽해의 구슬을 드려 꽃 앞에서 한번 웃고 평생의 가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횡액을 만나, 정조를 잃지는 않았으나, 육체는 진흙탕에서 찢겼사옵니다. 절개는 중하고 목숨은 가벼워 해골을 들판에 던졌으나, 혼백을 의탁할 곳이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원통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이승에 다시 태어나 남은 인연을 맺어 옛날의 굳은 맹세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생은 기뻐하며 "그것이 원래 나의 소원이오."라고 했다. 둘은 재미있게 말을 주고받았다. 이생은 또 물었다.
이생: 가산은 어떻게 되었소?
최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골짜기에 묻어두었습니다.
이생: 그럼 우리 두 분 어버이의 유골은 어찌 되었소?
최랑: 하는 수 없어 그냥 버려두었습니다.

두 사람의 기쁜 정은 옛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이튿날 그들은 옛날 함께 살았던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금은재보를 찾고, 또한 그것을 팔아 부모의 유골을 거두어 오관산 기슭에 합장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 이생이 벼슬을 하지 않고 최랑과 함께 살림을 차리니, 뿔뿔이 흩어졌던 노복도 다시 모여들었다. 이생은 그 후 인간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 문을 굳게 닫고 최랑과 함께 금슬을 누렸다. 어느 날 저녁, 최랑은 이렇게 말했다.
최랑: 세상일이 덧없어 3번째 가약도 곧 끝나게 되니, 이 슬픔은 또 어찌하오리까?
이생: 그게 무슨 말이오?
최랑: 저승길은 피할 수 없습니다. 천연이 정해진 상태에서 이 몸 잠깐 당신과 만났사온데, 어찌 더 이상 산 사람을 유혹할 수 있겠습니까?

최랑은 향아를 시켜 술과 과일을 들이고, 옥루춘 한 가락을 불렀다. 최랑은 눈물이 흘러 곡조를 다 이루지 못하였다. 이생도 슬퍼하며 말했다.
이생: 내 당신과 함께 지하로 돌아갈지언정, 어찌 무료하게 여생을 홀로 보존하겠소?
최랑: 당신의 명수는 아직 남았고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에 실렸사오니, 미련을 가지면 명부의 법령에 위반되어 더 힘든 죄과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제 해골이 아직 그곳에 흩어져 있사오니, 은혜를 베푸신다면 사체나 잘 거두어주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최랑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이생은 아내가 부탁한 대로 그녀의 해골을 거두어 부모의 묘 옆에 장사지낸 후, 곧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감탄하며 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칭찬했다.[3]
[1] 지금의 울산광역시 [2] 경상북도 안동시 [3]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 배규범, 주옥파, 2010. 1. 29., 도서출판 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