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파울루스 Julius Paulus[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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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율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파울루스 프루덴티스시무스 Julius Cornelius Paulus Prudentissimus |
출생 |
미상 로마제국 본국 이탈리아 파타비움(오늘날 이탈리아 파도바]) |
사망 | 미상 |
가족 |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딸) |
아그노멘 |
프루덴티스시무스 Prudentissimus |
경력 |
파피니아누스 오디토리움 위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자문회의 위원 근위대장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콘실리움[2] 위원 |
직업 | 변호사, 법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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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근위대장, 법학자. 파피니아누스, 울피아누스와 함께 세베루스 왕조를 대표하는 법학자 3대장 중 한 명이다. 그는 319개의 법학 출판물을 남겼고, 다른 법학자들의 주장을 분석해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면서, 로마법을 정리한 인물이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아래에서 《로마법 대전》이 편찬될 때, 율리우스 파울루스의 저서와 관점은 인용 면에서는 법전 절반을 차지했고, 영향에선 파피니아누스와 함께 《로마법 대전》 내용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그의 저작을 묶어서 편찬한 《형법》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2. 생애
전체 이름은 정확히 미상이다. 다만, 밝혀진 이름은 율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파울루스이며, 이름 뒤에 붙여진 프루덴티스시무스는 후일 고르디아누스 3세가 자신의 정통성을 살리고자 그에게 239년 내린 아그노멘이다.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행적, 부모, 가문 이야기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푸닉 또는 포에니쿠스 지방으로 불린, 옛 카르타고인의 후손이라는 말이 한때 돌았다. 하지만 이 주장은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정사라는 주장과 같은 수준이라서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고대부터 그가 파타비움[3] 출신의 그리스인 내지 그리스 혈통의 이탈리아인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있었고, 현재까지도 그가 이탈리아 파도바 출신이라는 주장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파울루스를 기리는 비문이 그 증거로 꾸준히 언급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독일의 클라우스 데클레프 리프스 교수 등 현대 학자들은 그가 이 도시 출신인들 부모가 헬레니즘 지역 출신일 확률을 높다고 추정한다.
세베루스 왕조의 법학자 출신 고위 관료들 중 한명이나 행적이 미미한 편이다. 다만, 파울루스 역시 상대적으로 행적이 미미할 뿐 알려진 행적 역시 구체적이다. 그는 일찍이 법학에 뜻을 두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에 황제자문회의(콘실리움 프린키피스) 위원을 지낸 법학자 퀸투스 케르비디우스 스카이볼라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법학을 배운 사람 중에는 후일 황제가 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도 있었고, 파피니아누스. 울피아누스도 있었다. 파울루스는 파피니아누스, 울피아누스와 친분이 깊었는데, 이중 그와 관계가 돈독했던 쪽은 그가 스승으로도 모신 파피니아누스였다. 파피니아누스는 그를 친구이자 제자로 훌륭히 대접했고, 파울루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에 학자들은 그가 이 시절 당시 그들과 두루 교류하고, 파피니아누스와 뜻이 통하는 제자이자 친구였다고 추정한다.
파피니아누스와 마찬가지로 파울루스의 경력은 다섯 황제의 해 직후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부터 시작됐다. 205년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가 반역 혐의로 살해된 뒤, 파피니아누스가 새 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파피니아누스는 울피아누스에 앞서 파울루스를 먼저 자신이 이끌, 파피니아누스 오디토리움 위원으로 영입했다. 이어 울피아누스가 기용되는데, 파울루스는 파피니아누스의 추천 아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돼, 로마 관보에 고위 관료로 이름을 올렸다. 이때 파울루스는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니(근위대장)에 갓 임명된 파피니아누스의 법률 고문이자, 개인비서가 됐다. 이런 경력 때문에 학계는 울피아누스가 후일 자신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헤렌니우스 모데스티누스를 대한 것처럼, 파피니아누스도 파울루스를 제자이자 친구로 큰 애정을 베풀었을 것이라고 평한다.
그는 울피아누스와 함께 파피니아누스 아래에서 여러 법률 문제를 해결했고, 황제의 칙령 등을 담당해 교정 작업 등을 처리했다. 세베루스 황제와 파피니아누스의 신임은 상당히 두터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카라칼라와 게타 역시 파울루스를 높이 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카라칼라가 새 황제에 즉위한 뒤, 파피니아누스가 카라칼라와 게타의 갈등을 중재하다가 게타를 죽인 뒤 자신을 변호하라는 카라칼라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잔혹하게 살해되는 과정에서도, 파울루스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카라칼라가 게타와 그 지지자들을 전부 제거하고, 파피니아누스까지 살해한 직후, 높이 기용됐다. 이때 파울루스는 울피아누스와 함께 율리아 돔나의 행정 관리를 돕고, 파피니아누스가 처리했던 업무를 나눠 담당했다.
엘라가발루스 즉위 후, 율리아 마이사의 주도로 219년 그의 딸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와 엘라가발루스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 결혼을 통해, 학자들은 파울루스의 위상이 제국 안에서 상당했고, 정통성이 취약한 엘라가발루스 입장에서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파울루스 일가의 권력과 사회적 위치가 높았을 것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220년 초 파울라와 이혼하고 베스타 여세자 아퀼리아 세베라를 강제로 범한 뒤, 결혼을 선포했다. 이때 엘라가발루스와 그 모후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아퀼리아 세베라의 아버지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와 아퀼리아 세베라의 남자형제들을 이탈리아 밖으로 추방시키면서, 파울루스와 그의 딸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도 함께 이탈리아 밖으로 추방했다. 그러다가 222년 3월 12일 엘라가발루스가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와 함께 근위대에게 피살됐다. 이때 파울루스는 울피아누스,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 등과 함께 추방형이 해제돼 이탈리아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율리아 마이사의 부름을 받고 로마에 복귀하여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고문 중 한명이 됐다. 그러다가 228년 근위대장 울피아누스가 팔라티노 황궁 안에서 근위대에게 피살된 뒤, 율리아 마마이아의 지명으로 신임 근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언제까지 근위대장으로 재임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모군티아쿰 병영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추대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을 무렵, 함께 살해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건 전에 근위대장에서 물러났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남은 행적은 고르디아누스 3세가 궁중 정변으로 근위대 일부와 지지세력의 봉기를 선동해 푸피에누스, 발비누스를 살해한 뒤였다. 이때 그는 정통성이 부족한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에게 프루덴티스시무스라는 명예 직함을 수여받았다. 그렇지만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파울루스는 법학과 관련하여 여러 저작을 출판했다. 대개의 법학자들처럼 간결한 서술, 무미건조한 저술 방법을 취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발견된 목록표에는 로마 법학에 관한 24권의 장편, 47권의 단편 작품이 파울루스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저작은 대부분 실전했지만, 다른 저자들의 저서에 인용되어 있다. 황제의 칙령에 대한 논평을 80편이나 집필했다. 주로 고전적인 결의법[4] 사례를 수집하고, 이를 비판하면서 올바른 법 적용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외에도 다양한 법률 간행물을 저술했는데, 그 숫자는 총 319개에 달한다.
후대 황제, 법학자, 관료에게 동시대 활동한 파피니아누스, 울피아누스, 헤렌니우스 모데스티누스 중 정견을 초월해, 파피니아누스와 함께 큰 존경과 모범을 보인 법률가로 찬사를 받았다. 파울루스의 경우, 그를 대표하는 매우 독특하고 간결한 형식의 공식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통치 중의 칙령을 신경 쓴 황제, 칙령 집행을 담당한 관료에게 인기는 대단했다. 특히, 그가 남긴 광범위한 저작을 하나로 묶어서《형법》으로 집대성됐다. 이는 군인황제시대를 정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이후부터, 로마 형법의 근간이 됐다. 테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 시대인 426년에 반포한 로마법에서 권위있는 법학자 5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편찬한《 로마법 대전》의 형법 부분에는 그의 저서에 적힌 내용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