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의 현손 - 원창군 原昌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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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호 | 원창부령(原昌副令) → 원창군(原昌君)[1] | |
본관 | 전주(全州) | |
이름 | 구(玖) | |
양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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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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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부 | 의신군 | |
생모 | 원주 원씨(原州 元氏) | |
부인 | 청송 심씨(靑松 沈氏)[A] | |
자녀 | 1남[3] 4녀[A] | |
생몰 기간 |
음력 | 1611년 9월 18일 ~ 1669년 5월 5일[A] |
양력 | 1611년 10월 23일 ~ 1669년 6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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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성종의 14남 운천군 이인(雲川君 李𪬦)의 증손자이다. 인조에게는 숙부 뻘 항렬로[6] 9촌 지간이다. 계보 상으로는 다음과 같다.2. 생애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난 후, 후금(훗날 청)은 조선과 정묘조약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조선의 왕자를 후금에 볼모로 보내라는 내용이 있었다.이에 인조는 급히 원창부령[8] 이구를 원창군으로 봉해 왕의 동생을 가장하게 하여[9] 많은 공물을 가지고 가 화의와 철군을 요청했다. #
후에 이홍망(李弘望) 등과 후금에서 두 나라의 우호를 증진시켰다 하며, 돌아올 때는 후금의 장수 유흥조(劉興祚), 용골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왔다고 한다.
1631년(인조 9년)에는 후금 사신이 왔는데도 외방에 있어서 만나지 않아 파직당했다. #
3. 여담
- 원창군과 비슷하게, 왕실 직계와 먼 종친이면서 가까운 왕족으로 둔갑당해 청나라에 끌려갔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의순공주이다. 그는 성종의 9남(서7남) 익양군의 현손녀로, 청나라가 당시의 섭정왕이었던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새 친왕비로 조선의 공주를 맞이하고 싶다며 보내달라고 요구했을 때, 효종의 양녀가 된 후 청나라로 갔다. 그런데 이후의 삶이 너무나도 슬프다. 자세한 내용은 의순공주 문서 참조.
4. 가족과 후손
어머니는 원주 원씨로, 1900년( 광무 4년)에 펴낸 《선원속보》에는 통제사 원균(綂制使 元均)의 딸이라고 적혀있는데 우리가 아는 그 원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10]슬하에 딸 4명을 두었다. 그 중 1명만 정실 출생이며 다른 3명은 측실 사이에서 낳았다. 적녀는 홍유무, 서녀들은 각각 성시욱, 심호, 남중성과 혼인했다.[A]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촌형 인산군 이우(仁山君 李瑀)의 아들 이시원(李時援)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이시원은 이반(李磐)과 이여(李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반의 대는 고종 때까지 독자로 이어졌고[12] 이여의 후손들이 그나마 번성했다.[A]
[1]
작호는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유래했다.
[A]
출처: 《선원속보 - 성종대왕자손록 운천군파 권1》, 17면.
[3]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
[A]
[A]
[6]
즉,
광해군,
정원군과 같은 항렬.
[7]
완원군의 차남으로, 은천군에게 아들이 없어 이천군 이수례가
양자로 입적한 것이다.
[8]
副令.
종친부의 종 5품 작위이다. 부령은 사실상 이름만 왕족이라고 할 수 있다.
[9]
실제로는 위에 썼듯, 9촌 숙부이다.
[10]
출처: 《선원속보 - 성종대왕자손록 운천군파 권1》, 12면.
[A]
[12]
이반의 7대손 대에서 아들 2명이 태어났으나 그 중 한 명은 이여의 후손으로 입적했다.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