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위치한 동명의 제단에 대한 내용은 천단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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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구단 또는 원구단은 유교의 천자가 하늘인 상제(上帝)와 오방제(五方帝)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환구(圜丘)는 《 예기》에 기록된 천자가 행해야 할 천제(天祭)이다. 이 제례를 지내는 본단을 한자로 圜 丘 壇라 쓰는데, '원구단' 또는 '환구단'이라 읽는다.환구단은 중국의 황제가 유교의 예법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 이외의 국가들은 모두 오랑캐로 보며 오직 자국 군주만이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같이 유교를 수용하고 외왕내제의 성격을 가진 나라들은 모두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聖域)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호텔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원구단 본단(本壇)은 없어지고, 대신 원구단의 상징물 격인 '황궁우(皇穹宇)'만 남았다. 현재 원구단 본단 자리에는 웨스틴 조선호텔이 세워져 있다.
일반적인 동아시아 전통건축물과 달리 환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다. 이는 '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동아시아에서는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이다.
2. 명칭
상단의 이유로 인해, 한국에서 환구단은 '원구단'으로도 불린다. 圜이 '둥글 원', '돌 환' 두 가지 훈음으로 읽으면서 생긴 혼란이다. 원구단이라고도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 기사 참조. 하지만 그 이유는 사실은 간단하지 않다. 본래 '환'은 '원'의 이체자로 구별없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건물이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다. 이 글자가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1910년 발행된 구한국은행권을 보면, 한자로 '圜'이라 하고 한글로는 '환'이 아니라 '원'이라 표기하고 있다. 즉, 애초에 '圜'은 '원'으로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53년 화폐개혁시 화폐단위를 '圓'에서 '圜'으로 바꾸고 음독을 '환'으로 변경한 이래 사람들이 '원구단'을 '환구단'으로 바꾸어 읽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4년 11월 24일, 1925년 6월 25일 자 《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분명히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다.영어로는 의역해서 Temple of Heaven, Seoul이라 하기도 한다. # 이는 중국 북경의 천단(天壇)과 같다.
3. 역사
3.1. 삼국시대
한국에는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전래되기 전에도 다양한 종류의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있었다. 부여, 고구려, 백제 등 여러 왕조에서 동맹, 수신, 영고 등 행사에서 하늘과 오방의 신,[1] 각국의 건국자들에게 제사를 올렸다.지금의 경주시 나정 자리로 추정되는 신라의 신궁 역시 제사 지낸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논란이 있지만, 황궁우와 유사한 천원지방을 묘사한 팔각형 건물 터가 나왔기 때문에 천신 숭배 시설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도 있다.
시간이 흘러서 유교, 도교, 불교가 전파되어 전통문화와 융합하면서 도교식 제사인 초제[2]나 불교식 행사 겸 제사인 팔관회, 연등회 등이 등장했다.[3] 특히 유교식 제사가 가장 중요하게 자리잡아 환구단, 종묘, 사직,[4] 방택[5] 등 유교적 제사시설을 이 땅에 세웠다.
3.2. 고려시대
상천(上天)의 덕은 무성(無聲)이며
생물이 그로 인해 살아갑니다.
나라의 근본은 식량에 있으며
사람이 그로 인해 살아갑니다.
봄을 맞아 수확을 기대하며 제사 드립니다.
상제(帝)의 은혜가 아니면 민(民)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고려 왕조 시절 원구단에 사용한 상제의 축문. 이규보가 썼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40권 중 발췌.
생물이 그로 인해 살아갑니다.
나라의 근본은 식량에 있으며
사람이 그로 인해 살아갑니다.
봄을 맞아 수확을 기대하며 제사 드립니다.
상제(帝)의 은혜가 아니면 민(民)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고려 왕조 시절 원구단에 사용한 상제의 축문. 이규보가 썼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40권 중 발췌.
봄이 때 맞춰 오는 것은
남교(南郊)[6]에서 제사지냈기 때문입니다.
황열조(皇烈祖)[7]를 생각건대
공이 막대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저 하늘과 같이 제사지내니
예의가 옛 가르침에 맞습니다.
이제 강림하셔서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저흴 도와 매 해 풍년이도록 도와 주십시오.
- 동국이상국집 전집 40권 중 발췌. 배제(配帝) 태조 왕건에게 바치는 축문.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중국식 환구단은
고려
성종 때 최초로 지어졌다. 궁궐의 남쪽에 지어졌고 고려사를 보면 원구단의 건축 기록을 알 수 있다.남교(南郊)[6]에서 제사지냈기 때문입니다.
황열조(皇烈祖)[7]를 생각건대
공이 막대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저 하늘과 같이 제사지내니
예의가 옛 가르침에 맞습니다.
이제 강림하셔서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저흴 도와 매 해 풍년이도록 도와 주십시오.
- 동국이상국집 전집 40권 중 발췌. 배제(配帝) 태조 왕건에게 바치는 축문.
하늘의 신 "상제(上帝)"와 오제(五帝), 그리고 배제(配帝) 태조 왕건에게 제사지내며 기우제를 지냈다. 국왕이 즉위할 때, 왕태자를 책봉할 때도 종묘와 환구단에 제사지내 하늘과 건국자에게 이 소식을 고하였다.
위에 보듯이 봄 여름 등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제문을 보면 고려는 상제, 오방제, 배제(配帝)[8]에게 각각 제문을 올리고 제사 지냈다.
환구단은 원 간섭기에 들어서고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이는 원이 한족 왕조가 아니어서 천제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3.3. 조선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는 환구단 폐지를 요청하는 유학자들의 상소를 거부하고 환구단을 "원단"으로 이름만 바꾸어 계속 시행한다.이후 원단은 태종 대에도 유지가 되나 성리학자들의 항소로 인해 결국 폐지된다. 나중 세조대에 잠시 부활하나 오래 못가 폐지된다.[9]
하지만 폐지 후에도 남교(南郊)[10]의 제단이란 뜻인 '남단(南壇)’ 또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으로 이름만 바꾸고 제사를 계속 지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자만이 할 수 있으므로 제후국인 조선에서 이를 거행하는 것은 안 된다며 끊임없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은 사대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제사를 지냈다. 용산에 원조 환구단 있었다? 아시아경제
3.4.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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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대한제국 시기 사진. 왼쪽의 기와집이 황궁우, 오른쪽의 매끈한 지붕을 올린 제단이 환구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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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 1907년 대한제국 시기 사진. 환구단의 난간이 보이고 정면에는 황궁우가 보인다.[11][12] |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이 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 때부터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부상하게 된다.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동지(冬至)와 새해 첫날에 제천(祭天) 의식을 거행하였다.
1899년(광무 3년)에 환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 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하였고 1902년(광무 6년)에는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석고단(石鼓壇)' 을 설치하였다.
3.4.1.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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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온전한 대한제국 환구단 상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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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우와 환구단의 3D 복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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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환구단 배치도 |
3.4.1.1.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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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환구단 정문 |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 측칸을 좁게 조정하였다. 기둥 위에는 출목을 갖춘 이익공식 공포를 사용하였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던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사용한 점도 특별하다.
3.4.1.2. 황궁우(皇穹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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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환구단 황궁우 |
1899년(광무 3년) 환구단 안에 세워진 환구단의 상징물로 팔각 3층 건물이다. 안에는 신위판들이 봉안되어 있고 천장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칠조룡(七爪龍)과 다른 팔조룡 조각이 새겨져 있다. 중국에서는 삼조룡은 백성, 사조룡은 제후, 오조룡이 황제인데 경복궁 칠조룡은 상수로 여겨지는 홀수로 오조룡보다 상급인 칠조룡인데 이는 대한제국 황제와 황족(皇族), 황실을 상징한다. 짝수인 황궁우의 팔조룡은 팔작지붕과 더불어 어떠한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제의 환구단 철거 이후에도 그대로 존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왔다. 주변에 조선호텔 등 여러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버린 위치가 위치인지라 삭막함 사이에서 홀로 아늑한 멋을 풍긴다. 서울 상공을 통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빌딩숲 속으로 아기자기하게 보여 갸륵한 느낌이 난다는 사람도 있다.
2011년 10월 3일 KBS 9시 뉴스를 통해서 황궁우에 관한 보도내용이 방송되기도 하였는데, 뜻밖에도 황궁우 정원이 모래바닥으로만 되어있는 한국 전통방식이 아닌 잔디 형식의 일본식 조경으로 꾸며져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일제가 과거에 호텔을 짓는 목적으로 환구단 본단을 철거하고 황궁우만을 남기게 되고나서 생겼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게다가 일제가 환구단 입구 주변에 여러개 세워놓았다는 석등(石燈)도 논란대상으로 올랐으며 문화재청은 추후 일제가 세웠던 일본식 석등들을 모두 철거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 밖에 일제가 남겨놓은 잔재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뿐 아니라 팔각정 역할을 하는 황궁우 역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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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황궁우 마당 복원 이전(왼쪽)과 이후(오른쪽) 비교 사진 |
내부를 공개하지 않아서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황궁우의 내부시설은 변형되어 있다. 일월성신의 위패도 시멘트 블럭 위에 놓여져 있는 실정이다.(2013년 1월 기준)
3.4.1.2.1. 위패
제1단: 황천상제(皇天上帝), 황지기(皇地祇),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제2단: 대명(大明), 야명(夜明)
제3단: 북두칠성(北斗七星), 오성(五星), 이십팔수(二十八宿), 오악(五嶽), 사해(四海), 명산(名山), 성황(城隍), 운사(雲師), 우사(雨師), 풍백(風伯), 뇌사(雷師), 오진(五鎭), 사독(四瀆), 대천(大川), 사토(司土)
3.4.1.3. 본단(本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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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사라지기 이전 본단의 보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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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복원도 |
3.4.1.4. 석고단(石鼓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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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석고단 |
3.4.1.5. 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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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환구단 삼문 |
3.4.1.6. 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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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환구단 답도 |
3.5. 일제강점기
1910년 8월에 한일병합이 체결된 후 대한제국은 없어져버렸고 황제와 조정이 없어진 이상 환구단은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의 환구단은 1913년 일제가 조선의 왕이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은 불충이며 천황이 제를 올려야 한다고 하며 환구단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을 신축한다는 조선총독부의 훈령을 내려 결국 일제에 의해 철거됐고, 황궁우와 석고단만 남긴 채 영역도 축소되었다. 일제가 신성한 제단을 부수고 그 터에 호텔을 지은 이유는 예로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제단 옆에 호텔같은 시설을 짓는 것이 금기되어 왔기에 환구단을 부수고 호텔을 지어 대한제국을 능멸하려 한 것이다.환구단이 철거된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는데, 이 호텔은 해방 후인 1968년 환구단 부속 건물을 부수고 현재의 웨스틴 조선 서울로 이어 나가게 된다.
3.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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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1959년 4월 8일 촬영된 조선호텔 사진 |
1945년 광복 이후 제정복고는 되지 않았다. 환구단은 그나마 남아있던 부속 시설들마저 다른 수많은 문화재들처럼 헐리고 황궁우와 석고, 본단 석재 일부만 남아 1967년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제단(祭壇) 자체를 복원하지 못한 채 황궁우와 석고단을 중심으로 옛 환구단 시설의 흔적을 남겼는데, 이후 서울 도심이 발달하고 도로가 근처에 새로 나는 등 변화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지금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웨스틴 조선 서울 앞에 위치한 탓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나 환구단을 모르는 사람들이 문화재가 아니라 조선호텔의 정원으로 여긴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엄연한 국가문화재이자 보호시설이기 때문에 문체부 또는 문화재청과 서울시 등에서 관리하므로 신세계조선호텔과는 무관하다.
일각에서는 아예 웨스틴 조선 서울을 이전하여 환구단 본단(本壇)을 복원하자는 주장을 한다. 완전복원을 하려면 호텔의 이전이 불가피하다.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은 조선호텔을 을지로 미공병단 부지나 신당동 기동대 자리 등에 대체부지를 마련해 이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환구단 철거 이후에 환구단의 정문인 '환구대문' 또한 흔적도 없이 철거된 줄 알았지만 2007년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삼양교통 차고지 앞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에서 발견되었다. 이런 영문을 모른 채 호텔 측에서 아예 환구단 정문을 시내버스 출입구로 사용했다고 한다. 발견되었을 당시 현판은 없었고 '백운문'이라는 현판이 대신했는데, 건축방식을 조사해보니 환구단 정문이라고 밝혀졌다.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이 재개발되면서 정문을 2009년에 환구단 근처로 이전하였으나, 원 위치는 웨스틴조선의 입구 방향이기에 도로 사정상 완벽히 복원은 못하고 서울광장 방향에 옮겨 놓았다. 기사
환구단의 부속 시설인 석고전은 환구단 철거 후 박문사로 옮겨져 종각으로 이용되었고 광복 후에는 창경궁 야외무대로 쓰이다 창경궁 복원 공사로 훼철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조사한 결과, 서오릉과 창덕궁에서 부재가 발견되었다. 다만 종각과 야외무대로 사용되며 내부가 변형되고 콘크리트를 발라 놓아서 일부의 부재만 남아있다. 문화재청은 작년에 석조전 부재 실측 및 복원을 위해 긴급 용역을 입찰했다.
환구단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연중무휴로 무료 개방된다.
신령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 내부는 구에서 운영하는 문화유산탐방 및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볼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15년 5월 5일부터 2015년 12월 31일까지 "황제국의 상징 환구단과 환구제" 특별전을 개최했다. 대한제국 환구단에서 사용하던 유물 몇 가지는 최초 공개이며, 황궁우 내부 모형도 전시되었다.
[1]
동, 서, 남, 북, 중앙의 신들. 다른 이름으로 오제(五帝), 오방제라고한다.
[2]
도교의 신과 별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 신라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존재하였다.
[3]
불교의 천신인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신 절인 제석원/제석사를 짓기도 했다.
[4]
땅의 신과 농사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와 그 제단을 의미한다.
[5]
원구가 하늘에 제사하는 곳이라면 방택은 땅에 제사하는 곳이다. 보통 둘을 같이 설치한다.
[6]
전통적인 환구단을 세우는 위치.
[7]
열조는 태조의 존칭, 황은 ‘높으신’이라는 뜻이다.
[8]
배제의 제는 신을 뜻하는게 아닌 군주를 뜻한다. 즉 같이 제사 지내는 황제(皇帝), 태조 왕건을 말한다.
[9]
이 때부터
소격서의
초제와 마니산
참성단의 단군제를 올릴 때
옥황상제 위패를 놓아 눈 가리고 아웅식 천제를 지냈으나
초제는 이단인 도교의 제사라며 유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격받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완전히 사라졌고, 참성단 제사도 비록 단군을 기린다는 유교적 효 이념을 내세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면했지만 역시 잦은 공격을 당했다.
[10]
남쪽 교외라는 뜻으로 환구단은 남쪽 외진 곳에 설치한다. 고려도 '남교'란 표현을 썻으며 중국의
천단도 북경성 남쪽 교외에 있다.
[11]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이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12]
이 사진을 촬영한 장소가 바로 현재 웨스틴 조선호텔 건물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대략적으로 현재 조선호텔 로비층 바와 레스토랑 “나인스 게이트”에서 보이는 전경과 비슷하다.
[13]
덕수궁의 옛 이름이다.
[14]
남별궁 자리에 환구단을 세운 이유는 더이상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뜻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