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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 아이돌 걸그룹 | ||||||
오냥코클럽 (1985 ~ 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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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킷코 (1998 ~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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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링!!! (2006 ~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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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ING!!! (2017 ~ 2019) |
1. 개요
오냥코클럽의 싱글과 파생 솔로, 유닛 싱글 자켓 모음.
おニャン子クラブ
1985년부터 1987년에 걸쳐서 활동했던 일본 아이돌 그룹으로, 1980년대의 대표적인 일본 아이돌 그룹 중 하나다.
AKB48의 프로듀서로 알려진 아키모토 야스시가 단독으로 기획했던 아이돌로 알려져있지만 어디까지나 아키모토는 작가진 중 한 명이었고 프로듀스 자체는 후지테레비 '유우야케 냥냥'[1]의 프로듀서진이 공동으로 맡았다. 멤버 닛타 에리가 밝힌 오냥코클럽과 AKB48과의 차이점은 'AKB48 멤버들 쪽이 프로 의식이 높다는 것.' 자신들은 스스로 일반인에 가까운 신인이었기때문에 방송에 나갈 땐 프로의 영역에 신인이 신세지는 느낌으로 출연했다고 회상했다. 오냥코클럽을 벤치마킹하여 만든 모닝구 무스메의 프로듀서인 층쿠도 고교시절 오냥코클럽의 팬이었다고 한다.
2. 특징
오냥코클럽 디스코그래피.
당초에는 후지 테레비의 버라이어티 방송인 유우야케 냥냥(夕やけニャンニャン)이라는 프로그램을 런칭하면서 탄생된 일종의 이벤트성 아이돌 그룹이었다.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은 멤버들에게 연예계 활동보다는 학업을 우선시할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2] 또한 방송 관계자들에게도 비록 멤버들이 방송에 출연하지만 아직 '고교생'이라는 본분을 확실하게 인식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본업은 고교생이었으며 그들의 역할은 방송 내에서 사회를 맡은 인기 개그맨 톤네루즈와 함께 방송 진행을 돕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룹과 멤버들 자체의 인기가 높아져감에 따라 해당 방송은 오냥코 클럽이 메인이 되어버렸기에 당시 메인으로 MC를 진행한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이 방송을 너무 그만 두고싶었다고 한다.[3]
당시 '냥냥'이라는 프로그램 이름과 후술할 변태적인 노래 때문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냥냥이란 말 자체가 성적인 은어로 쓰였기 때문에다.[4]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의 여성 아이돌은 말 그대로 '우상'에 가까운 존재였으며 노래도 잘 하고 외모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지역에서 제일 예쁜 아이가 아이돌이 된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으나 오냥코클럽은 이런 여성 아이돌의 개념을 비틀어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조금 신경쓰이는 동급생이 방과후 부활동의 연장으로 방송에 출연한다는 컨셉으로 결성되었다. 멤버는 매주 열리는 방송 내 '아이돌을 찾아라' 코너에서 매주 5인을 선정해 5일간 오디션을 실행하는 방식으로 뽑았으며 오디션을 본 멤버 중에는 아예 일반인도 있었고 연예 기획사에 소속된 멤버도 있었다. 오디션 합격 후에도 소속사가 있는 멤버를 제외하면 모두 후지 테레비 사단 하에 있는 무소속 신인이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의 멤버들은 오냥코가 해산한 뒤 일반인으로 돌아갔으며 이미 소속사에 속해있던 10명의 멤버들은 이후 솔로 데뷔 등으로 연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카와이 소노코, 와타나베 미나요, 쿠도 시즈카, 타카이 마미코, 이와이 유키코, 아가즈마 카요 등은 오냥코 출연 전부터 이미 연예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었다.
1985년 4월 연예계 데뷔 후 3개월만에 내놓은 전설의 데뷔곡 ' セーラー服を脱がさないで'가 공전의 히트를 친 이후 1987년까지 약 2년 반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사회 현상이라 불릴 정도의 인기를 얻었으며, 본진인 후지 테레비의 음악 방송 뿐만 아니라 타방송사의 ' 더 베스트 텐'과 같은 유명한 음악 방송 출연을 성사시키고, '묘조(明星)', '헤이본(平凡)'등 아이돌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등 아이돌 전성기의 한가운대에서 일약 급물살을 타며 본래 타겟인 일본의 남중생, 남고생 들에 한정되지않고 세대를 아우르며 폭 넓은 지지를 얻었다. 당시에도 도가 지나친 열성팬들이 많았는지, 최근 방송에서 멤버였던 쿠도 시즈카가 풀어낸 오냥코 시절의 일화에 따르면,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신이 버린 쓰레기들이 일렬로 정리되어있었으며 살았던 맨션 앞에 버린 쓰레기들도 전부 일렬로 늘여져있어서 정말 기분나빴다고 한다. 폭주족이었던 팬들도 있었는데, 서로 다른 조직의 폭주족들이 자신이 타고 갈 차를 따라와 누가 먼저 제칠지 싸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최초 멤버를 뽑을 때 노래나 댄스 실력, 외모보다는 친근감을 우선해서 뽑은 의도적인 전략은 완벽히 적중해서, 멤버들의
이러한 인기가도에서도 홍백가합전에는 한 번도 출장한 적이 없는데, NHK 관계자에 따르면 1985년 당시 사전조사에서 시청자 대상 투표수가 적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상술되었듯 주요 팬덤이 성인이 아니라 인구도 적고 구매력도 받쳐주지 않는 십대 남학생층과 여학생층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6] 멤버 중 쿠도 시즈카만이 오냥코클럽이 해산한 후인 1988년 솔로로서 처음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그러나 86년을 기점으로 초기 멤버들이 학업 등의 이유로 탈퇴, 새로운 멤버들은 계속해서 영입되었고, 후기 멤버들로 결성된 '우시로가미 히카레타이(うしろ髪ひかれ隊)'도 히트하였으나 차츰 붐이 꺼져감에 따라 빠르게 해산을 고하게 된다.
3. 해산
1987년 6월 15일 유우야케 냥냥 방송 내에서 해체를 발표하고 9월 20일 요요기 홀에서 콘서트를 열고 해산.해산 기념 전국 종단 파이널 콘서트
이 콘서트는 전국에서 3만명 가까운 팬들이 모였으며 티켓을 구하지못한 수백명의 인원이 인근 하라주쿠의 인도교를 메워 콘서트장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일동이 하나가 되어 멤버들을 보내준 팬들 사이에선 전설로 통하는 파이널 콘서트로 남아있다. 그러나 공연 마지막 앵콜이 울리던 사이 친위대를 포함한 일부 팬들이 폭주하여 입구 유리를 깨거나 의자를 부수는 난폭 행위를 일으키고 회장 밖에 있던 팬들마저 자신들도 들어갈 권리가 있다며 경비원들을 뚫고 난입하여 다음 날 뉴스와 잡지에 크게 보도되는 일대 사건이 되기도 하였다.
오냥코클럽이 해산 후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대부분의 멤버들이 학업을 다시 시작하거나 회사원이 되는 등 일상 생활로 돌아갔지만, 닛타 에리, 고쿠쇼 사유리, 죠노우치 사나에, 쿠도 시즈카처럼 연예계 생활을 지속한 멤버도 있었다. 톱클래스 인기 멤버였던 타카이 마미코는 프로듀서이자 작사가 아키모토 야스시와 결혼하여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멤버 내 제일의 미소녀로 칭해졌던 카와이 소노코는 오냥코 클럽의 거의 모든 작곡을 담당한 작곡가 고토 츠구토시와 1994년 결혼하였다.
해산 후에 일반인으로 돌아간 멤버들은 '그 사람은 지금?'같은 과거에 인기있었던 연예인의 근황을 찾는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였으며 연예 활동을 지속하는 멤버들은 90년대와 2000년대 현재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동창회 기획으로 TV에 출연하고있는데 닛타 에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방송에서 모이는 멤버들은 항상 고정적이라고. 2002년엔 초기 멤버와 참석 희망자 14명이 모여 '유통기한(ショーミキゲン)'을 내고 일시적 재결성을 하였다.
1987년 해산 후에는 계속 연예계에 남아 엔터테이너로써 활동하는 멤버와 결혼하여 평범한 주부가 된 멤버, 직장인이 된 멤버가 있는 등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중년의 나이가 된 오냥코의 몇 멤버들이 함께 CF에 출연하며 반가움과 향수를 일으켰다.
2010년 CM 촬영을 위해 다시 뭉친 오냥코클럽 전 멤버 11명.
2014년 11월 12일 AKB48의 방송 'AKB 조사'에서 오냥코클럽 멤버들의 현재를 조사했는데 다음과 같다.
-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사람: 12명(23%)
- 결혼 등 일반인으로 돌아간 사람: 15명(29%)
- 알 수 없음: 25명(48%)
4. 영향
비록 그룹 자체의 턱없이 부족한 노래, 안무실력 등등 그룹이 오래 장수하기에는 너무나도 한계가 명확했기에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멤버들 실력과는 상관없이 기획과 아이디어가 좋으면 잠시나마 성공할 수 있다라는 사례를 업계에 남겼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었다.오냥코클럽의 성공은 기존에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등의 철저한 실력파들로 대표되어오던 일본 여성 아이돌 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98년 등장한 모닝구 무스메 등 대형 아이돌 그룹의 활동 방식의 기반이 되었다. 반면 애초에 연예인으로서 확실하게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뽑은게 아닌데다, 기본적인 트레이닝조차 제대로 시키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멤버들이 실력이 처참했었고, 오냥코클럽의 성공이 일본 아이돌의 몰락의 시발점이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실제로 오냥코클럽의 성공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리 소문 없이 묻쳤으며 개중에 진짜로 연예인으로서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아이돌이 아닌 하마사키 아유미, 오오츠카 아이, 코다 쿠미 등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 이어지게 된다.
아키모토 야스시와 후지테레비에서 오냥코클럽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미즈구치 마사히코는 1990년대 ' 헤이세이의 오냥코클럽'을 만들자는 목표로 새 아이돌 그룹을 구상하였다. 마침 아키모토가 세가의 외주인력으로 드림캐스트의 홍보 전략을 짜고 있었는데, 이것과 맞물려서 드림캐스트의 홍보용 아이돌이자 오냥코클럽의 직계 후손인 체킷코가 등장한다. 그러나 체키코는 당시 불었던 모닝구 무스메 열풍으로 인해 크게 활동을 하지 못하고 1년만에 해산하였다.
체킷코의 실패를 겪은 이후 아키모토는 2006년에 AKB48이라는 그룹을 데뷔시켰다. 멤버들을 솔로, 유닛으로 분리해서 데뷔시키거나 멤버들을 정기적으로 추가 영입하는 등 AKB48의 주요 운영 방식은 이미 오냥코클럽 시절에 확립해둔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지만, 거기에 '전용 극장',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컨셉을 덧붙여서 새로운 아이돌을 만들어냈다.
2010년대 들어 AKB48은 연예계는 물론 일본의 각종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 현상이 되었다. 영향력만 보면 80년대 당시의 오냥코클럽보다 현재의 AKB48이 더 크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그룹 외의 솔로 데뷔, 유닛 결성이라는 새로운 아이돌의 판매 방식은 오냥코클럽이 원조이자 시초라 할 수 있다.
한편 후지테레비에서도 체킷코의 실패를 거울삼아 2000년대 '아이돌링'이라는 방송을 만들고 방송 내에서 아이돌링!!!이라는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키는 등 오냥코클럽을 다시금 재현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돌링은 큰 성과를 얻는데는 실패하고 2015년 10월 31일 전원 졸업했다. 대신 후지테레비는 자사에서 아이돌을 키우기보다는, 각지의 군소 아이돌들을 모아 '도쿄 아이돌 페스티벌', '도쿄 아이돌 프로젝트' 등의 이벤트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5. 그 밖에
후배격인 AKB48 멤버들이 부른 '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
데뷔곡인 '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는 여고생이 빨리 성관계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충격적인 가사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80년대 일본 아이돌의 위엄' 정도의 제목으로 가끔 욕을 먹는다.(…)
후지테레비의 인기드라마 스케반 데카에 멤버들이 주요배역으로 출연 하였으며, 전 멤버가 출연한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가면라이더 키바의 키도 아키라와 지로가 이들의 광 팬이라는 설정이며, 쿠레나이 오토야가 위조한 야마모토 수잔 쿠미코의 사인을 받아들고 격노하는 장면이 나온다.
2015년 7월 방송한 아이돌 애니메이션 비너스 프로젝트에 닛타 에리와 이쿠이나 아키코가 첫 성우 출연을 했다. 애니에서 그녀들을 모델(?)로 한 캐릭터로 신도 에리, 이나오카 아키코라는 두 명의 이름을 본 딴 캐릭터가 등장한다. 나이는 23세라는 말에 두 사람 다 매우 좋아했다.(...)
2015년 결성 30주년으로 CD-BOX '싱글 레코드 복각 냥냥'이 발매되었는데, 당시 레코드 자켓이나 봉투와 사진 등을 그대로 재현하여 오냥코 클럽 시절 발매된 전 싱글 126장 세트를 CD로 발매했다. 당시 멤버들에 따라 레코드 레이블도 각각 달랐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본인의 사진이나 작품들은 제외해달라고 요청하는 멤버들도 있어 발매가 쉽지 않았었는데 모두 발매를 허락하여 기적적으로 성사되었다. 가격은 무려 92000엔으로 어마무시한 가격이다.
유우야케 냥냥은 오후 5시경에 생방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시간대의 TV시청자들 대부분은 순수한 아이돌 오타쿠나 귀가부, 방과후 부활동 따위 하지 않는 폭주족이나 양키(ヤンキー. 일본 말로 일진이나 양아치)였다고 한다(...). 실제로 상술한 것처럼 주변 친구들의 포교로 오냥코클럽에 빠진 팬들 중엔 아예 부활동을 그만두고 유우야케 냥냥의 애청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오냥코클럽이 해산할 때 즈음엔 아이돌 팬들인 여성 폭주족이나 여성 양아치들, 멤버들의 친위대(...) 등을 섭외해서 '만나러 갈 수 있는 양키 아이돌(...)'같은 여성 폭주족 아이돌 기획이나 아이돌화된 여성 양아치들의 리얼리티 기획을 프로듀스해서 팔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와타나베 미나요와 쿠도 시즈카 팬들 중에 양키들이 많았다고...
6. 회원번호의 노래
'오냥코 클럽'의 회원을 소개한다는 개념의 노래. 각 멤버의 이름과 특징을 때려박아 주는 시그니처 송이다.회원번호의 노래 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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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멤버
주요 인기 멤버로는 닛타 에리, 고쿠쇼 사유리, 카와이 소노코, 타카이 마미코, 조노우치 사나에, 이와이 유키코, 와타나베 미나요, 와타나베 마리나 등이 있다. 그 외에 해산 후 솔로로 데뷔한 이쿠이나 아키코, 쿠도 시즈카 등이 있다. 쿠도 시즈카는 후기 멤버였기 때문에 오냥코클럽 당시에는 존재감이 낮았지만, 해산 이후 솔로 가수로서 성공하였다.오냥코클럽은 프론트 보컬이라는 이름으로 네 명의 멤버를 메인으로 세우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AKB48과 같은 '센터'라는 개념은 희박했다. 대충 보면 솔로로 데뷔한 멤버들은 주요 멤버라고 보면 된다. 또한 솔로 데뷔를 한 후에는 프론트 보컬로 세우지 않았다. 일종의 세대 교체인 셈이었다.
밑의 멤버 일람에서 굵은 글씨로 된 멤버는 2014년 이후로도 연예 활동을 하고 있는 멤버다.
번호 | 이름 | 유닛/솔로 | 설명 |
1 | 오쿠다 미카(奥田美香) | 주간문춘 흡연 사건[10]으로 퇴출. | |
2 | 에노키다 미치코(榎田道子) | 주간문춘 흡연 사건으로 퇴출 | |
3 | 요시노 카요코(吉野佳代子) | 주간문춘 흡연 사건으로 퇴출 | |
4 | 닛타 에리(新田恵利) | 솔로 | 전기 오냥코클럽의 간판이자 아이덴티티. 80년대 아이돌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작은눈, 즉 옆집 소녀 같은 친근한 외모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아키모토 야스시가 예쁘지는 않지만 실제로 본다면 반할 만한 매력을 가진 멤버라고 이야기 하였다. 아마추어가 모인 그룹내에서도 가창력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데, 특히 첫 솔로곡 ‘겨울의 오페라글라스’는 TV가 고장난것 같은 음정과 박자라고 불리며 현재까지도 예능에서 놀림을 받으며 네타거리로 쓰이고 있다. 성격은 느긋하지만 고집이 세다고 알려져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고쿠쇼 사유리와 잦은 갈등을 일으켰다. 갈등이 길어지자 자연스럽게 닛타파, 고쿠쇼파가 형성되며 타멤버도 누구와 더 친한지에 따라 나뉘며 파벌이 점점 커졌다고한다. 최근에는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고쿠쇼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것이 사실이며 현재는 원만하게 지낸다고 풀어놓기도 하였다. |
5 | 나카지마 미하루(中島美春) | '나카지'라는 별명으로 친근한 이미지. 전문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일찍 탈퇴했으나 탈퇴 후에도 이벤트 등에 얼굴을 비추는 등 꾸준히 활동한 멤버. 97년 톤네루즈의 매니저였던 보브 이치카와와 결혼. | |
6 | 키하라 아키(樹原亜紀) | 유닛 | 당시 169cm로 멤버들 중 키가 제일 컸으나, 이 키 조차도 낮춘거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는 173cm정도 된다고. 오냥코클럽 당시에는 타카시마 타다오씨의 성대모사를 하는 등 개그 캐릭터 담당을 주로 했다. 결혼 후 네덜란드에 살고 있다. |
7 | 토모다 마미코(友田麻美子) | 주간문춘 흡연 사건으로 퇴출. 2016년에 오냥코클럽 멤버의 근황을 찾는 프로그램에 나와, 당시 진상에 대해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 |
8 | 고쿠쇼 사유리(国生さゆり) | 솔로 | 프로로써의 마음과 경쟁심이 강한 멤버였으며, 기강을 잡는 리더격 역할이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군기를 잡아, 후기 멤버였던 쿠도 시즈카 등이 20년이 지나 토크예능에서 힘들었던 일화를 폭로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이러한 캐릭터를 네타화 하여 예능에서 활약중이다.[11] 잠시 고정으로 나왔던 프로그램 런던하츠에서는 자신의 솔로곡인 ' 발렌타인 키스'의 의상을 입고 솔로무대를 재연하였다. 결혼→이혼→전남편과 동거→콘설팅 회사 사장인 코다 에이지와 결혼→1년만에 이혼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
9 | 나고야 미카(名越美香) | 유닛 | 은퇴 후 홍콩인 파일럿과 결혼하였고, 현재 홍콩에 살고있다. 키하라 아키와 가장 친하다. |
10 | 사토 마유미(佐藤真由美) | 주간문춘 흡연 사건으로 퇴출. | |
11 | 후쿠나가 사토미(福永恵規) | 솔로 | 아역 출신. 4매의 싱글과 드라마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하는 등 그룹 내에서도 존재감이 컸으나 졸업 후엔 동창회 기획도 나온적이 없는 감감 무소식한 멤버이기도 하다.한국 여행기를 발표하기도 했다. 활동시에는 초기 프론트 멤버 4인방(나카지마 미하루, 닛타 에리, 우츠미 카즈코)이었다. |
12 | 카와이 소노코(河合その子) | 솔로 | 오냥코클럽에서 가장 출중한 외모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유우야케 냥냥의 오디션 코너 아이돌을 찾아라를 통해 첫번째로 합류하였다. 이국적인 비주얼로 인해 중국과 프랑스의 혼혈이라는 캐치프라이즈를 사용한 적도 있다. 오냥코 결성 초기에는 그룹 싱글 순위보다 카와이 소노코의 솔로곡 순위가 높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타 멤버들에게 애들 장난같은 가사를 마구 써주던 아키모토 야스시가 카와이 소노코에게만은 진심이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곡 퀼리티가 높다. 1994년 오냥코클럽의 대부분의 곡의 작곡을 담당한 작곡가 고토 츠쿠토시와 결혼하였다. 활동 중단 후 16년만인 2010년 시세이도 CM에 80년대 아이돌들과 함께 출연하였다. |
13 | 우츠미 카즈코(内海和子) | 솔로 | '유우야케 냥냥'의 파일롯이자, 여대생버전인 올나이트 후지에도 출연했던 멤버. '우타히메'라고 불릴 만큼 노래를 잘하는 멤버였으며 최근 방송에 나와 프리임을 밝히며 새로운 기획사를 공개 모집했다. |
14 | 토미카와 하루미(富川春美) | 그룹 재적기간이 제일 길었으며 해산때 까지 남아있던 가장 선두번호의 멤버. 오냥코클럽에 들어오게 된 경위로는 올나이트후지에 접수하러 왔으나, 이미 접수가 끝났다는 것을 관계자를 통해 듣고 관계자의 눈에 띄어 오냥코 오디션에 지원하여 붙은걸 계기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결혼하여 오키나와에 살고 있다. | |
15 | 타츠미 리카(立見里歌) | 솔로 | 올나이트 후지에 출연했던 멤버아며 오냥코클럽 최고의 음치. 실제로 오디션 영상을 보면 음정은 커녕 박자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독특한 캐릭터로 자리잡으머 '냥기라스'라는 개그성 음치 유닛이 결성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나는 리카짱'으로 오리콘 1위까지 달성하게된다. 당시 차트 1위를 노리던 나카모리 아키나가 대기실에 인사를 하러 온 냥기라스를 흘겨보고 커튼을 닫았다는 일화가 이후 알려졌다. 유닛 성공 후 솔로데뷔도 한적이 있는데 불륜소재의 섹시컨셉 + 음치컨셉의 한계로 오냥코 전체의 판매량에서 워스트1으로 뽑히기도 했다. 토카이대학 정치경제학부 재학 시절 미스 토카이대학이었던 전력이 있다. 활동당시 톤네루즈의 이시바시와 앙숙이었다. |
16 | 타카이 마미코(高井麻巳子) | 솔로 | 요조숙녀, 야마토 나데시코 캐릭터를 맡고 있었던 멤버로 사석에서도 수줍음이 많고 여성스럽다고 알려져있다. 미술 전문대학 진학예정으로 상경후 번화가에서 가방을 쇼핑하다가 길거리 캐스팅을 당해 ‘아이돌을 찾아라’ 코너에서 데뷔하였다. 로케에서 다른 멤버들은 놀이에 정신이 팔려있을때 혼자 뒷정리를 하고 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넣고 있었다는 스태프의 증언이 있다. 와타나베 마리나와 더불어 AD와 스태프에게 가장 예의바른 멤버로, 결성 후기가 되어도 꾸준히 경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현재 돌아다니는 옛영상 댓글에는 끼가 있고 여우같다는 (あざとい)평이 많다. 멤버 이와이 유키코와는 유닛 ' 우시로유비사사레구미(うしろゆびさされ組)'를 결성하여 연속 차트1위를 하는 쾌거를 누렸다. 솔직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는 이와이와는 성격도 외모도 대조적이라 ‘언밸런스한 유닛’이라고 불리며 색다른 매력으로 팬을 모으기도 했지만 실제 둘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아 대기실에선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산 다음 해인 87년에는 현 AKB48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와 만20살의 나이로 결혼하였다. 당시 유료 팬클럽을 만든 후 갑작스럽게 결혼 발표를 하여 소소하게 욕을 먹기도 했다. 상당한 나이차이와 아키모토의 외모 때문에 어떻게 타카이를 꼬셨냐는 말이 밈 처럼 돌아니지만 실제로는 타카이가 먼저 마음을 표현했다고. 이는 함께 영화를 찍었던 동료 탤런트 사이토 유키가 자서전에서 언급한 것이다. 현재는 아키모토 야스시의 일을 도우며 이사직을 맡고 있다. |
17 | 조노우치 사나에(城之内早苗) | 솔로 | 오디션당시 사미센을 들고나와 민요를 불렀으며 아이돌로써는 최초로 엔카곡 'あじさい橋'로 싱글을 발매했다. 04년 오냥코클럽 당시의 디렉터와 결혼. 활동 당시에도 엔카에 대한 사랑이 깊었으며 현역으로 엔카가수로 활동중이다.2016년 레코드대상 일본 작곡가 협회 장려상을 받았다. |
18 | 나가타 루리코(永田ルリ子) | 극초기부터 해산 시까지 남아있던 최장 재적 멤버로 팬들에게는 애증의 대상. ‘루리루리’라는 애칭으로 불리었으며, 시원시원한 성격과 귀여운 외모로 방송의 엔딩 멘트를 맡는 등 후기 오냥코클럽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동글동글한 손글씨는 인기를 얻어 실제 사용가능한 폰트인 ’루릴체’로 출시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산 후에는 자신의 초상권 사용 거부로 인해 영상물들이 알아볼수 없는 누더기수준으로 모자이크 처리 되었다. 초상권 거부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이유는 스태프와의 불화이다. 해산후 솔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비추었으나 오냥코 밖에서는 눈에 띌수 없는 인재라는 매몰찬 거절을 듣고 상처를 받아 그러한 선택을 하였다는 소문이 있다. 두번째는 남편과 오냥코 클럽 관계자와의 불화설이다. 나가타의 남편은 후지테레비 관계이기에, 과거 오냥코 클럽을 관할하였던 관계자와 사적으로 갈등이 생겨 나가타의 영상을 모두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설 모두 어디까지나 일본 웹에 떠도는 소문일 뿐 진위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재결합 및 동창회 기획도 수차례 있었으나 어떤 미디어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 |
19 | 이와이 유키코(岩井由紀子) | 솔로 | 멤버 타카이 마미코와 유닛 '우시로유비 사사레구미(うしろゆびさされ組)'를 결성. '유우유'란 애칭을 그대로 받아 솔로데뷔. 마츠다 세이코의 광팬이었으며, 세이코커트를 모방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다. 굉장히 동안의 귀여운 외모로 인기를 끌었다. 해산 후에도 솔로로 활동하다가, 1997년 청년실업가와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향후 몇년간은 동창회 기획에 내비췄는데 그 이후로는 미디어는 물론이고 블로그조차도 하지 않지만, 현재도 오냥코클럽 멤버들과는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한다. |
20 | 테라모토 요코(寺本容子) | 오냥코클럽 활동에 중시하기 위해 자진 퇴학. 그러나 이는 오냥코클럽의 규정인 '학업에 충실할 것'에 어긋났기 때문에 오냥코클럽에서도 탈퇴당했다. | |
21 | 고미오카 타마키(五味岡たまき) | 초기에 많이 밀어줬고 솔로로도 기대하는 분위기였으나, 길게 가지 못하고 오냥코클럽이 재미없다며 탈퇴하였다. 소문으로는 톤네루즈의 이시바시와 사이가 안 좋아서 였다는 추측도 있다. | |
22 | 시라이시 마코(白石麻子) | 유닛 | 솔로로 까진 나오지 못했으나, 후기 오냥코의 중심축에서 활동했었고, 비솔로데뷔 멤버 중에선 가장 인기가 있었다. 오냥코가 해산하자마자 재적 당시에 사귀던 남자친구와 20살의 나이로 결혼하였다. |
23 | 하야시 카오리(林香織) | 칸사이(오사카) 주재원. 해산때도 참가는 했던 멤버지만, 막상 주재원이라 그런지 뽑아만 놓고 활동이 너무 뜸했다. | |
24 | 미타 후미요(三田文代) | 히로시마 주재원. 해산때도 참가는 했던 멤버지만, 막상 주재원이라 그런지 뽑아만 놓고 활동이 너무 뜸했다. | |
25 | 요시자와 아키에(吉沢秋絵) | 솔로 | 후지TV의 드라마 스케반 데카2에서 야지마 유키노를 연기하였다. 다카이 마미코와 더불어 요조숙녀 캐릭터로 많은 인기를 얻어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아 솔로 싱글'어째서?의 폭풍(なぜ?の嵐)'을 발매하게 되었다. |
26 | 아카사카 요시에(赤坂芳恵) | 재적 기간은 단 1주일이었다.학교에 비밀로 오디션을 본게 밝혀져 학교와 오냥코 둘 다 퇴학. | |
27 | 마츠모토 아키(松本亜紀) | ||
28 | 요코타 무츠미(横田睦美) | 후기 들어서는 프론트도 맡는 일이 많았던 후기 멤버. 현재는 은퇴하고 요가강사로 일하고 있다. | |
29 | 와타나베 미나요(渡辺美奈代) | 솔로 | 오냥코 제일의 인기 멤버로 아키모토 야스시에게 '아이돌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본투비 아이돌인 멤버였다. 연예계에서 그녀의 팬이라고 자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돌 기질은 어디안가는지 40대 후반인 지금도 공식 굿즈를 내며 현역 아이돌로 활동중. 실업가와 결혼하여 현재 고급 저택에서 셀레브 연예인으로도 활동중이며 아들이 잘생긴 걸로 알려져있다.(...) |
30 | 미카미 치아키(三上千晶) | ||
31 | 야지마 유코(矢島裕子) | ||
32 | 야마모토 수잔 쿠미코(山本スーザン久美子) | 혼혈 멤버. 톤네루즈의 이시바시가 오디션 당시 이름의 특징을 굉장히 부각시켜서 임팩트를 가했었다. 은퇴 후에는 JR에서 일하고 있다. | |
33 | 후카와 토모코(布川智子) | 80년대 남성 아이돌 그룹 '시부가키타이'의 후카와 토시카즈의 동생. 훗날 활동 당시에 히카루GENJI의 모로호시 카즈미와 사귀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 |
34 | 유미오카 마미(弓岡真美) | 오카모토 타카코와 동기로 최연소 멤버로 가입하였으나, 그룹에 끼지 못하고 멤버들과 사이가 원만한 편은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지메를 둘러싼 소문이 돌았던 멤버. 졸업 영상에서도 챙겨주는 멤버가 적었으며, 본인 스스로 훗날 인터뷰에서 딱히 좋은 추억은 없었다고 한다. 은퇴하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하며, 2001년 오냥코클럽 재결성 기획에도 참가하였다. | |
35 | 오카모토 타카코(岡本貴子) | 활동한 기간도 길지 않으며, 뚝심 있는 역할은 없었으나, 글래머한 체형과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활동 당시에는 최연소였기 때문에 선배 멤버들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최근에는 은퇴후에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하며, 닛타 에리와는 훗날 골프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활동시에는 별로 교류가 없었지만, 현재는 닛타 에리와 사이가 좋다고 한다. | |
36 | 와타나베 마리나(渡辺満里奈) | 솔로 | 와타나베 미나요, 유우유와 함께 주요 인기 멤버로 미나요와 함께 '더블 와타나베'라고도 불렸다. 개그맨 '넵튠'의 나구라 쥰과 결혼하여 현재도 예능활동중이다. |
37 | 오오누키 카오리(大貫かおり) | 오냥코 클럽 합격 이후 급작스런 환경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자퇴, 이후 모델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으나 누드 사진집이 나오는 등 상당한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AV배우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앞선 누드 사진집이나 V시네마 등에서 SM 여왕님 역할 등으로 출연한 것 때문에 돌게 된 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인이 블로그를 통해 이를 부정했다. 오냥코클럽 출신인걸 내세워서 SNS는 정말 활발하게 하는데 막상 오냥코 클럽 레귤러 프로그램인 유우야케 냥냥도 1일 밖에 출연한 적이 없고, 아무 존재감이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SNS에 본인의 보정한 셀카사진을 자주 올리지만, 보정이 너무 심해서 무섭게 생겼다는 의견들이 많다. 이미지 | |
38 | 쿠도 시즈카(工藤静香) | 솔로 | 8번째 싱글 '카타츠무리 삼바(かたつむりサンバ)'의 프론트 멤버. 유닛 '우시로가미 히카레타이(うしろ髪ひかれ隊)' 소속. 해체 후 솔로로 대성해서 오냥코 멤버중에서는 제일 성공한 멤버가 되었다. 오냥코 멤버 50여 명 중 유일하게 홍백가합전에 나갔다. 그것도 솔로로서. 남편은 그 유명한 SMAP의 멤버인 기무라 타쿠야. |
39 | 타카바타케 마키(高畠真紀) | ||
40 | 이쿠이나 아키코(生稲晃子) | 솔로 | 유닛 '우시로가미 히카레타이(うしろ髪ひかれ隊)' 소속. 후기 오냥코클럽의 중심멤버 중 하나. 현재도 다양한 레귤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연예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간 유방암 투병도 해왔었지만, 그걸 숨긴 채 밝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던 2022년 자민당에 입당해 이듬해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 도쿄도 선거구에 공천되었으며, 당선되었다. |
41 | 카이세 노리코(貝瀬典子) | 8번째 싱글 '카타츠무리 삼바(かたつむりサンバ)'의 프론트 멤버. 미스 세븐틴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걸 계기로 오냥코클럽에 가입. | |
42 | 사이토 마키코(斉藤満喜子) | 솔로 | 유닛 '우시로가미 히카레타이(うしろ髪ひかれ隊)' 소속. 후기 오냥코에서 존재감 있게 활동한 멤버. 짙은 눈썹을 챠밍포인트로 내세웠었고, 미스 세븐틴 콘테스트 준우승을 계기로 가입. 현재도 방송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유닛 멤버 가운데 결혼을 계기로 은퇴한 뒤로 모습을 비추지 않고 있다. |
43 | 모리야 토시에(守屋寿恵) | ||
44 | 타카다 나오코(高田尚子) | ||
45 | 요시다 유미코(吉田裕美子) | 단독으로 광고를 찍었으며 솔로 데뷔 예정도 있었으나 무산. | |
46 | 나카지마 사나에(中島早苗) | ||
47 | 야마모리 유리코(山森由里子) | ||
48 | 아가츠마 카요(我妻佳代) | 솔로 | 토호쿠 미인이라는 캐릭터를 밀며, 후기 오냥코클럽에서 프론트도 맡았던 멤버. 활동 기간이 짧아서 본인이 가진 것에 비해서는 그룹활동에서 부각을 많이 시키지는 못했으나 솔로 싱글은 오리콘 1위. 도쿄에서 자신의 회원번호 였던 48을 이름으로 내세워 "48(욘파치)"라는 바를 운영했으며 현재는 롯폰기의 회원제 클럽 운영중이다. |
49 | 요시미 미츠코(吉見美津子) | 8번째 싱글 '카타츠무리 삼바(かたつむりサンバ)'의 프론트 멤버. 오냥코 제일의 미각(美脚)'이라 불림. 해산 당시 만 15세로 가장 최연소. 이후 93년 누드집을 발매했다. | |
50 | 스기우라 미유키(杉浦美雪) | 8번째 싱글 '카타츠무리 삼바(かたつむりサンバ)'의 프론트 멤버. 해산후 레이싱걸과 모델로 활약하였음. 2010년대 들어선 근년까지도 오냥코 관련 방송과 행사에 모습을 비추었으며 현재도 멤버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 |
51 | 미야노 쿠미코(宮野久美子) | 후기 멤버로 해산 후 연예계에서 제의가 있었으나 가족들의 의향을 따라 고향인 나고야로 돌아가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 해산 후에도 모델로 활동하다 93년 'KISS'라는 아이돌을 결성한다. 최근 방송에 나온 바로는 나고야의 결혼식장 사회자로 일하고있으며 한달의 10건 이상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인기 사회자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모습도 굉장한 미인이며 결혼식장에서 일하고 있으나 본인은 미혼이라고 밝혔다. | |
52 | 스즈키 와카코(鈴木和佳子) | 마지막 합격 멤버. | |
B4 | 토미나가 히로코(冨永浩子) | ||
B5 | 야마자키 마유미(山崎真由美) | 솔로 | 해산 후인 88년 솔로로 데뷔했으나 인지도는 0에 가깝다. 이후 그라비아를 중심으로 누드 화보를 피로했다. 현재는 연예계 은퇴 후 하와이언 킬트 강사와 주부 생활을 양립하고 있다. |
욜린다 양(Yolinda Yang, 견초천, 甄楚倩, jan1 co2 qian4) | 홍콩인으로 유일한 외국인 멤버. 홍콩의 음악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일본에 연수차 방문해 보름정도 오냥코에 재직했었다. 현재는 홍콩으로 돌아가서 활발히 가수와 배우로 활동 중. 배우 출연작으로는 양조위 주연의 첩혈가두가 유명하다. |
8. 관련 유닛
멤버들을 솔로 데뷔, 유닛 데뷔시킨 판매 방식의 시초이며 독자적인 전개로 아이돌계의 한 획을 그었다.-
우시로유비사사레구미 (うしろゆびさされ組) (타카이, 이와이)
: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다’, 즉 ‘험담을 하다’라는 의미의 숙어이며 어떠한 의미에서 붙여진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룹당초 '키위조'라는 이름이 될 예정으로 싱글 자켓에도 표기가 되었으나 그룹명이 변경되어 이미 '키위조' 명의로 발매된 자켓은 폐기되었다. AKB48의 유닛인 와타리로카 하시리타이(渡り廊下走り隊)는 이 유닛의 후배라는 컨셉으로 기획되었다. -
우시로가미히카레타이 (うしろ髪ひかれ隊) (쿠도, 이쿠이나, 사이토)
: 이쿠이나 아키코를 메인으로 세운 유닛. 해산 후에도 활동할 목적이었으나 쿠도의 솔로 데뷔로 자연 소멸되었다. -
ニャンギラス (키하라, 타츠미, 나고야, 시라이시)
: '유우야케 냥냥'의 한 코너로 결성된 유닛으로 음치 취급이었던 타츠미 리카가 메인이었다. -
おニャン子クラブB組 (요시미, 스기우라, 미야노, 토미나가, 야마자키)
: 원래 기존 오냥코클럽이 아닌 새 멤버 다섯 명을 뽑아서
B반이라는 이름으로 데뷔시킬 예정이었으나 토미나가와 야마자키가 탈퇴하였다. 요시미, 스기우라, 미야노 세 명만 가지고 'いつだってイレギュラー'라는 곡으로 데뷔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였지만 발매가 무산되었다. B반 데뷔가 무산된 이후 세 명의 멤버는 각각 오냥코클럽 멤버로 들어갔다.
9. 싱글
자세한 내용은 오냥코클럽/디스코그래피 문서 참고하십시오.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이돌이지만 음반 판매량은 그리 높지 않다.[12] 일본 음반 판매량의 전성기는 90년대 중후반이고, 80년대 중후반에는 아직 음반 시장이 크지 않아서 밀리언 셀러라는 개념은 낯설었다. 물론 일본 연예계나 사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대단하지만, 음반판매량 자체만 놓고 봤을때 80년대 중후반의 기준으로 보아도 오냥코클럽의 음반 판매량은 큰 수치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80년대의 주류 음악은 아이돌이 아닌 J-ROCK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술되었듯 오냥코 클럽의 주 팬층은 10대 남학생에 국한되어 있었다. 게다가 초식남 오타쿠가 주류인 현재 아이돌 팬덤과 달리 당시의 아이돌 팬덤은 친위대로 대표되는 외향적인 남성들과 아이돌 팬이 된 여성 폭주족이나 양키들이었는데, 이들은 그룹 전체를 좋아하는 소위 '올팬'이라기보단 특정 멤버를 추종하는 악개 성향이 강해 그룹 음반보다 멤버 개개인의 솔로 음반이 더 잘 팔리는 현상도 일어났다.
물론, 오냥코클럽이 활동할 당시에는 CD가 나오긴 했지만 보편화되기 이전이라 LP나 카세트테이프 형태로 음반이 발매된 것 역시도 이유 중 하나다.
セーラー服を脱がさないで / 早すぎる世代 | 1985년 7월 5일 | 24.7만 |
およしになってねTEACHER / テディベアの頃 -少女の香り- | 1985년 10월 21일 | 18.0만 |
じゃあね / アレレレ | 1986년 2월 21일 | 28.1만장 |
おっとCHIKAN! / 思い出美人 | 1986년 4월 21일 | 20.6만장 |
お先に失礼 / プリントの夏 | 1986년 7월 21일 | 16.0만장 |
恋はくえすちょん / あんみつ大作戦 | 1986년 11월 1일 | 12.3만장 |
NO MORE 恋愛ごっこ / あなただけおやすみなさい | 1987년 1월 21일 | 11.8만장 |
かたつむりサンバ / めしべとおしべ | 1987년 5월 21일 | 7.2만장 |
ウェディングドレス / 私をよろしく | 1987년 8월 21일 | 9.0만장 |
ショーミキゲン / 同級生 | 2002년 11월 20일 | 재결성 기념 |
[1]
닛테레의 전설적인 오디션 프로그램인 '
스타 탄생!'을 벤치마킹했다.
[2]
멤버들은 촬영장에 학교 숙제를 가져와 서로 공유하면서 공부하기도 하였으며 학교의 시험 기간에는 방송을 쉬었고 급한 경우엔 고학력자들인 후지 테레비의 작가나 스탭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한 멤버는 활동을 위해 학교를 자퇴했다가 오냥코 클럽에서도 탈퇴당했다.
[3]
멤버였던 쿠도 시즈카와 15년만에 재회한
TBS 테레비 방송에서 이시바시가 밝힌 비화로는 녹화 도중에는 같이 웃고 떠들어도 실제로는 이미 베테랑 개그맨이었던 톤네루즈와 쌩신인 일반인들이었던 멤버들 사이에 벽에 컸기때문에, '누가 너희들같은 애들이랑 떠들까보냐! 가슴은 만지고 싶지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시바시는 쿠도 시즈카와는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라서 후에 사이좋게 콜라보 싱글도 내는 등 친분을 이어왔지만 다른 멤버인 타츠미 리카와는 정말로 사이가 안 좋아서 녹화장에서 싸우기도 했다는 후일담이 존재한다.
[4]
공식적으로는 '와라베'라는 아이돌 그룹의 전 멤버였던 타카베 토모코(高部知子)가 일으킨 스캔들에서 유래했다. 15세 미성년자였던 타카베가 이불 속에서 벗은 채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FOCUS라는 찌라시를 통해 보도되었다. 사실 사진은 그냥 담배를 물어보기만 한 것으로 불을 붙였다거나 흡연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해당 사진을 유출한 사람이 자살하는 바람에 타카베는 와라베에서 하차하지만 자살시도만 5번을 하는 시련을 겪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연예계에 복귀한다.
[5]
같은 주에
나카모리 아키나의
DESIRE -情熱-,
오카다 유키코의
입술 Network이 발매된 것이 컸다. 이 둘은 현재까지도 각 아이돌의 대표곡으로 기억되고 있는 대히트곡이다
[6]
80년대 가요계의 주류는 아이돌이 아니라 Rock과 밴드음악이었다.
[7]
国生를 훈독으로 그렇게 읽을 수 있다. 음독은 고쿠쇼.
[8]
라쿠고가 가쓰라 산시의 프로그램
[9]
이시다 히로시,후지티비 프로듀서
[10]
오쿠다를 비롯한 당시 미성년자였던 멤버들이 커피숍에서 흡연을 하고 있는 사진이 찍혀 퇴출당한 사건이다. 이 시기는 아직 방송초기라 큰 화제는 되지않았으며 오냥코가 절대적인 인기를 얻게 된 이후로는 공기 취급받으며 터부시되었다. 사진에는 키하라 아키도 찍혔으나 본인은 피우지 않았다고 하여 며칠 뒤 다시 복귀하였다. 그러나 사진에는 손에 담배를 쥐고 있었는데 안 피웠다는 말도 꺼림칙하고 소문으로는 빽이 있었다느니 등의 이야기도 당시에 돌았던 걸 보아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진실은 당사자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10번 사토 마유미는 사진에서 치마만 찍힌것처럼 증거가 불충분하다는것도 성립 되는데 어찌됐든 잘렸다.
[11]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네타가 본인의 히트곡 '발렌타인 키스'를 개사한 발렌타인 킥2010. 오냥코 클럽 시절 스텝들한테 발길질을 하며
갑질을 했는데 그 사람들이 경력이 쌓이면서 후지테레비의 높으신 분들이 되는 바람에 일이 끊겼다는 엄청난 자폭개그다. 후렴구의 발렌타인 키스를 디렉터 한테 킥!으로 개사한 부분이 백미였다.
[12]
판매량에 대해서는
이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