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9:02:27

원희(함양왕)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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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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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서기(序記)」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탁발부 · 대나라 탁발규 탁발사
4권 「세조·공종기(世祖恭宗紀)」 5권 「고종기(高宗紀)」 6권 「현조기(顯祖紀)」
탁발도 · 탁발황 탁발준(浚) 탁발홍
7권 「고조기(高祖紀)」 8권 「세종기(世宗紀)」 9권 「숙종기(肅宗紀)」
원굉 원각 원후
10권 「효장제기(孝莊帝紀)」 11권 「폐출삼제기(廢出三帝紀)」 12권 「효정제기(孝靜帝紀)」
원자유 원공 · 원랑 · 원수 원선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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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13권 「황후전(皇后傳)」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도무선목황후 · 명원소애황후 · 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경목공황후 · 문성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풍폐후 · 효문유황후 · 효문소황후 · 선무순황후 · 선무황후 · 선무영황후
효명황후 · 효정황후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탁발흘라 , 탁발제,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진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虔) · 탁발순 · 탁발의열
탁발굴돌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 · 탁발간(簡) · 탁발약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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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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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위본기1(魏本紀一)」 2권 「위본기2(魏本紀二)」 3권 「위본기3(魏本紀三)」
탁발규 · 탁발사 탁발도 · 탁발황 · 탁발준(浚) · 탁발홍 원굉
4권 「위본기4(魏本紀四)」 5권 「위본기5(魏本紀五)」
원각 · 원후 원자유 · 원공 · 원랑 · 원수 · 원보거 · 원흠 · 원곽 · 원선견
6권 「제본기상(齊本紀上)」 7권 「제본기중(齊本紀中)」 8권 「제본기하(齊本紀下中)」
고환 · 고징 고양 · 고은 · 고연 고담 · 고위 · 고항
9권 「주본기상(周本紀上)」 10권 「주본기하(周本紀下)」
우문태 · 우문각 · 우문육 우문옹 · 우문윤 · 우문천
11권 「수본기상(隋本紀上)」 12권 「수본기하(隋本紀下)」
양견 양광 · 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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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3·14권 「후비전(后妃傳)」 ||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선목황후 · 소애황후 · 명원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울구려황후 · 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폐후 풍씨 · 효문유황후 · 효문고황후 · 우황후 · 고황후 · 호황후 · 효명황후 · 효무황후 · 문황후 · 도황후 · 우문황후 · 약간황후 · 효정황후 · 누소군 · 원황후 · 이조아 · 원황후 · 호황후 · 곡률황후 · 호황후 · 목야리 · 풍소련 · 원씨 · 질노씨 · 원호마 · 독고황후 · 아사나 · 이아자 · 양려화 · 주만월 · 진월의 · 원락상 · 울지치번 · 사마영희 · 독고가라 · 소황후
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 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 왕세적 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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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의 반역자
원희 | 元禧
시호 없음
작위 함양왕(咸陽王) → 부성왕(敷城王)[1]
탁발(拓跋) → 원(元)
희(禧)
영수(永壽)[2]
생몰 ? ~ 501년 6월 30일
출신 하남군(河南郡) 낙양현(洛陽縣)
부모 부황 현조 헌문황제
모친 소의 봉씨(封氏)
형제자매 7남 5녀 중 차남
배우자 이씨(李氏)
자녀 8남 2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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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북위의 황족. 헌문황제 탁발홍의 차남. 효문황제 원굉의 이복동생.

2. 생애

태화 9년(485년) 3월, 효문제 탁발굉이 동생들을 왕작에 봉하면서 탁발희는 함양왕(咸陽王)에 봉해졌고, 시중(侍中)•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중도대관(中都大官)의 지위가 더해졌다. 당시 어린 효문제를 대신해 섭정하고 있던 문명태후 풍씨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지혜는 타고난 것이 아닌 이상, 모두 학문과 교육에 의해 길러진다. 작금의 황자와 황손들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 조용한 장소에 별도로 학관(學館)을 설치하고, 충직하고 박식한 선비들을 선택하여 스승으로 삼아 그들을 잘 다듬도록 하라."
이에 효문제는 여러 동생들에게 삼도(三都)를 맡기며 탁발희 등에게 경고하며 말했다.
"너희는 나라의 가까운 친족으로, 모두 어린 나이에 중책을 맡게 되었으나, 삼도에서 재판을 다스릴 때에는 특히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아직 칼을 다루지 못하면서 비단을 자르게 하는 것은 비단을 손상한 자의 책임보다 칼을 맡긴 자의 책임이 더 큰 것이다. 모두 몸가짐을 닦고 신중히 행동하여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하라."
문명태후 또한 탁발희 등에게 경고하며 말했다.
"너희 형은 선왕의 유업을 이어받아 나라의 모든 일을 다스리며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항상 부족함이 있을까 염려한다. 너희가 맡은 일이 비록 형에 비해 작더라도 역시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한다."
이때 효문제가 덧붙여 말했다.
"주나라의 문왕(文王)은 항상 신중하고 공경하여 많은 복을 누렸다. 설령 주공(周公)과 같은 재능이 있다 해도 성품이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가치가 없다. 너희는 마땅히 신중하고 경계하여 스스로 교만하거나 나태하지 않도록 하라."
이후 탁발희는 외직으로 나가서 사지절(使持節)•개부(開府)•기주자사(冀州刺史)로 부임하였고, 효문제가 남교(南郊)에서 그를 전송하였다.

태화 15년(491년) 6월, 제음강왕 탁발울이 재물을 탐하여 죄를 짓고 사사당하자, 효문제는 사신을 보내 이를 탁발희에게 알리고, 이 사례를 통해 경계하도록 하였다.

탁발희가 조정에 방문했을 때, 효문제가 왕공(王公)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황태후께서는 평소에 조정의 예법이 부족하다고 여기셔서 모든 관리를 재편할 것을 명하셨다. 이제 그 유지를 완성하고자 하는데, 경들은 이를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각자 솔직하게 대답하고, 겉으로만 따르지 말라."
이에 탁발희가 대답하였다.
"의례과 제도의 사용은 그때에 따라 달라지며, 백성들이 이를 따르게 할 수는 있으나 그 이유까지 이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신(臣)은 마땅히 기존의 뜻을 이어받아 조정의 제도를 완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효문제는 이를 옳게 여겼다.

얼마 뒤, 효문제는 조서를 내려 말했다.
" 중니(仲尼)도 고향에서 항상 겸손하고 공경했으며, 주문왕(周文王)도 세자 시절에 몸을 낮추어 도(道)를 구하였다. 탁발희 등은 비록 황실의 빛을 이어받았다고는 하나, 스승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스승을 두어 그들의 덕을 더욱 빛나게 하고자 한다. 연위경(延尉卿) 이충(李沖)을 함양왕 탁발희의 스승으로 삼겠다."
이후 탁발희가 기주로 돌아가려 하자, 효문제는 친히 그를 전송하며 시를 지어 뜻을 전하고, 도독기상연동연남예동형6주제군사(都督冀相兗東兗南豫東荊六州諸軍事) 직책을 맡겼다.

당시 왕국(王國)의 비빈은 팔족(八族) 및 청렴하고 훌륭한 가문에서 뽑아야 했으나, 탁발희는 임성왕 탁발징에게 예속된 집안의 여성을 데려와 왕비로 삼았고, 이로 인해 효문제에게 크게 꾸지람을 받았다. 조서에서 이르길,
"혼인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중시되어 왔고, 훌륭한 인재를 찾아 배필을 정하는 일은 대대로 신중히 여겨졌므로 《주역(易經)》에는 강유(剛柔)의 이치가 드러나 있다. 《시경(詩經)》의 〈작소(鵲巢)〉편에도 이러한 예가 실려 있는데, 이는 부부의 도리를 중시하고, 시구(尸鳩)의 덕을 찬미하며 군자에게 알맞은 짝을 지어 후대에 아름다운 명성을 남기고자 함이다. 따라서 혼인이란 두 성(姓)이 합쳐서 다른 가문과 친족을 맺는 일로, 위로는 종묘에 봉사하고 아래로는 후세를 잇는 것이니, 반드시 공경하고 신중하며 바르게 하여 혼인을 이루어야 한다.

부부가 친해진 후에야 비로소 부자, 군신 관계와 예의, 충효가 이로부터 완전히 갖추어진다. 태조(太祖)께서는 천하를 평정하고 황위에 오르신 후 먼 옛날의 법도를 살피고, 어지러움을 바로잡아 나라를 세우셨으며, 해가 저물 때까지 쉴 틈이 없으셨다. 여러 왕들이 혼인을 맺는 예법과 종실의 혼인에 대한 경계는 때로는 현숙한 배필을 얻기도 했으나, 때로는 이상적인 짝을 찾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 후로 이러한 풍습이 점차 사라져, 인물들이 요조숙녀를 갖추지 못하거나 가문이 백량(百兩)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고, 격에 맞지 않는 배필을 삼거나 외가가 미미하여, 예법을 어기고 세속에 머무는 일은 깊이 탄식할 만하다.

황자들이 장성하였으니 마땅히 좋은 배필을 신중히 선택하여 정실로 삼아야 한다. 이전에 들인 여인들은 첩이나 시녀로 삼도록 하라. 이번에 짐의 여섯 아우의 혼인을 위해 다음과 같이 배필을 정한다. 맏형 함양왕 탁발희는 전(前) 영천태수(潁川太守) 농서(隴西) 사람 이보(李輔)의 딸을 맞이하게 하고, 차형 하남왕(河南王) 탁발건(拓跋乾)은 전(前) 중산(中散) 대군(代郡) 사람 목명락(穆明樂)의 딸을 맞이하게 하며, 삼형 광릉왕(廣陵王) 탁발우(拓跋羽)는 표기참군(驃騎參軍) 형양(滎陽) 사람 정평성(鄭平城)의 딸을 맞이하게 하며, 사형 영천왕(潁川王) 탁발옹(拓跋雍)은 전(前) 중서박사(中書博士) 범양(範陽) 사람 노신보(盧神寶)의 딸을 맞이하게 하고, 오형 시평왕(始平王) 탁발협은 정위경(廷尉卿) 농서(隴西) 사람 이충(李沖)의 딸을 맞이하게 하며, 막내 북해왕(北海王) 탁발상(拓跋詳)은 이부랑중(吏部郎中) 형양(滎陽) 사람 정의(鄭懿)의 딸을 맞이하게 하라."
라 하였다.

어느 날, 유관 부서에서 기주(冀州) 사람인 소승관(蘇僧瓘) 등 3,000명이 탁발희의 청렴하고 밝은 덕정(德政)을 칭송하며, 기주를 대대로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며 효문제에게 아뢰었다. 이에 효문제는 조서로 말했다.
"예로부터 지방을 영구히 다스리게 하는 제도가 있었으나, 지금에 반드시 적합한 것은 아니며, 영토를 관리하는 것은 임금의 권한이므로 아랫사람이 청할 일이 아니다. 봉읍(封邑)과 채읍(采邑)은 각기 다른 제도가 있다."
이후 효문제는 탁발희를 사주목(司州牧)•도독사예형영낙동형6주제군사(都督司豫荊郢洛東荊六州諸軍事)로 삼고, 개부(開府)는 그대로 유지하게 하며, 비단 2,000필과 곡석 5,000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탁발희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동생으로서 중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식읍 3,000호를 더하여 주고, 나머지 다섯 왕에게는 각각 2,000호의 식읍을 주었다.

태화 19년(495년) 5월, 효문제가 조정의 신하들을 불러들여 물었다.
"경들은 위나라 조정을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에 필적할 만큼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가, 아니면 한(漢)나라와 진(晉)나라처럼 오직 그 다음의 시대에서만 뛰어난 나라로 남도록 하고 싶은가?"
이에 탁발희가 나아가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성스럽고 밝게 천하를 다스리시니, 실로 전대의 왕조들을 능가하기를 원합니다."
효문제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일로 이를 이루고자 하는가? 몸을 닦고 풍속을 바꾸려는 것인가, 아니면 이전 일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것인가?"
탁발희가 답하였다.
"마땅히 옛것을 고쳐 날로 새로워지는 아름다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효문제가 물었다.
"그것을 오직 자신의 몸에 그치게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자손에게까지 전하려는 것인가?"
탁발희가 답하였다.
"이미 왕조의 길고 번성함을 기원하셨으니, 이를 후세에까지 전하고자 합니다."
효문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개혁해야 하니, 경들도 모두 이를 따라야 할 것이다. 거역하지 말라."
탁발희가 대답하였다.
"윗사람이 명령을 내리면 아랫사람은 마치 바람에 풀이 눕듯이 따를 뿐입니다."
그러자 효문제가 말했다.
"상고 시대 이래로 여러 경전을 참고하건대, 어찌 이름을 바르게 하지 않고 예를 행할 수 있겠는가? 이제 북방의 언어를 없애고, 모두 표준 발음으로 따르게 하고자 한다. 나이 삼십 이상인 자들은 습성이 이미 오래되어, 이를 갑자기 고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으나, 삼십 이하로 현재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예전의 발음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겠다. 만약 일부러 예전 발음을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작위를 내리고 관직을 박탈할 것이니, 각자 깊이 경계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점차 익혀 나간다면 풍속이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옛 습속을 그대로 따른다면, 몇 세대 후에 이락(伊洛) 지방의 사람들이 다시 머리를 풀어헤친 오랑캐처럼 될까 두렵다. 왕공과 경사(卿士)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탁발희가 대답하였다.
"실로 성상의 뜻과 같으니, 마땅히 고치고 바꾸어야 합니다."
효문제가 다시 말했다.
"짐이 일찍이 이충(李沖)과 이 문제를 논한 적이 있었다. 이충이 말하기를, '사방의 언어 중 어느 것이 맞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제위에 오른 자가 말하는 것이 곧 표준이니, 어찌 반드시 옛것을 고치고 새것을 따라야 하겠습니까?'라 하였는데, 이충의 이 말은 마땅히 죽을 죄에 해당한다."
그리고는 효문제가 이충을 향해 말했다.
"경은 실로 사직(社稷)을 저버렸으니, 마땅히 어사(御史)에게 끌려가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이충은 그 자리에서 관을 벗고 사죄하였다.

태화 19년(495년) 6월, 효문제는 왕공(王公), 경사(卿士)들과 수도에 남아 있던 관리들을 꾸짖으며 말했다.
"어제 보니 부녀자들이 여전히 겹깃에 좁은 소매 옷을 입고 있더라. 내가 동산(東山)으로 떠난 지 비록 삼 년이 지나지 않았으나, 이미 계절이 바뀌었는데, 경들은 어찌하여 이전의 조서를 어긴 것인가?"
이때 탁발희가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요순(堯舜)을 능가하는 성스러운 덕으로 중원을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 신(臣)이 비록 밝은 규범을 받들어 따르려 하나, 매사에 어긋남이 있으니, 어찌 황제의 교화를 선포하고 황제의 법도를 펼칠 수 있겠습니까? 이 잘못은 참으로 법에 따라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효문제가 말했다.
"만일 짐의 말이 옳지 않다면, 경들은 마땅히 조정에서 토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안으로는 짐의 뜻에 따르고 물러나서는 따르지 않으려 하는가? 옛날에 순(舜)이 우(禹)에게 말하기를, '너는 겉으로는 따르고 물러나서는 딴말하지 말라' 하였으니, 바로 경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결국 수도의 관리들은 모두 효문제에게 사죄하였고, 효문제는 조서를 내려 앞으로 북쪽의 말이나 풍습을 따르는 자는 면직할 것을 선포하였다.

태화 20년(496년) 정월, 효문제가 한화 정책의 일환으로 북위 황가의 성씨인 탁발씨를 원(元)씨로 고쳤다. 이에 따라 탁발희도 원희로 성이 변경되었다.

태화 20년(496년) 5월 25일[3], 효문제가 방택(方澤)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바로 다음날 새벽이 되자 여러 신하들이 나아가 안부를 물었다. 효문제가 말했다.
"어제 방택(方澤)에서 제사를 지낼 때 매우 더웠으나, 하늘에 구름이 두텁게 덮여 있어 행인들이 그나마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원희가 대답하였다.
"폐하의 덕이 하늘과 땅을 감동시켰기에 구름과 기운이 그 빛을 모은 것입니다. 비록 비의 신령이 물을 뿌리고 바람의 신령이 먼지를 깨끗이 쓸어낸다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에 효문제가 말했다.
"이락(伊洛) 지방은 남북의 중앙에 위치하여, 이곳이야말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어우러지고 음양과 비바람이 만나는 곳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일 뿐, 덕이 부족한 내가 이를 이룬 것은 아니다."

태화 20년(496년) 8월 23일[4], 효문제의 태자 원순이 반란을 꾀하다가 실패하자, 효문제가 입궁하여 원순을 불러들이고, 친히 몽둥이를 들어 원희와 교대로 돌아가면서 장형 100대를 쳤다. 원순은 결국 폐위되고 효문제의 차남 원각이 태자로 세워졌는데, 얼마 뒤에 어사중위 이표(李彪)가 원순이 다시 반역을 꾀한다 고하였다. 이에 효문제는 원희와 중서시랑 형만(邢巒)에게 독주인 초주(椒酒)를 가지고 하양(河陽)에 가서 이를 원순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태화 23년(499년) 2월 5일[5], 원희의 나이가 어느덧 중년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때 태위공(太尉公)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후 원희의 집을 방문한 효문제가 이미 그곳에 와있던 사공 목량(穆亮)과 상서복야 이충에게 말했다.
"이미 하늘과 땅이 있으면 군신(君臣)이 있는 법이니, 태위(太尉)의 자리는 대현(臺鉉)에 있어 재상보다 위에 있으며, 삼괴구극(三槐九棘)[6]의 자리는 오래 비워 둘 수 없다. 내 동생 원희가 비록 오랜 경험은 없으나 황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이제 장년이 되어 태위를 겸하여 화합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짐은 항상 군주가 그저 이름뿐인 직위를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신하가 서로 상처를 주는 비난을 남길까 염려하였다. 이제 그의 집에 행차하며 두 손님에게 폐를 끼쳤으니,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효문제는 형제들에 대해 두터운 정을 가졌고, 원희는 둘째였기에 예우가 매우 두터웠으나, 원희의 탐욕스러운 성품도 알고 있었기에 늘 엄하게 경계하였다. 당시에는 원희가 이를 따르는 듯했으나, 끝내 그 성품을 고치지 못하였다.

한번은 원희가 상소하여 말했다.
"국조(國朝)는 무력을 억제하고 문예를 숭상하여 오랫동안 무예가 소홀히 여겨졌습니다. 주진(州鎮)의 군사들 중에 용맹한 자들이 있더라도 무예에 익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연말의 한가한 시기와 번상(番上)일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병법을 훈련시키고, 활과 창술을 삼분하여 함께 가르쳐, 각자 능숙해지도록 하여 임무를 수행할 때 부족함이 없게 하겠습니다."
효문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비록 무예를 가르친다고 하나 그 방식을 아직 익히지 못했고, 이미 북방을 진압하러 가는 상황에서 무예 훈련을 갑자기 시행하면 혹시 혼란이 생길 수 있으니, 잠시 중단하도록 하라."
이후 원희는 효문제를 따라 한양(漢陽) 평정에 참여하여, 남양(南陽)을 공략한 공로로 시중(侍中)과 정태위(正太尉)의 직책을 수여받았다.

태화 23년(499년) 4월 1일[7], 효문제가 곡당원(穀塘原)에서 붕어하자, 원희는 유언에 따라 보정(輔政)의 임무를 맡았다. 원희는 비록 재상으로서 정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대체로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은 채 은밀히 뇌물을 받아들이며 뒤에서 권세와 은혜를 베풀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특히 심하였다. 그해, 팔좌(八座)가 상주하여 원희의 식읍을 1,000호 늘려줄 것을 요청하자 선무제가 이를 허락하였으나, 원희는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또한, 원희는 성품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재물과 여색을 탐하였다. 첩이 수십 명이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자주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빛나는 수레를 탔으며, 멀리서도 여인을 간택해 마음을 채우려 하였다. 이로 인해 재물을 어둠의 경로로 구하여 노비가 수천 명에 이르고, 토지와 소금, 철 사업이 멀고 가까운 곳에 걸쳐 있었으며, 신하와 하인들이 줄곧 이를 경영하였다. 선무제는 이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경명 2년(501년) 정월, 원희가 노비를 보내어 영군장군 어열(於烈)에게 옛 우림군(羽林軍)과 호분(虎賁) 병사들을 무장시켜 자신이 출입할 때 호위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어열이 말했다.
"천자(天子)께서는 현재 양암(諒闇) 중에 있어 모든 일이 재상의 보정에 의해 돌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영군(領軍)으로서 단지 숙위(宿衛)를 관리할 뿐, 조서가 없이는 사사로이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원희의 노비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원희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어열에게 이렇게 전하였다.
"나는 천자의 숙부로서 몸소 원보(元輔)의 자리에 있으니, 내가 요구하는 것은 조서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어열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제가 왕의 존귀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어찌 사사로운 노비를 시켜 천자의 우림군(羽林軍)을 요청하게 하십니까? 이 어열의 머리는 가질 수 있어도 우림군은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원희는 노여워 어열을 항주자사(恒州刺史)로 임명하였다. 어열은 외지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아 굳게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어열의 아들인 좌중랑장 어충(於忠)은 직합(直閤)을 맡아 늘 선무제의 곁에 있었는데, 어열은 아들 어충을 통해 황제에게 원희의 이와 같은 행동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선무제 말했다.
"여러 왕들이 마음대로 전횡하고 그 의도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마땅히 이를 일찍이 중지시키고 직접 권력을 잡아야 한다."
이때 북해왕 원상 또한 원희의 잘못과 악행을 선무제에게 몰래 보고하며, 팽성왕 원협이 백성의 신망을 크게 얻고 있으니, 그들 모두 오랫동안 보정을 맡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다. 선무제는 이를 옳게 여겼다.

당시 원희 등의 왕공(王公)들은 봄에 지내는 약제(礿祭)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두 사당의 동쪽 구역에서 재계하고 있었다. 선무제는 밤에 어충을 보내어 어열에게 이르기를,
"내일 새벽에 알현하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라 전하였다. 이튿날 새벽, 어열이 도착하자 선무제는 그에게 직합(直閤) 소속의 60여 명을 거느리고 원협, 원희, 원상을 호위하게 하여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원희 등이 소환을 받아 광극전(光極殿)에서 선무제와 대면하게 되자, 선무제가 말했다.
"나는 비록 지혜가 부족하고 어리석으나, 황위에 올라 보배로운 대통(寶歷)을 이어받았다. 최근 병마에 시달리면서 실로 여러 숙부들께 의지하여 간신히 살아왔고, 어느덧 3년이 흘렀다. 숙부들께서 성심으로 나를 보필해 주셨으나, 이제 내가 직접 모든 정무를 관장하게 되었으니, 각자 직무로 돌아가도록 하고, 추후 별도로 맡은 바를 분담하여 정할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지혜가 부족하여 일찍이 재난을 당하고 근심과 고독 속에서 병을 앓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다만 선제(先帝)의 성스러운 덕과 남겨진 은택에 의지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재상들이 왕실을 위해 애쓰고 수고해 주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두루 화합하게 하고, 안팎을 정화할 수 있었다. 이제 마땅히 자식으로서 도리를 지키며 정무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물러나기를 청하며 사양하는 간곡한 마음을 굳이 꺾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짐이 빈약하나마 스스로 힘써 정무를 살피려 한다.

왕(王,원희)의 지위는 짐의 원숙(元叔, 큰 숙부)으로서 존귀하며, 덕성과 학문이 깊고 침착하니 태보(太保)와 태위(太尉)의 직위를 제수할 수 있다. 사공(司空)인 북해왕(北海王)은 짐의 계부(季父, 막내 숙부)로서 영명하며, 명성과 위업이 뛰어나니 대장군(大將軍)과 녹상서사(錄尚書事)의 직위를 제수할 수 있다."
이로써 선무제가 직접 정무를 살피기 시작하자, 원희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제수(齊帥) 유소구(劉小茍)는 여러 차례 "천자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전하를 주살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원희에게 말하였고, 원희는 이를 믿고 한탄하며 말했다.
"내가 진심을 저버린 적이 없는데, 천가(天家, 황제)가 어찌 이처럼 나를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로 인해 원희는 항상 근심과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경명 2년(501년) 5월, 당시 조수(趙脩)가 선무제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왕공(王公)들이 좀처럼 나아가 알현하지 못하였다. 이에 원희는 그의 왕비의 오라비이자 급사황문시랑인 이백상(李伯尚), 저족의 추장 양집시(楊集始), 양령우(楊靈祐), 걸복마거(乞伏馬居) 등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다. 마침 선무제가 북망(北邙)으로 사냥을 나가자, 원희는 낙양성 서쪽의 작은 저택에서 병력을 모아 선무제를 습격하고, 장남 원통을 몰래 하내(河內)에 들여보내 병력을 일으켜 상응하게 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걸복마거가 원희에게 말했다.
"낙양성으로 들어가 병력을 규합하여 성문을 닫고, 천자가 반드시 북쪽으로 상건(桑乾)으로 달아나도록 하면, 전하께서는 하교(河橋)를 끊어 하남(河南)에서 천자로 즉위하십시오."
하지만 원희의 무리들은 앞뒤로 망설이며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원희는 마음이 느슨해져 아침부터 오후까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 누설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흩어졌다. 계획이 무산되자 양집시는 마음을 바꿔 원희의 모반을 선무제에게 알리기 위해 북망으로 달려갔다.

선무제의 직침(直寢) 부승조(符承祖)와 설위손(薛魏孫)은 원희와 내통하고 있었는데, 그날 불탑의 그늘에서 잠들어 있는 선무제를 시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승조가 설위손을 말리며 말했다.
"내가 듣기에 천자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나병에 걸린다고 하였소."
이에 설위손은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무제가 잠에서 깨어났고, 양집시도 도착하였다. 선무제의 좌우 호위들이 모두 흩어져 사냥감을 쫓아가 있었고, 호위하는 자들이 많지 않아, 선무제는 원희의 모반 소식을 전해듣고 급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좌중랑장 어충이 말했다.
"신(臣)의 아버지 영군(領軍) 어열이 수도를 지키고 있어, 방비에는 틀림이 없으니 염려하지 마소서."
선무제는 어충에게 기병을 타고 상황을 확인하러 가도록 하였고, 어열은 이미 병력을 나누어 엄중히 방비를 하고 있었다. 어충이 돌아와 보고하길,
"신은 비록 늙었으나 마음과 힘이 아직 쓸 만합니다. 저 무리들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으나 염려할 바가 못 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천천히 궁으로 돌아가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십시오."
선무제는 크게 기뻐하며, 화림원(華林園)에서 궁으로 돌아가면서 어충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경은 과연 강인한 사람들의 모범이로다."

한편, 원희는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가신과 첩들을 거느리고 홍지(洪池)에 위치한 별장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유소구를 따로 보내어 "전지(田地)를 점검한다"는 구실로 선무제에게 보고를 올리게 하였다. 유소구가 망령(邙嶺)에 이르렀을 때 선무제의 군인들과 마주쳤고, 군인들은 그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수상히 여겨 그를 죽이려 하였다. 유소구는 궁지에 몰려, 원희의 반역을 고발하려 한다고 말하여 처형을 미룰 수 있었다. 그날 밤, 원희는 홍지에서 머물렀는데, 큰 바람과 폭우가 불어와 나무들이 뽑히고 꺾였다. 그때까지도 원희는 자신의 계획이 드러난 줄 모르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원희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사람들을 모아 도모하시려 하다가 중단하셨으니, 뜻이 이미 드러났을까 두렵습니다. 오늘 밤 어찌 스스로 마음을 놓고 계십니까? 곧 큰 재앙이 닥칠까 두렵습니다."
원희가 답하였다.
"내게 이 몸과 목숨이 있으니, 스스로 아껴야 함을 알고 있다. 어찌 남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자 또다른 이가 말했다.
"전하의 자녀와 아내는 이미 강을 건넜고, 서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처럼 태연히 있는 것이 어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원희가 답하였다.
"처음 그들을 보낸 날, 지금은 마치 행인이 강을 건넌 것처럼 내 동태를 살피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래 전에 이미 사람을 보내 그들을 불러들였으니, 지금쯤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하내군(河內郡)에 들어간 윤오기(尹仵期)와 원희의 장남 원통은 아직 병장기를 늘어놓고 죄수들을 방면하고 있었다. 그 사이 어열은 직합 숙손후(叔孫矦)를 파견해 호분(虎賁) 300명을 이끌고 원희를 공격하게 하였다.

원희는 추격을 피해 홍지에서 동남쪽으로 도망쳤으나, 함께한 하인들은 동복 몇 명뿐이었고, 원희를 따르는 신하는 오직 겸방각(兼防閣)인 윤룡호(尹龍虎)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원희는 걱정에 어찌할 바를 몰라 윤룡호에게 말했다.
"내 마음이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으니, 수수께끼 하나를 내어 보거라. 그것을 생각하며 이 답답함을 풀어보려 한다."
윤룡호는 문득 예전에 들은 수수께끼를 떠올려 말했다.
"잠들면 함께 잠들고, 일어나면 함께 일어나며, 탐욕은 이리와 같으나, 재물은 자기 것이 아니다."
이 수수께끼에는 전혀 풍자나 경고의 뜻이 담겨 있지 않았다. 원희도 이를 자신을 풍자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해석하여 말했다.
"그것은 눈이다."
그러나 윤룡호는 그것이 젓가락이라고 답하였다. 이윽고 원희는 낙수(洛水)를 건너 백곡오(柏谷塢)에 이르렀고, 수행하는 이는 그의 두 외숙과 윤룡호뿐이었다. 원희는 돌아보며 윤룡호에게 말했다.
"보통 사람도 절의가 있어 서로를 위해 죽음을 택하니, 그대도 마음을 굳게 하여 이 태위공(太尉公)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도록 하라."
이에 윤룡호가 말했다.
"저 윤룡호는 동야(東野)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전하의 너그러움과 밝으심 덕분에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위난을 당하여, 아쉽게도 멀리 내다보는 계책으로 전하를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전하와 운명을 같이한다면, 설령 죽더라도 산 것과 같을 것입니다."
결국 원희와 윤룡호는 관군에게 사로잡혀 화림도정(華林都亭)으로 보내졌다. 선무제는 직접 나서서 사건의 전말을 물었고, 원희와 함께 잡혀온 윤룡호는 1,000근의 무거운 사슬로 결박하여, 우림군(羽林軍)에게 감시를 맡겼다.

당초 효문제가 한가롭게 연회를 즐기다가 원희 등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내 후손 중에 혹시라도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가 있거든, 너희들이 잘 살펴서 보필해 주어라.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두지 말라."
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제 원희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비록 말이 순서에 맞지 않았으나,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선대의 뜻을 되새겼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뜻을 잃어버렸고, 비장한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이로써 사형을 받게 된 원희는 여러 누이인 공주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총애하던 1~2명의 애첩을 불러 이야기하였다. 이때 한 공주가 울며 그를 꾸짖어 말했다.
"첩들을 많이 들이고 재물을 탐내다가 죄를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켜 오늘날의 사태를 초래했으면서, 어찌 다시 이런 자들을 걱정하십니까!"
이를 들은 원희는 부끄러워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경명 2년(501년) 5월 29일[8], 원희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사되었다. 원희가 사망한 후, 그의 궁인들이 노래하였다.
"가련하도다, 함양왕(咸陽王)이여, 어찌하여 일을 그르쳤는가?
금으로 된 침상과 옥으로 된 책상에서도 잠들지 못하고, 밤에 서리와 이슬을 밟고 떠나야 했네.
낙수(洛水)는 넘실대며 강둑을 가득 채웠으니, 행인이 어찌 건널 수 있으랴?"
이 노래는 강남에까지 전해졌고, 남쪽에 있는 북방 사람들은 비록 부귀한 자라도 이 노래가 연주되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같이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들 수십 명은 주살되었고, 원희는 북망산에 몰래 매장되었다. 그의 여러 아들들은 호적에서 삭제되었으며, 딸들에게는 약간의 자산과 노비가 지급되었으나, 나머지 가산은 모두 외척인 고조와 총신인 조수 두 가문에 분배되었다. 그 외의 재산은 내외 백관에 하사되었고, 지위가 낮은 자들에게까지 나누어졌으며, 많게는 100여 필, 적게는 10필씩 받았다. 이후 원희의 자녀들은 자주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부족하였고, 오직 원희의 아우인 팽성왕 원협만이 해마다 두세 번씩 구제해 주었다.

장남 원통은 원희의 반란이 실패한 것을 알게 된 하내태수 육수(陸琇)에 의해 참살되었고, 차남 원익(元翼)은 강남으로 도망쳐 양나라 무제 소연 함양왕에 봉해졌다. 원익의 동생 원창(元昌), 원엽(元曄)도 원익과 같이 양나라로 도망쳤고, 후에 원익의 동생 원현화(元顯和), 원창의 동생 원수(元樹)도 원익의 뒤를 따라서 양나라로 도망쳤다고 한다. 원희의 또다른 아들 원탄(元坦)은 북제에서 신풍현공(新豐縣公)에 봉해졌고, 원탄의 동생 원창(元昶)은 동위에서 태원왕(太原王)에 봉해졌다.


[1] 사후 효명제에 의해 추봉. [2] 혹은 사영(思永). [3] 병자년 갑오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5월 25일이고, 양력으로 6월 21일이다. [4] 병자년 정유월 갑인일. 음력으로는 8월 23일이고, 양력으로 9월 16일이다. [5] 기묘년 정묘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2월 5일이고, 양력으로 3월 2일이다. [6] 삼공구경(三公九卿)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 [7] 기묘년 기사월 병오일. 음력으로는 4월 1일이고, 양력으로 4월 26일이다. [8] 신사년 갑오월 임술일. 음력으로는 5월 29일이고, 양력으로 6월 3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