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4:44:04

원성황후(고려 거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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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 ]
||<tablewidth=100%><width=1000><tablebgcolor=#676767,#010101><bgcolor=#454545><color=#ffffff><-3> ||
그 외 등장인물 및 특별출연은 등장인물 ( 고려· 거란· 기타 국가) 문서 참고.
[ OST ]
||<tablewidth=100%><tablebgcolor=#676767><tablecolor=#ffffff><width=25%> ||<width=25%> ||<width=25%> ||<width=25%> ||
[[고려 거란 전쟁/음악#s-2.1|
Part 1

비상]]
서도밴드
2023. 12. 15.
[[고려 거란 전쟁/음악#s-2.2|
Part 2

폭풍]]
김장훈
2023. 12. 29.
[[고려 거란 전쟁/음악#s-2.3|
Part 3

적동
(붉은겨울)
]]
안예은
2024. 0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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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에
나는
]]
IYAGI (이야기)
2024. 02. 03.
그 외 오리지널 스코어는 음악 문서 참고.
[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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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0707><colcolor=#fff> 원성황후
元成皇后
파일:원성황후.jpg
캐릭터
지위 고려 부인(후궁)[1] (19 ~ 29회)
→ 연경원주 (29 ~ 30회)
→ 연경궁주 (31 ~ 32회)
시호 원성왕후
가족 현종 (배우자)
왕흠 (아들)
김은부 (아버지), 김은부의 부인 (어머니)
원혜황후 (첫째 여동생)
원평황후 (둘째 여동생)
남동생 2명
등장 회차 5회, 9회, 14 ~ 32회
배우
하승리

1. 개요2. 작중 행적
2.1. 5회2.2. 9회2.3. 14회2.4. 15회2.5. 16회2.6. 17회2.7. 18회2.8. 19회2.9. 20회2.10. 21회2.11. 22회2.12. 23회2.13. 24회2.14. 25회2.15. 26회2.16. 27회2.17. 28회2.18. 29회2.19. 30회2.20. 31회2.21. 32회(최종회)
3. 묘사
3.1. 17회 이후에서의 비판
4. 총평5. 어록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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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 ]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첫째 딸이며, 명랑하고 정의로운 성품을 지녔다. 현종의 몽진 길에서 현종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는다.


KBS 대하드라마 〈 고려 거란 전쟁〉의 등장인물.

2. 작중 행적

2.1. 5회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딸로 5회 부터 처음 출연하기 시작하여 이 시점에서는 황후도 아니고 사서에 이름도 전해지고 있지 않기에 '김씨'라고 성(姓)만 표기하였다.[2] 전방으로 떠나는 징집병들을 아버지 김은부와 함께 배웅 하는 걸로 첫 등장하여 전쟁의 승패와 병사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 와중에 새 황제를 제1차 여요전쟁 때 직접 서경까지 나섰던 성종과 비교하며 거리낌 없이 애송이 취급하기도 한다.

2.2. 9회

군역을 빠진 호족의 아들을 발견하고 아버지를 상대로 왜 뺐냐고 힐난하는데, 아버지는 개경 이남 지역은 사실상 호족 세상이라 자식을 빼주는 대가로 간신히 1,500명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항변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패전에 책임을 자신이 부족해서 군사를 보내지 못한 것 같아서 괴로워하자 손을 잡아주며 위로한다. 이 때 아버지 김은부가 현실과 이상이 다르지만, 현실을 택한 것이 옳았는지 아니면 강압이라도 해서 충주처럼 올려보내야 했는지 고뇌하며 손을 떠는 모습을 보는데, 이 모습이 마치 현실주의보다 이상주의를 선택하려 하는 현종과 많이 닮았다.

2.3. 14회

동생들 앞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는데 활 솜씨가 수준급이다. 동생들이 활 솜씨를 칭찬하며 "미워하는 사내라도 있냐"는 농담에 "거란군이 내려온다는 소문도 못 들었냐. 그놈들에게 그냥 당하느니 한 놈이라도 죽이고 가려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핀잔을 주며 동생들에게 단도라도 지니고 다니라고 엄하게 말한다. 거란군이 내려오면 아버지가 피신 시켜주지 않겠냐는 동생들의 말에, "아버지는 병사들이 다 도망가도 혼자서라도 관아를 지키실 분"이라고 대꾸한다.[3] 이후 호장들의 반발로 동원령이 흐지부지되자 낙담한 아버지를 보고 호장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린다.[4]

2.4. 15회

석양을 바라보면서 한숨짓는 아버지를 여동생들과 함께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공주까지 몽진을 온 현종을 가족들가 함께 환대한다. 그런 현종을 바라보고 나서 어머니에게 공주까지 몽진 온 황제의 침소에 들여보내 달라는 말을 한다. 본래는 출세를 위해 권력자에게 딸을 바치는 행위를 혐오했지만, 고려를 바꾸고 싶지만 힘이 없음을 한탄한 아버지의 모습에 그 힘을 만들고자 생각을 바꾼 것이고, 고지식한 김은부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현종에게 옷을 지어 올리겠다면서 늦은 밤에 침소로 찾아온다. 그리고, 현종에게 옷을 지어 올리겠다고 아뢰며 치수를 잰 후, 현종은 옷을 지어올린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다 되었소. 이만 나가도 되오.' 라고 전하였지만, 그것이 곧 시침(侍寢)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김은부가 딸을 이용해 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을 알게 되어 배신감에 분노한 현종이 화를 내자 아버지의 뜻이 아닌 스스로 자청해서 온 것이라 아뢰면서 "정말이옵니다. 저 혼자서 벌인 일이옵니다. 제 아비는 아무 죄가 없사옵니다. 딸을 팔아 폐하의 환심을 산다는 것은... 생각해내지도 못하는 사람이옵니다. 그 고지식함이 답답하여 제가 스스로 나선 것이옵니다."라고 해명하고,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면서 무례를 범한 것에 대해 무릎까지 꿇고 눈물로 읍소하며 사죄하였다.[5][6]

현종이 떠난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김은부가 화를 내면서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게야! 똑똑했던 아이가 왜 그리 어리석어진 것이야? 아비의 앞길은 이 아비가 열 것이다. 네 눈에는 이 아비가 그리 못나 보이더냐? 이제 어찌할 것이야? 네가 침소에 들어가는 모습을 노비들이 보고 군사들이 보았다. 이제 너는 폐하의 여인이 되었단 말이다!" 라고 꾸중을 들었지만, 강단있는 태도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벌인 일이니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현종에게)옷을 마저 짓겠습니다. 약속한 일이니 해 드리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당당하게 임했다.

2.5. 16회

아버지 김은부로부터 현종이 자신이 지어 올린 어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이어 "(폐하가) 널 받아주신 것이냐"는 김은부의 물음에, 그녀는 "(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받아주신 것"이라고 대답한다.

2.6. 17회

아버지 와 함께 공주에서 개경으로 상경한다. 내용 정황상, 현종이 김은부에게 개경으로 상경할 것을 부탁받은 듯 하며, 다른 가족들은 공주에 짐을 싸고 있다고 밝혔다. 이 때, 지척에 있는 현종을 상당히 의식하는 듯 보이며, 복잡한 심경을 내비친다. 이후 아버지가 주도하는 지방 개혁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듯 잠시 공주로 내려갔는데, 그 곳에서 공주 호장의 여노비로부터 최 호장을 제외한 공주의 모든 호장들이 충주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한편, 이 과정에서 막내동생(훗날의 원평황후)이 "개경이 완전히 다 불탔다던데 우리가 살 집이 남아있긴 한걸까?" 라고 철없이 물어보니까 "지금 아버지는 개혁을 추진한다고 온 호족들에게 표적이 되었는데 너는 집이니 뭐니 그딴 것밖에 관심가질 게 없냐?" 라고 미친 듯이 갈구기도 했다. 법당에서 전사자들을 위한 집회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는 현종과 조우한다. 자신은 가족과 올라오던 중 혼자 뒤떨어졌다고 말했고, 호족을 대대적으로 제압하려 하는 현종의 고민을 듣고 "언제나 끝에 가서야 답을 보여주는 게 길"이라며 끝까지 달려가보지 않으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다고, 끝까지 나아가라고 조언을 했다. 이어 "옳은 일을 할 땐 언제나 힘겨운 법"이라며 "폐하께서 지금 이리 힘겨우시니 옳은 길을 가고 계신 것"이라고 격려했다.

2.7. 18회

충주에서 호장들이 모임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주의 저자거리에서 탐문을 계속하다, 현종의 암살을 노리는 박진 일행을 만나면서 위기에 빠졌다. 다행히 무사히 빠져나와 개경으로 돌아왔지만, 황제가 보낸 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황제의 처소에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되는 등, 자신과 아버지에 대해 원정왕후를 비롯한 조정 신하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2.8. 19회

현종이 낙마했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서 듣자 그릇을 깨뜨릴 정도로 놀랐고, 이후 아버지가 잡혀가자 집에 찾아온 황보유의와 최충, 김종현과 조자기를 통해 대책을 강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탄핵이 시작되고 심문을 받는 아버지에게서 불리한 진술이 나오자 어머니에 이어서 자신이 불려나와 원정황후가 아주 폭풍 사자후를 내지르며 매섭고 혹독하게 심문을 하자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고, 결국 아버지 김은부는 강압적으로 몰아넣는 황후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딸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허위자백을 하게 되자 놀라면서 울음을 터트린다. 아버지를 붙잡고 죄책감에 흐느끼다가 부상에서 회복되어 다시 정전으로 돌아온 현종에게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고,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김은부 일가를 구하기 위한 계책이 쓰여있는 강감찬의 서한을 받은 현종의 부탁으로 후궁[7]이 되어 정복을 입고 입궁한다.[8] 원정황후는 김은부의 큰 딸 김씨가 입궁하는 모습을 달려와 바라보고 분노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본인은 입궁할 때부터 얼떨떨했는지 입궁하는 내내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고, 수창궁 앞에 나온 현종에게 "진심이십니까?"라며 물은 뒤 진심이라는 현종의 말을 듣고 다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2.9. 20회


현종에 의하여 정식적으로 후비에 임명되었으나, 용손이 아닌 본인이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거부하여 기존에 현종이 제안한 황비에 책봉받기를 거부한다.[9] 원정황후를 알현한 자리에서 "자신이 지방 호족 출신임을 잊지 않고 있다."면서 경어까지 사용하며 시종일관 겸손한 자세를 유지한다. 원정왕후의 명으로 황실의 의복을 담당하는 일을 도맡지만, 아직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작위가 없었기에 그저 '부인'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궁녀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10]

한편, 다른 장수들에게 멸시당하며 현종의 눈 밖에 나면서 조급해진 탁사정이 최후의 발악으로 원정황후와 손을 잡고 원성황후를 폐위해야 한다는 소를 올리면서 그녀를 공격하지만, 다른 신료들도 탁사정의 소에 호응하지 않고, 도리어 현종이 탁사정을 '강조의 일파'로 몰아 유배를 보내도록 지시하며 일단 고비를 넘긴다.

2.10. 21회

현종이 강씨 문중으로 행차했다는 것을 듣고 아버지인 김은부에게 "왜 말리지 않았냐"면서 다그친다. 그러나 현종이 무사히 강감찬을 데리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하는데 걱정되면 한번 찾아가 보라는 제안에는 거절을 한다. 한밤 중에 거란의 사신으로 아버지 김은부가 자청해서 가게 되었다는 것을 현종을 통해서 듣게 되고 얼마 뒤 사신으로 가기로 한 날 김은부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인사를 나눈다.

2.11. 22회

원정황후와 같이 길을 걸으며 그녀에게서 "형부시랑은 황제의 장인이고 거란은 비록 야만스러운 본성을 지녔다고 하나 겉으로 문명대국임을 자처하고 있으니 함부로 죽이지 못할 것이며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라고 위로를 받는다. 이후 현종을 만나고 원정황후가 먼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원정황후의 위로만으로 충분하다."면서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눈 내리는 작은 법당에서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길 한없이 기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현종이 흥화진을 요구하는 거란 사신에게 절대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사실상 협상 결렬 및 전쟁 국면으로 치달았고[11] 이는 곧 거란에 사신으로 간 아버지 김은부의 목숨이 위험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소식을 현종으로부터 듣게 되고는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기 힘들 것이라는 직감을 하며 좌절하고 눈물을 보인다.

2.12. 23회

현종의 위로에 애써 눈물을 참으면서 아버지도 충분히 이해 할 것이고, 자기도 이해한다면서 법당의 불상을 보며 다시 기도를 하지만, 이내 오열하면서 현종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후 아버지가 붙잡히기 전 화살로 날린 서찰과 흥화진으로 간 강감찬이 보낸 소식을 통해서 현종으로부터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안도하고 꼭 구하겠다는 다짐도 받는다.

2.13. 24회

현종과 강감찬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의 노력에 의해 아버지인 형부시랑 김은부가 무사함을 알고 고마운 마음에 따르는 궁녀[12]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직접 다과를 만들고 밤늦게까지 거란의 재침에 대비한 회의를 하는 현종과 대신들 앞에 찾아가 다과상을 대접하고, 그 궁녀가 현종과 대신들에게 "김씨 부인이 직접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자 부끄러워한다. 나오는 길에 궁녀에게 괜한 말 했다고 다그치자 오히려 궁녀에게 성격이 목석 같다고 연애와 관련한 조언을 듣게 된다. 이후 원화황후가 자신의 옷의 마감이 미흡한 것을 발견하고, 황실의 의복 담당으로써 질책을 받고 직접 다시 지어올려라는 명을 받고는 침방에서 직접 바느질을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현종은 자신에게 꽃을 선물해준 고마움에 찾아가다가 현 상황을 보게 되었다. 원화황후에게 이야기해서 잘 마무리 하겠다는 것을 자신의 잘못이고 책임질 일이라며 이 곳은 황제가 출입할 곳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달라고 했으나 오히려 현종은 잘 시간이 멀었다면서 오히려 침방에서 상주문을 가지고 와 보는 모습을 보여 난처하게 되었다. 이후 선물한 꽃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현종에게 자신의 경험상 꽃내음이 좋아서 잠이 잘 오기에 그 꽃을 선물했다고 말하지만, 현종으로부터 그 꽃은 높은 산에서만 자라기에 꽃내음이 특별한게 아니라 꽃을 따려고 산을 타고 내려와 고단해서 그런 것이라는 대답을 듣자 기분이 나빠져서 토라지고 현종이 사과함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는다. 이에 현종이 화났냐고 묻자 깨우쳐줘서 감사하다고 하지만, 현종이 웃으면서 화난게 맞다 하며 다시 사과하자 결국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와 같이 웃는다. 이를 통해 현종과 더 가까워지고[13] 거란에서 아버지를 풀어주면서 고려로 돌아오자 수창궁에서 극적으로 다시 상봉하게 되었다.

이후 김훈, 최질의 난이 일어나는 1014년으로 흘러 제2차 여요전쟁 때 불탄 정궁(만월대)가 다시 재건되었을 때 현종과 원정황후, 원화황후, 여러 신료들과 함께 정전을 향해 걷는 모습을 보인다.

2.14. 25회

현종이 처소에 찾아와 상주문을 보고 있고 직책에 따라 침방의 일기를 적으며 옷감의 재고 및 새로운 나인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현종이 상주문을 다보고 잠을 청하기 위해 나가려는데 원하면 여기서 머물러 가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종은 거부하고 나갈려고 하자 현종의 손을 잡고는 계속 기다리면 되는 것인지 그리고 자기에게도 희망이 있냐면서 물어보고 얼굴을 보고는 이내 잡은 손을 놓고 현종이 나간 뒤에는 옅은 한숨을 내쉰다. 김훈, 최질이 난을 일으키고 처소에서 현종에게 올릴 어의와 함께 서찰을 넣는데 반군 병사들이 들이닥치고 황후전으로 끌려간다. 이 후 난의 주동자 중 한명인 박진을 만나게 되고 반군 병사들에게 어디론가 끌려 나간다.

2.15. 26회

반군들에 의해 사찰에 감금된 상태이다. 현종에게 남긴 어의와 서찰 내용에는 '폐하께 전하는 마지막 인사라며, 자기도 모르게 가슴 속에 욕심이 차올라 폐하의 마음 속에 있는 원정황후를 밀어내고 갖고 싶었다고 자백한다. 그것이 죄인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며 폐하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이 지금 자신은 감당할 수 없어 떠난다며 더 이상 찾지말라고 부탁하며 언젠가는 마음의 평온을 얻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마무리한다.[14] 감금당한 채 밀명을 받은 반군 장수들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칼 대신 화살을 써서 죽여라. 내 시신이 적게 훼손되어야 나중에 네 죄가 덜해지고 처자식이라도 연좌에서 구할 수 있다'는 기적의 논리를 시전하고 장수들은 활시위를 당기려다 고민 끝에 활을 거두며 목숨을 건지고 달아난다.

2.16. 27회

반군에게 도망치는 신세 중에 한 백성을 통해 고을 읍사의 위치를 알게 되고 거기서 자신에게 호의적인 안무사에게 말을 빌린다. 지채문이 강감찬에 의해 현종을 위해 원성황후를 찾아 보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자신을 쫒는 반군을 물리치는 중에 지채문에 화살을 쏘려는 반군 장수에게 화살을 쏴 부상을 입히고 '돌아가서 날 죽였다고 거짓을 고해야 모두가 산다'며 살려준다. 지채문에게 현종 및 가족의 상황을 물어보고 그리고 원정황후가 반란에 협조했다는 말도 듣게 된다. 이 후 개경 밖 흥륜사에서 이자림에게 전달받은 현종의 서찰을 읽고 놀란다.

2.17. 28회


지채문이 서경에 역도들을 응징하러 가기를 청하자 '군사를 더 모아서 가는 게 어떻냐'라고 제안하며 보내고 현종이 보낸 서찰에는 '자신은 부인에 대해 조금씩 연정이 생기긴 했지만, 어릴적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던 자신에게 안식처였고, 궁궐 생활을 버티게 해준 사람은 원정황후었다고 밝히면서 자신은 지금도 그 여인을 버릴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이제부터는 자리를 마련할테니 자신의 마음을 넓혀서라도 담을 것임을 다짐하고 다시는 떠나지 말고 곁에 있어 달라'며 마무리 짓는다. 서찰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이내 말을 타고 서경을 향한다. 서경으로 몰래 잠입하여, 이자림 등에게 현종을 구하러 지채문이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다며 조원을 성문으로 보내서 지채문과 도용수의 군사들을 서경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15] 그 이후, 현종은 억류되어 있지만 분명히 갑갑해서 밖으로 나갈 것이고 그럼 사찰로 갈 것이라는 걸 정확히 예측한다. 그리고 사찰에서 절하는 백성으로 위장한 후 만난 현종에게 조심스럽게 연회를 열 것을 제안한다.[16]

2.18. 29회

현종이 무사히 난을 진압하도록 사찰에서 절을 하며 기도를 드린다. 난을 진압하고 현종이 찾아오고 안도와 함께 포옹을 한다. 다음 날 전날의 일로 많이 지친 현종을 모습을 지켜보고 현종이 깨어나자 서찰 관련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대신들이 개경에서 달려왔다고 말해준다. 시간이 1018년, 3차 여요전쟁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변하고, 장남 왕흠이 등장하고 지위는 연경원주로 나온다.[17] 왕흠이 걷는 모습을 궁에 들어온 동생들과 함께 지켜보고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 한다. 밤에 몸이 많이 불편한 원정황후가 찾아오고 왕흠을 태자로 인정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난 여러 해 동안 대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듣게 된다. 이후 오랜 갈등이 드디어 마무리 되고 폐하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날 밤 원정황후는 병으로 요절을 하고 소식을 듣고 급히 찾아가나 때는 늦었고 슬퍼한다.

2.19. 30회

3차 여요전쟁이 시작되고 첫 전투에서 승전보를 받았지만 불안해하는 현종이 찾아온다. '이 전쟁으로 모든 것이 걸려 있어 두렵다'고 말하는 현종을 보고는 '승리할거라며, 하늘이 이 고려를 수호해 줄 것'이라며 격려한다. 날이 밝자 사찰에서 현종과 불상을 보며 전쟁 승리 및 평화를 염원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소배압이 개경으로 군사를 몰아 2차 여요전쟁처럼 현종을 생포하러 진격해오고 현종이 몽진 대신 백성들과 함께 방어를 하기로 결정하면서, 이 결정을 백성들이 따를지 아닐지 여러 생각이 많은 현종을 보고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분노가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지 승리를 갈망하는 마음이 살고 싶은 욕망을 누를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내 손을 잡으며 '그래도 백성들이 폐하를 따른다면 그건 아마 폐하에 대한 믿음 때문이고, 이제껏 걸어온 길이 백성들에게는 전란의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이였기 때문'이라며 다시 한번 격려한다.

2.20. 31회

지위가 연경궁주로 등장한다. 아이는 유모에게 맡긴 채 여동생들과 궁인들을 동원해 백성들에게 입힐 갑옷을 만들다가 원화황후가 등장하자 '전하'라면서 예를 갖추고 이후 원화황후가 갑옷을 만드는 광경을 지켜본다.[18] 그러다가 현종의 명으로 궁인들이 모두 성 밖으로 나가 거란의 도통 소배압을 기만하는 작전을 쓰려고 하자 원화황후와 여동생들과 궁인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이어 자신들과 백성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현종 일행과 합류해 소배압을 퇴각하게 했다.

2.21. 32회(최종회)

현종 및 원화황후, 동생들 그리고 대신들과 함께 귀주 대첩을 이기고 돌아온 강감찬 및 장수들을 맞이하러 간다. 현종이 아들과 놀아준 뒤, 왕흠을 태자로 책봉한다는 말을 듣는다. '왕흠이 황제가 되면 궁주는 태후가 된다'는 말을 듣고는 '궐 밖에서 자란 여인이 태후가 되어도 되는 것이냐'며 말한다. 현종은 '자신도 궐 밖에서 자랐다'며 '이제 고려는 궐 밖에서 자란 사람의 나라'이고 '왕흠이 훌륭한 황제가 되게 잘 키워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19]

3. 묘사

원작 소설에서는 제2차 여요전쟁 당시 20대라서 현종보다 연상이며 근심하는 현종을 보고 차를 마시면서 천천히 밥을 먹으라고 말하는데, 이후 셋째 동생이 '세 자매가 모두 왕후가 될 운명'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언급하자 얼굴이 빨개지며, 현종을 어려워하다가 금세 잘 대화하게 되었다고 언급된다. 비중이 적었던 원작 소설에 비해 드라마에서는 초반부인 5회부터 말을 타면서 등장하고 아버지인 김은부와 함께 중앙 집권 체제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던 11세기 초 고려의 상황을 상세히 조명하는 역할을 하며, 한국사에서도 비교적 여인들에게 개방적이었던 고려 사회의 풍토 역시 잘 보여주는 인물로 나온다. 지나치게 왕실 중심적인 관점에서 황제의 권위만을 높이려는 원정황후와 대비를 이루어[20] 현종의 치세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초반 등장 할때마다 은근히 언급되는 고려 성종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15회에 역사 기록에 조금 각색[21]되어 현종에게 옷 지어 올리는 과정을 통해 현종과 인연이 닿기 시작함으로써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현종의 새로운 동반자가 되는지도 흥미롭게 지켜봐야 하는 요소로 여겨 졌다.

3.1. 17회 이후에서의 비판

그런데 2차 여요전쟁이 끝나고 이 시기부터 원성황후의 기록이 거의 전무한 17회 이후 작가가 원성황후의 캐릭터를 붕괴시킨다. 17~18회에는 공주와 충주 사이를 말을 타고 과감하게 혼자서 정보를 수집하는 행동을 보여주는데 안 그래도 아버지인 김은부가 계획한 '호족 척결'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지방 개혁으로 인해 중앙 조정과 지방 할 것 없이 반발이 나왔고, 당시 충주 호장이였던 박진은 더 나아가 일종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으며, 2차 여요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 16회였는데 압록강 너머로 물러간 거란도 다시 침공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아녀자가 호위도 없이 저렇게 정보를 수집하러 가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는 지적이 많았다.[22] 19회부터 궁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작가의 생각과 달리 사실상 원정황후 캐릭터를 붕괴시키며 들어가버린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고 이때는 박진이라는 가상인물에 대한 비판보다 실존인물인 두 황후의 각색된 연출 및 과한 비중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역사 기록에도 몇 문장 밖에 없고 거란과의 또다른 전쟁 연출이 아닌 두 캐릭터의 서사에 대한 비중을 많이 차지하게 됨으로써 일명 '고려궐안전쟁, 고려여인천하' 등의 비판이 일어나게 된다.[23][24] 이 후 21회부터는 아버지 김은부의 거란 사신으로 가서 고초를 겪는 이야기 전개가 이어지는데 아버지가 거란에 억류당하기도 했고, 부녀간 보고 싶은 마음이 연출되기도 했으며, 한편은 원정황후가 현 상황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위로함으로써 대립이 드디어 끝나나 했지만, 작가는 뜬금없이 원화황후와 대립을 연출한다. 여기에 억지로 원정황후 다시 엮음으로써 작가에 대한 비판이 계속 된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르는 작가의 계속되는 원성황후에 대한 각색 행위28회에 정점을 찍는데 김훈, 최질의 난을 진압하기 전의 과정이 주로 연출되고 작가가 실제 기록과 달리 이자림의 공을 사실상 완전히 가로채는 각색한 전개를 보여준다. 지채문과 함께 원성황후가 북방으로 올라가 맹활약했다는 창작은 천추태후와 유사한 접근이다. 원성황후는 전하기만 했을 뿐이라 해도, 묘사상 계책을 이자림이 주도적으로 낸 게 아니라 이자림, 지채문, 원성황후 등이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연회를 이용하는 것으로 흘러가고 29회 초반에 이자림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자림의 가장 중요한 활약이 축소된 건 틀림없다.[25] 여기에 박진을 화살로 맞춰 죽이는거 아닌가 하는 예측이 있었으나 사찰에서 조용히 기도 중이였다. 이 후 시간이 1018년으로 3차 여요전쟁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바뀌고, 드디어 원정황후와의 갈등이 해소되고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후반부 작가의 고삐 풀린 말 마냥 캐릭터 붕괴, 각색, 뇌절 3중주의 끝 원정황후의 병으로 인한 요절이였다. 이 후에는 퇴장한 원정황후가 했던 역할을 이어받아서 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4. 총평

사실 작가가 후반부가 시작되는 17회부터 보여준 박진이라는 가상인물이 급있는 악역이 되면서 극을 활개치고 다니면서 드라마 전개를 지나치게 흐트리고 다녔다면, 실존인물인 원성황후는 작가가 역사적 승리자로 생각했는지[26] 캐릭터 각색이 좋은 방향으로 버프가 많이 되어서 나오게 된다. 만약 작가가 이런 일차원적인 생각을 가지고 캐릭터 밑그림을 그린거였다면, 진짜 승리자인 문종의 어머니이자 원성황후의 동생인 원혜황후를 밀어 주었어야 했다.[27] 아무튼 이런 캐릭터 각색을 극의 진행 방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나왔으면 별 말이 없었겠지만,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역사 기록을 빼앗아서 하든지,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든지 등 지나칠 때가 가끔 있다. 이런 지나친 각색을 두고 작가가 전작 태종 이방원 원경왕후 참고해서 각색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나오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일종의 해결사 능력을 그다지 좋게 볼 수가 없는데 작가 때문에 악역이 아님에도 비호감 캐릭터로 보여지게 된 원인이다. 배우 입장에서는 후반부 시작과 함께 조연 중에 비중도 많아져 고생해서 촬영했겠지만,[28] 정작 캐릭터 이미지가 악역 급으로 거부감이 많아져, 작가로 인해 고생이 빛바랜 경우이다. 그래도 전작과 방영시기 상으로 연속 사극 출연을 한 셈인데, 사극 배역 소화가 가능하다는 발견을 했다는 게 성과라면 성과라고 볼 수 있다.[29]

5. 어록

저 사람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옵니까? 거란 놈들, 물리칠 수 있는 것이옵니까? 황제 폐하께선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분이시라던데...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현종에게 머뭇거리면서 조심스러운 태도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폐하. 어떤 여인이 (왕에게 입을 어의를) 옷을 지어 바치겠다는 것은, 그 여인의 몸과 마음도 바치겠다는 뜻이옵니다. (뭐요?) 예로부터 집안의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집주인의 그의 딸을 내어준다 하였사옵니다. 일개 빈객도 그리 맞이하는 것이 관례이거늘 황제 폐하를 맞이한 절도사가 어찌 그 예를 다하지 않겠사옵니까? 부디... 신하의 정성을 생각하시어 저를 받아주시옵소서.
(현종이 화를 내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폐하. 용서해주시옵소서. 제가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어서!) 폐하. 제 아비는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다 제가 자청하여 벌인 일이옵니다. (듣기 싫소! 어디서 거짓을 고하는 거요!) 정말이옵니다. 저 혼자서 벌인 일이옵니다. 제 아비는 아무 죄가 없사옵니다. 딸을 팔아 폐하의 환심을 산다는 것은... 생각해내지도 못하는 사람이옵니다. 그 고지식함이 답답하여 제가 스스로 나선 것이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정말이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제 목을 베시더라도... 제 아비만은 벌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제 아비는 그저... 이 고려만을 생각하는 못난 충신이옵니다.

6. 여담

  • 드라마의 초반 등장인물 소개란에서는 '원성'이라는 이름으로 소개가 되었으나 드라마에서 이렇게 나오지는 않는다. 엄연히 원성황후의 '원성'은 해당 인물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붙여진 시호였고, 사서에서도 이름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제작진이 급히 '김씨'라고 성(姓)만 표기하는 것으로 수정하였다.[30]
  • 실제 역사에서 원성황후는 현종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32], 후에 현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이 각각 덕종(9대)과 정종(10대)으로 즉위하면서 태후로 추존되었다. 그러나 덕종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정종은 젊은 나이로 승하했을 때 아들들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문종에게 보위를 넘겨주었다. 한편,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11대)는 동생 원혜황후가 낳은 아들이자 원성황후 자신에게는 조카이면서 사위가 된다.
  • 종영 이후 방영 된 고거전 스폐셜편 에서 촬영 중 자신 탄 말에게 똘똘이 라는 애칭을 붙여줬다고 했다.


[1] '연경원주'가 되어야 하나 해당 직위를 받은 것은 1016년의 일이다. 처음 입궁할 때였던 19회와 20회는 다른 사건들의 전개 상황으로 보아 1011년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아직 아무런 작위를 받지 못한 상태이다. 21회에서 작위가 '김씨 부인'으로 나왔으며, 왕비로 책봉된 것은 전쟁이 다 끝난 1022년이다. [2] 원성왕후가 현종의 왕비로 책봉된 시기는 제3차 여요전쟁으로부터 3년 뒤인 1022년이다. [3] 전 회차에 보여준 성격이 어디 안 가는데, 황제의 몽진을 '걸음아 나 살려라'라고 표현 한다. [4] 이미 개경이 함락되고 황제가 몽진하는 상황에서 동원령은 고려를 지키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런데도 비협조적이라는 것은 외적에 나라를 넘겨주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따르는 군사도 없고 인맥도 없는 김은부의 일갈은 공허했고 모욕만 당했다. [5] 현종이 분노한 이유가 바로 직전에 원성황후의 어머니의 입을 통해 나온 원성황후의 평소 생각인 '권력자에게 딸을 팔아 출세하는 것' 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안 그래도, 호족들의 횡포로 인해 억울하게 딸을 빼앗긴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는데,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공주 절도사 김은부가 부패한 호족들처럼 똑같이 딸을 바치면서 출세하려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배신감으로 인해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6] 현종과의 대화에서 그녀가 "폐하. 어떤 여인이 (왕이 입는 어의를) 옷을 지어 바치겠다는 것은 몸과 마음도 바치겠다는 뜻이옵니다." 라고 말한 것을 고려하면, "(내가 현종에게)옷을 마저 짓겠습니다. 약속한 일이니 해드리고 싶습니다."는 이미 본인의 마음이 현종에게 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녀가 현종에게 만드는 어의(왕의 옷)는 왕을 향한 충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며, "당신은 나의 왕이 될 사람이다." 처럼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종이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왕비의 신분으로 입어야 할 새로운 옷을 직접 하사해줄 것이다. 이처럼 왕이 여인에게 새로운 옷을 하사해주게 되면 그동안 입고 있던 옷을 침소에서 벗은 뒤에 하사받은 옷으로 갈아입게 되는 과정으로 '왕의 승은을 입는다.'의 중의적인 의미도 숨어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이현운이 고려를 떠나 거란의 관복을 입는다는 것은 고려를 배신했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왕이 신하들에게 관직을 하사하면, 신하들은 충성스런 왕의 관료가 되어 제복을 입고 일을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드라마에서 의복은 '신분을 나타내는 복선' 으로 쓰이는 것이다. [7] 실제 현종의 아내가 된 것은 제2차 여요전쟁 와중인 1011년이며, 아들 왕흠(후에 덕종)을 낳은 뒤인 1016년 '연경원주'에 봉해졌다. [8] 15회의 각주에서 설명한대로, 김은부의 큰 딸 김씨가 현종에게 어의를 바친 답례로 황후의 정복을 하사해주면서 황제의 승은을 입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의복은 '신분을 상징하는 복선'이 담겨있다. 이는 현종이 몽진을 갔을 때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김은부 일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현종이 김은부 일가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를 설명한 듯 하다. [9] 본래 역사대로라면 1016년에 '연경원주'에 책봉되었고, 1018년 원정왕후가 사망한 뒤에는 '연경궁주'가 되었으며, ' 자신이 낳은 첫 아들이 태자에 책봉된 1022년에 왕후에 책봉된다. 하지만 원정황후의 어머니인 성종의 제2비인 문화왕후 또한 지방 호족의 딸이라서 '용손'이 아니다. 이에 해당되는 부분은 해당 회차의 역사 탐구 문서 참조. [10] 다만, 이 부분은 너무 지나치게 각색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조정 대신들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황제의 부인을 감히 궁녀 따위가 몰래 비웃으면서 무시했다가 입소문으로 퍼져서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당장에 붙잡혀서 대역죄인으로 모가지가 썰리고 효수되어 저잣거리에 걸리던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11] 물론, 당시 내부의 반란을 맞딱뜨린 거란으로서는 고려를 바로 침공할 여력이 없었다. [12] 해당 궁녀는 김씨 부인이 궁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녀를 보좌했다. [13] 다만, 지난 회차와 더불어 이 모습을 원정황후가 보거나 듣게 되면서 아직까지 대립이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14] 일단 원정황후와의 갈등 관계가 청산되어야 하고 부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현종을 잠시 떠나는 설정을 했다. 사실 마지막 인사가 아님을 역사적 사실이 말해주고 있다. [15] 다른 성에서 군량미를 받으러 온 군사로 위장했다. [16] 실제 역사에서 이런 제안을 한 건 이자림이다. 이자림은 현종에게 유방이 운몽에서 연회를 베풀어 한신을 제압한 운몽지유의 고사를 현종에게 말하며 김훈, 최질의 난을 진압할 계책을 입안했고 그로 인해 현종의 신임을 얻어 활약한 뒤 현종의 배향공신까지 오른다. [17] 차남 왕형은 일단 미등장 상태며 임신한 상황도 아니였다. [18] 이때 장남 왕흠 관련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사실 이때는 차남 왕형이 태어나고 얼마 뒤 3차 여요전쟁이 발생했고 지위도 연경궁주로 나오는데 차남 관련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애초에 차남은 등장 하지도 않았으며, 후반부는 고증이 거의 엉망이니. [19] 물론 원성황후는 현종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생전에 태후가 된 적이 없었고, 후에 두 아들이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태후로 추존되었다. [20] 물론 원정황후도 이후 불리해진 전황을 보고 몽진에 동행하면서 백성들의 현실과 현종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21] 이때부터 아버지 김은부와 함께 캐릭터가 각색이 되기 시작한다. [22] 18회가 끝난 시점에 작가가 말통사고를 비롯해 현종을 중심으로 선 넘는 행위들을 보이자, 원작자가 작가에 대해 맹비난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역사 왜곡 논란으로 문제가 커지기 시작한다. [23] 작가가 무려 17~20회 동안 빌드업하면서 원정황후와의 대립을 후반부 주요 스토리 중 하나로 이끌려고 하다가 오히려 시청자들의 공감도 못 얻고 실패로 끝나버린다. 애초에 기록도 없는 부인들 간의 갈등보다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훨씬 공감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24] 이런 전개로 인해 원정황후는 캐릭터에 대한 동정 여론이 원정황후 퇴장 후에도 존재했던 반면에, 원성황후는 캐릭터 이미지가 이때부터 나락을 가기 시작한다. [25] 이 28회의 전개가 그동안 쌓여 있었던 원성황후에 대한 이미지에 막타를 친다. 이 후에는 최종회까지 원성황후의 비중이 줄어들지만 결국 이미지 회복을 하지 못한다. [26] 원성황후는 현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는 덕종, 정종의 어머니이다. [27] 물론 원성황후가 세 자매 중 장녀라서 원정왕후와의 대립구도를 부각시킨 것도 있다. 그리고 드라마와는 별개로 원성왕후의 아들 덕종, 정종 역시 문종만큼 재위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성정이 좋고 통치를 잘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28] 작품을 준비하면서 승마를 배웠다고 한다. [29] 사극 출연은 비밀의 문 이후 10년만이다. [30] 실제로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도 똑같이 인경왕후 인현왕후를 본명처럼 '인경', '인현'이라고 불렀다가 시청자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31] 그런데 이것이 그간 사극에서 여성이 갑옷을 입고 투구도 쓰지 않은 채 활을 쏘며 전투에 참전하는 장면이 고증 오류로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었고 당장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전작이 이러한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드라마 특성상 사소한 장면도 복선이 되어 훗날 다른 장면으로 회수되곤 해서 나중에 제3차 여요전쟁 중 금교역에서 벌어지는 전투 전개과정 중에 갑옷을 입고 등장해 활을 사용하는 등의 개입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았다. 다행히 27회에서 지채문을 구하는데 활을 사용했고,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애초에 계속 홍보 중이였던 후반부 귀주 대첩이란 본작의 최대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또 다른 악재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32] 참고로 동생 원혜왕후는 그보다 앞선 102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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