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예수가 불자라는 설. 이 설에 따르자면 예수가 10대부터 30대까지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인도에서 불교를 배우고 돌아와 제자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하다 죽었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당연히 이 설을 부정하며, 이미 고증으로 논파된 유사역사학이기도 하다.한국에서 이 설은 1980년대
오죽하면 아침 뉴스에 잠시 출판계 소식으로 언급되기도 했고, 베른 조약 이전이라서 여러 출판사에서 중복으로 판본을 내기도 했다. 한때 가야의 물고기 문양설까지 연결해 주장한 학자도 있었을 만큼 화제가 되었다. 물론 그리스도교계에서는 공식적으로 '근거 없음'을 내세웠고 밑에 설명할 여러 이론을 통한 논쟁부터 '사실 그건 성도들을 혼란시키려는 사탄의 음모'라는 입장도 밝혔다.
이러한 예수 불자설을 다루고 있는 영화로는 대표적으로 맨 프롬 어스(Man From Earth)가 있다. 꽤나 그럴 듯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사실 불자라면서요?"라고 낚인 사람들이 많다.
이와 별개로 그리스의 미술이 고대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는데,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기원전 1세기까지 불교계에서는 불상이 아닌 다른 상징(보리수ㆍ법륜 등)을 사용했는데, 현 파키스탄에 있는 간다라(Gandhara) 지방에서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불상이 조성되었다. 헬레니즘 미술 참고.
이 설을 맹신하는 자들이 이 설을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래도 예수와 석가모니가 살던 시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과 기원후가 갈리는데, 석가모니는 대략 기원전 500년 전쯤 인물이기 때문에 갖다붙이기 좋다. 만약 예수가 석가모니와 동시대나 또는 이전 시대 사람이었다면 이런 설 따위 나올 수가 없었다.
이 설이 나오게된 근거 중엔 이미 기원전에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동서양이 교류하였고, 심지어 알렉산더가 인도에 원정갔다는 사실도 있다. 그외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현재의 인도에 해당하는 지역이 나올 정도라,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인도가 그리스식 공부를 한 지식인이라면 미지의 영토가 아니라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게다가 당시에 인도뿐만 아니라 인도보다 더 멀리 있는 중국의 존재도 이미 서양에 알려진 상황이었고, 인도랑 이스라엘 두 국가 모두 아시아권이며, 인도와 이스라엘의 거리는 나름 가까운데다, 페르시아가 이스라엘에겐 잘 알려진 나라였는데, 페르시아의 인접국이 인도이기에 당시쯤이면 이미 이스라엘에서 인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지식인이라면 충분히 알았을것이다.
실제로 에스델기나 마카베오기 1서에서 인도가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또한 예수의 12 사도들중 한명인 사도 토마스가 인도에 가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는 전승도 존재하고, 그 주변 국들인 중국과 인도네시아까지 다녀왔다는 설도 있을 정도인데다, 심지어는 당시 한반도의 국가였던 신라에도 다녀갔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라 이미 예수가 토마스 이전에 인도를 다녀온게 아니겠냐는 주장도 나온다.
역으로 예수가 카슈미르에 와서 소승불교를 상대로 설교를 하여 대승불교가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 설로 인한 나비효과 때문인지 초기 성경에는 환생에 대한 구절이 있었으나 로마 제국 시대에 해당 구절이 삭제되었고, 이후부턴 환생 관련 구절이 누락된 성경이 이어져 왔다는 허위사실이 퍼지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2. 법화경과 신약 성서의 경우
민희식 박사는 1986년 불일(佛日)출판사를 통해 ≪ 법화경과 신약 성서≫를 출판하였다.[2]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예수의 생애와 성립과정의 의문점에 대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에서 나온 설을 소개하였다.2007년 금강신문의 책 광고 기사 책 광고문구에 ' 불교계의 저명한 석학' 운운하는데, 민희식 박사는 불교 전공이 아니다. 실제로 민 박사가 쓴 책을 보면, 이게 정말 오랜 연구 끝에 나왔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상당수 보인다. 특히 후기 대승 불교에서 성립된 밀교라든가. 왜 연구성과라는 것이 이러한가. 민희식 박사는 프랑스어를 전공했을 뿐 역사나 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연구(?)내용 대부분이 자신이 무언가 발굴하거나 자료를 찾아 고찰하여 쓴 것이 아니라, 서양(특히 프랑스)에서 떠돌던 잡설들을 취합해 번역한 것이라 딱 유사역사학 음모론 수준이다. 참고로 이 사람이 퍼뜨린 것 중에는 예수 불자설뿐만 아니라 십계명의 원조라는 아케나톤 18계명도 있다. 아케나톤 18계명은 20세기 뉴에이지 단체에서 주장하며 내놓은 것인데, 그 내용을 우리말로 번역하고서는 고대 이집트의 기록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참고
아무튼, ≪ 법화경과 신약 성서≫은 이렇게 주장한다. 신약외경 토마스 복음서는 예수의 말씀을 114개 항목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불교 법화경의 내용과 유사하다. 예수가 인도에 유학하여 불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의 활동을 알 수 없는 공백기가 있는데, 법화경과 비교함으로써 그 기간에 대한 의문, 성경과 불경의 일부 유사점 및 그리스도교 사랑의 정신이 나오게 된 배경 등을 설명한다고 책 스스로는 적는데, 실상 본문 내용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저 논리를 보면 왜 신약성경학계에서 별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애당초 Q 문서 가설로 설명되지 않는 이문현상이 있어 복음서의 편집사적 측면에서 이론도 나온다. 그런데 다짜고짜 Q 문서를 사실로 간주한 뒤 다른 근거도 제대로 대지 않고 그저 '비슷하니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니 다른 학자들에게 먹힐 리가 없다. " 피자는 빈대떡의 영향을 받은 음식이다. 왜냐하면 피자는 빈대떡과 비슷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하고 주장하는 꼴이다.
진위에 대해서는 링크1 및 링크2에서 참고.
아무튼, 책이 주장하는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2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인도 북서부를 침략하여 약 2백 년간 지배( 인도-그리스 왕국)하였다. 기원전 2세기 후반 메난드로스 왕의 시대에 샤카라(현재 시아르코트)를 중심으로 동서 간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인도 북서부에 당시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주하여 도시를 건설하는 등 그리스 문화가 크게 번성하여 간다라 문화를 이룩하였다.[3]
예수는 이렇게 간다라 문화가 번성한 시기에 서방의 지혜를 구하려 유대의 제사에 참석하였는데, 남인도 오릿사 주의 왕족 라반나가 예수의 총명함에 반하여 인도 유학을 권유했다. 그래서 예수는 인도의 쟈간나스 사원에서 4년간(20~30세) 승려로 지냈다. 그러나 힌두교와 바라문교를 연구하여 브라만의 계급제도의 부당함을 비판하다가 목숨의 위협을 받자 티베트로 도피하였다. 그곳에서 성인 '맹그스테(Meng-ste, 맹자)'의 지도하에 불경, 요가, 영계의 빛을 받아 병자를 치료하는 심령술에 관한 비법, 예배방법을 배워(23~24세) 기적을 행하였다!!! (기원후 사람인 예수를 기원전 유학자인 맹자가!!) 그 후 페르시아의 도읍지 페르세폴리스로 가서 24년 전 자신이 태어났을 때 찾아온 동방박사 3명을 만나 조로아스터교 선악이원론을 불교에서 깨달은 진리를 바탕으로 비판하고 토론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확고히 하였다.[4] 이러한 내용은 아래에서 설명할 ≪보병궁복음서≫에서 따왔다.
사실 이 설은 비판의 여지가 너무 많다. 예수의 기본성격은 '학자'나 '구도자'가 아니라 사회비판적인 목청을 높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이다.[5] 논리와 사상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오로의 스타일이지 예수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 예수를 학자/구도자와 같은 개념으로 잡음 자체가 초점이 어긋난다.
게다가 시골 깡촌인 나자렛[6]에서 목수, 정확히는 건축 관련 잡다한 일을 두루 하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해외를 두루 다니며 갖가지 사상을 배우고 돌아왔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 시절에 여행이란 극히 위험하여, 돈이며 그 밖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7] 그렇다고 예수의 양아버지 나자렛의 요셉이 돈이 많거나 권력 좀 있는 제사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깡촌의 목수 아들이 페르시아 건너 인도까지 유학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8] 또한 동네 사람들이 "우리가 밥그릇 숫자까지 아는 요셉 아저씨, 마리아 아줌마네 아들이잖아?"라는 식으로 대했다는 점도, 예수가 나자렛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학계의 이론을 너무 무시한 주장이다.[9][10]
또 다른 문제점은 예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티베트에 불교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티베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7세기 송첸감포왕 때의 일로 예수 활동 시기와 500년 이상 차이가 있다. 물론 티베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도 불교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수십년 전이라면 몰라도 500년 이상 전에 불교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가정일 것이다. 설령 만에 하나 예수 생시에 티베트에 불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수지역에 한정되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세력도 크지 않았을 것인데 멀리서 온 낯선 이방인인 예수를 가르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구약시대 때 호전적이었던 하느님이 신약시대에 와서 '사랑과 구원의 신'이 된 성격변화도 생각할 가치가 있다. 구약성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쓰였는데, 구약 중 후기에 씐 문서에서는 이미 유대인들의 민족신/국가신의 성격이 많이 흐려졌다. 대표적인 것이 요나서. 야훼가 유대인들의 원수인 아시리아인의 생명 또한 귀하게 여긴다는 내용이다.[11]
또한 유대교에서는 랍비들이 쓴 성경 주해서(미드라쉬), 주해서의 주해서, 성경의 모음을 일부러 다르게 읽은 신비주의적 해석, 묵시록 등 여러 종교문서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이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랍비로 칭송받는 힐렐이 그리스 논리학을 들여왔을 정도로 헬레니즘의 세례를 잔뜩 받았고, 지식인들이 히브리어로 글을 쓰기보다 그리스어로 글을 쓰기 편안해 할 정도여서, 단지 민족/국가의 수호신이란 성격이 더욱 흐려진다. 예수가 주요 거점으로 삼았던 갈릴래아는 유대 왕국 내에서 반골 기질이 심하고, 종교적인 열정이 강한 촌구석이란 말을 들었다. 사회개혁적인 예수의 외침이 왜 갈릴래아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토마스 복음서 또한 영지주의적 관점이 많이 드러난 문서이고,[12] 그 외 주장도 아직까지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확연한 근거가 없다. 아직까지 신학계에서는 논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설임을 명심하자.
또한 애초에 신약성경 자체도 반박의 증거로 충분하다. 신약은 종교적인 내용은 있을지언정 예수 사후 비교적 빠른 시기에 문서가 집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약 어디를 찾아봐도 예수의 경력으로 외국 유학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예수가 당시 로마의 주적인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다녀왔다면, 안 그래도 예수를 죽이려고 이를 갈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먹이감이다. 종교적으로 반박하기도 쉬워질 뿐더러, 정치적으로 누명 씌우기도 좋다. 하지만 예수의 처형을 주장할 때도 "이놈이 민중을 선동합니다." 정도만 언급될 뿐이다. '선동'이라고 누명을 씌웠으면서, 그 사람이 이교도 국가에 갔다온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니 말이나 될까? [13][14]
또한 예수불자설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예수가 법화경이나 불경을 인용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을 조금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인지 알수가 있다. 당장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있었던 광야의 유혹에서 보더라도 예수는 신명기 구절을 인용하여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고 이후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도 구약성경속 구절들을 인용해가며 그들의 주장을 논파했고 [15][16] 또한 예수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할 때도 구약성경 속 구절이나 일화를 자주 인용하였다.[17][18]
이 주장을 논박할 가장 확실한 사실은 법화경의 성립시기가 결코 신약성경보다 빠르지 않다는 것. 법화경은 서기 200년경의 문헌이다.[19] 반면 신약성경은 서기 100년 전후로 책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가장 빠른 것은 바오로 서간인데 '테살로니카 1서'가 서기 51년 무렵, 가장 늦은 사목서간조차 2세기 초쯤에 쓰였다. 복음서 중 마르코 복음서는 서기 70년쯤에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만약 Q 문서가 실존했다면 마르코 복음서보다 더 이를 것이다. Q 문서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Q 문서가 성립된 시기를 서기 50~60년으로 보기 때문. 또 토마스 복음서를 중시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토마스 복음서는 Q 사본보다 더 먼저 성립되었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Q 사본이나 토마스 복음서나 법화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차라리 예수가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인도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왔다고 하는게 더 설득력이 있을 정도다.
3.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저서
러시아의 종군기자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1894년에 "La vie inconnue de Jesus Christ"(이하 이사전)[20]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예수 불자설을 주장했다. 자신이 인도의 헤미스 사원(티벳 불교 사원이다)에 갔을 때 그곳의 라마가 자신에게 '이사(Issa)의 삶'이라는 티벳어로 된 기록물을 보여주었는데 그 Issa[21]가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것을 번역하여 자신의 책에 실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으로는 '이사(Issa)의 삶'에는 이사가 이집트에 있을 때의 이야기와 모세에 대한 이야기, 로마에 의한 정복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이사가 13세 때 상인들을 따라 인도로 가 불교도들과 생활하며 그들에게서 수년간 팔리어와 불교를 공부하고 다시 수년간 인도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공부와 가르침을 행하다가 29세에 고국으로 돌아가 설교를 시작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가르침을 행하다 3년 뒤인 33세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는 것이다.누구는 이사전을 교황청에서 보관한다고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실 이사전은 교황청이 아니라 티베트에서 봤다고 하며 나온 이름이다. 누군가가 대충 가톨릭 음모론과 연결지어 교황청에서 비밀리에 보관하여 숨긴다고 썰을 푼 것으로 아무 근거가 없다.
문제는 티베트 문자가 등장한 시기는 서기 7세기라는 것, 현재 남아있는 티베트 문자로 적힌 가장 오래된 문서가 서기 9세기 물건이다. 즉 티베트어로 쓰인 ≪이사전≫이란 책이 있다면, 아무리 빨라도 7세기 이전이 될 수가 없다. ≪이사전≫의 원본문서라는 것을 본 사람도 노도비치 혼자뿐이다. 7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 문서는 물론 그 이후에 전해진 어떤 문서로도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노토비치는 죽을 때까지 티베트어 원본 이사전을 공개하지 않았다. 티베트 불교가 지금처럼 전세계로 확장되지 않고 미지로 남았던 시절, 티베트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과 무지를 악용해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뉴에이지 불쏘시개 중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예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티베트에 불교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 티베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7세기 송첸감포왕 때의 일로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와 500년 이상 차이가 있다. 물론 티베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도 불교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수십년 전이라면 몰라도 500년 이상 전에 불교가 있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가정일 것이다. 설령 만에 하나 예수 당시에 티베트에 불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수지역에 한정되었을 것이 분명하고 세력도 크지 않았을 텐데, 멀리서 온 낯선 이방인인 예수를 가르칠 만한 역량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노토비치가 이런 주장할 할 당시 저명한 동양학자이자 옥스퍼드 대학의 불교철학 교수였던 ( 독일계 영국인) 막스 뮐러(Max Mueller)(독일인의 사랑의 저자)는 이 책을 위서라고 단정했다. 또한 다른 학자들도 노토비치가 방문에서 찾았다는 그 사원을 방문하여 주지스님과 면담해보니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학자들 대부분은 노토비치의 책을 위서라고 단정했다. ≪이사전≫은 그 내용의 가부 이전에, 노토비치가 보았다고 주장한 그 '고문서'가 정말로 실존하긴 하는지부터 매우 의심스럽다. 현재도 이 이사전은 노토비치가 조작한 책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야소전(爺蘇傳)이라는 책도 있어 이것이 예수 불자설을 밝혀냈다는 루머가 있는데, 애초에 이 책은 1935년 중화민국의 신학자 조자신(趙紫辰)이 지은 예수에 대한 고찰로, 예수를 공자나 주자 등 여러 유학자들에 빗댄 신학서적이다 #
≪이사전≫의 진위에 대한 자세한 논쟁은 링크에서 참고.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3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
마태오 복음서 27장 46절, 공동번역성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티베트 불교의 진언(眞言)인 엘리엘리 라마 삼먁 삼보리 다라니에 유래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뜻은, 성자시여 위대한 바른 지혜로 드러내주소서.
그러나 이것은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공용어는 아람어다. 예수가 외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문장은 구약 성경구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엘리 엘리 라마 아잡타니'를 아람어로 말한 것이다. 다윗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시편 22장 1절, 공동번역성서)라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예수가 인용한 것이다. 거기에서 '사박다니'는 아람어의 말이고, 히브리어 성경에는 본래 '아잡타니'이다. 상식적으로 예수가 익숙한 시편의 구절을 외쳤다고 봐야 타당하다고 볼 수 있고, 티베트 불교의 진언에 갖다 붙이는 건 억지스럽다고 볼 수 있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파된 때는 서기 7세기. 1세기 사람인 예수가 티베트 불교의 진언을 낭송하려야 할 수가 없다.
결정적으로 티베트 불교 전통에는 이런 진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낭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링크를 참고.
5. 보병궁복음서의 경우
리바이 다울링(Levi H.Dowling 1844-1911)이라는 미국인 목사가 천상 영계의 기록( 아카샤)를 보았다고 주장하며 ≪The Aquarian Gospel of Jesus the Christ≫를 집필하여 1908년에 출판했다. 이 책이 1970년대 한국에 ≪보병궁복음서≫라고 소개되었다. 과거에는 성약 성경이라는 이름으로도 번역되었으나 지금은 그 이름이 묻힌 지 오래. 통일교 교리서 중에도 이름이 같은 책이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책과는 무관하다.이 책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 예수가 12세 때, 남부 인도 오릿사 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에 참석차 왔다가 예수의 총명함에 반하여 예수의 부 모를 찾아가 그에게 동양의 지혜를 배우도록 인도 유학을 청원한다. 그리하여 예수는 남부 인도 오릿사 지방의 쟈간나스의 절에 들어가 4년간 수행하면서 베다 성전과 마니 법전을 배우고 승려 라마스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예수는 인도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당시 인도 최고의 의원이었던 우도라카의 제자로 입문한다. 그러다 절대 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는 인도의 신분제도( 카스트)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정죄하려는 승려들을 피해 네팔로 피신을 가게 된다. 그 뒤 티베트의 사원에서 성현 멘구스테를 만나 고전을 공부하고, ‘광명의 부처’ ‘살아있는 신탁(神託)’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4세 되던 해에 고향에 들렀다가 다시 그리스를 거쳐 이집트에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 입회를 허락받고 성실, 공정, 박애, 신앙, 의열, 성애의 6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써 극복하고, 이집트 밀교의 비밀과 생사의 문제, 그리고 태양계 밖의 세계의 비밀을 배우고 보랏빛의 방에서 마지막 7번째의 시험을 마치고 마침내, 그리스도( 하느님의 사랑)라는 최고의 법명(法名)을 받는다. 그렇게 오랜 수도생활을 한 뒤 티베트를 마지막으로 29세에 귀국하였다.
- 미륵 ← 마이트레야 → 아후라 마즈다 → 메시아 → 미트라. 여기에서 나오는 신들은 전부 동일신이며, 이것은 전부 다 마이트레야. 즉, 미륵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으로 배화교,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전부 불교의 미륵사상에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몇몇 불교인들과 안티기독교들이 제3의 성경이라며 진리로 받아들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한 미국인 목사가 멋대로 쓴 소설에 불과하다. 책의 진실성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물타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새로 발견된 고대문서도 아니고 _20세기 초에 오컬트적인 능력으로 과거 역사를 보고 썼다며_ 나온 책이니 검증하고 말고 할 여지도 없다. 책 내용 자체에서도 여러 가지 오류가 많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 우선 맨 처음 '≪ 법화경과 신약 성서≫의 경우'에서 반박한 내용에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이스라엘에서 인도로 가는 것은 상인, 군인, 고위층 등을 제외한 일반적인 유대인의 능력으로는 무리다. 애초에 이집트, 가나안, 바빌론, 그리스 등 이방의 종교를 경멸하고 전쟁도 불사하던 유대인의 집안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위해 인도에 간다는 얘기부터가 사우디 사람이 도 닦겠다고 무당산에 가는 것만큼이나 말이 안된다. 게다가 티베트 승려 어쩌고 하는 내용과 달리 불교의 티베트 전래는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다.
- 그리스도의 뜻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22] 히브리어 명칭 메시아משיח(마시아흐, 기름부음 받은 자)의 그리스 번역어로, 메시아는 사울과 다윗 등 여럿 이스라엘의 왕과 예언자에게도 붙여진 칭호이다. 예수의 절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Lord)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이 그리스도란 칭호 때문이다.
- 미트라와 마이트레야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설 수준은 아니다. 이 부분은 이론이 분분하다. 수로만 따지면 관계없다는 이론이 더 많다. 또 미트라는 태양신일 뿐 구세주가 아니다. 더군다나 주장 중에 나오는 아후라 마즈다는 미트라와 같지 않다.
- 보병궁복음서에 대해서는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6. 여담
일각에서는 이를 비틀어서 불교도 이슬람교처럼 기독교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불경이 성경을 쿠란처럼 변형시킨 것으로 주장한다. 이는 예수 불자설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들은 카쿠레키리시탄을 들면서 천주교가 마치 불교처럼 변형된 것처럼 불교도 원 기독교 신앙이 변형되어 이슬람교처럼 변형된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부에서 더 나아간 이들은 불경도 성경의 하나로 보아야 하며 제3의 경전으로 인정하는 분파도 있다.7. 매체
맨 프롬 어스에서 이 설을 소재로 사용했다. 주인공 존 올드만은 따뜻한 땅을 찾아 동쪽으로 갔다가 인도에서 붓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서쪽으로 돌아와 불교를 현지에 맞게 재 해석한 이론을 퍼트렸다. 하지만 그를 탐탁찮게 본 자들에 의해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히고...
[1]
이는 일부 환빠들이 유럽을 긴장시켰던
몽골 제국에 환상을 과도하게 품는 경우와도 통한다.
[2]
이후 저자는 같은 제목으로 2007년 블루리본 출판사에서 책을 재판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번 서로 다른 출판사를 통해 책을 재판하거나, 증보판을 발행했다.
[3]
일단 여기까지는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4]
조로아스터교의 철저한 이원론은
불교 철학의 관점에서는 타파대상 제1순위를 오르내린다. 말이 좋아 저 둘을 비판하고 토론했다고 표현하지,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
[5]
이건 단순히 인상비평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참고로 그 예언자로서의 활동이 (당연하게도) 유대교 예언자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도 학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6]
성경에 대놓고 나온다(...) 물론 깡촌이라고 써있지는 않지만,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사렛 출신이 뭐 별거 있겠냐'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처음 만난
필립보가 "모세와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 분을 만났다"고 호들갑을 떨자 그 말을 들은 그의 친구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뚱하게 반문한다.
[7]
이 당시엔 외국의 지리와 환경에 대한 지식을 보통사람들은 모르는게 일반적이었고, 외국으로 간다면 무역상들과 합류해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육지가 아닌 바닷길을 통하기엔 당시의 항해술이나 배가 지금처럼 좋지도 않아 역시 위험했다. 게다가 외국으로 갔다가, 혹은 거쳐가는 나라에서 어떤 일을 겪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장 이때로부터 수백년후에 일어난 일중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가던중
고구려를 거쳐서 간일이 있었는데 둘이 함께 고구려에서 순찰대에 붙잡혀서 스파이로 몰려 심문을 받으며 고초를 겪다가 풀려난 일도 있었다. 이 당시 당나라와 고구려,
신라의 관계는 예수가 살아있었을 당시의 이스라엘과 인도의 관계보다 가까웠음에도 이 정도였다. 게다가 이때로부터 1000년 이상 지난후 생긴 일들을 보면
임진왜란때 한반도의 겨울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왜군들이 겨울에 저체온증이나 얼어죽는 일도 많았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에도 러시아의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프랑스군들이 상당수가 저체온증이나 얼어죽었다. 무려 예수가 살아있던 시절로부터 1000년이 넘게 지난 후인데도, 심지어 인근 국가인데도 인근 국가의 환경에 대비를 못해서 사망한 일이 많았는데 예수가 살아있었을땐 어땟을진 답이 나올 것이다.
[8]
그나마 요셉은 전승에 의하면 예수가 어릴 때 이미 사망했다.
[9]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요셉 아저씨, 마리아 아줌마네 아들이잖아?" 하며 무시했다는 일화(마태 13:53-58, 마르 6:1-6상, 루가 4:16-30)를 복음사가들이 기록하며 부담을 느꼈을 정도라,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이 일화가 역사적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10]
거기에 굳이 예수의 유년시절을 기록하지 않은것 역시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로도 충분히 반론이 가능하다. 당장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을 소개할때 유년시절까지 세세하게 소개하는걸 본적이 있는가? 그저 간단하게 누구의 아들인지 또는 뭐하다가 선지자가 된것인지에 대한 경위만 적혀있을뿐이다. 예수의 유년시절 기록이 없는 것도 단지 다른 선지자들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적을필요가 없어서 생략한것에 불과하다. 단지 예수는 다른 선지자와 달리
무게감 이 달랐을 뿐이다.
[11]
오늘날의 유대교 역시도 '유대교 믿으면 유대인'이라는 논리라서, 막연히 혈통에 의한 구원만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12]
이 때문에 기독교계에서는 토마스 복음서 자체를 정경은커녕 외경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13]
마태 26:59-61, 마르14:55-59 등을 보면, 예수를 잡아온 후 대사제 가야바와 온 의회가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할 만한 증언을 눈에 불을 켜고 찾지만 결국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발언을 했다.' 정도 증언만 얻을 수 있었다.
[14]
또한 요한복음 10:19절에서 42절 까지를 보면 예수가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기위해 돌을 집어던지고 예수가 그 자리를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일화나
스테파노의 최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율법을 근거로
사적제재를 가하는 것은 로마에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15]
복음서에서 바리사이가 예수에게 워낙 쉽게 논파당하기에 이들이
자코처럼 보이겠지만, 이들의 후신인
하레디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밥 먹고 숨쉬는 것만 빼고는 하루종일 성경공부만 하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이 예수에게 자주 논파당한다고 나옴은 바리사이가 약해서가 아니라 예수가 그만큼 위대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묘사였다.
[16]
이외에도
니고데모나
아리마태아의 요셉처럼 예수를 따르는 바라사이들도 나오는데, 이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참석이 가능한 고위직 바리사이들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밑에 예수를 따르는 바리사이들도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예수 불자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말마따나 예수가 주구장창 불경이나 외우고 다녔다면 그들이 예수를 따랐을까? 오히려 돌에 맞아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예수가 구약성경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알고 적시적소에 이를 인용하였기에 그들도 '틀린 말은 아닌데?'하고 따른 것이다.
[17]
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말에 조그맣게 주석이 달린 부분이 있는데, 이는 예수가 구약성경의 어느구절을 인용하였는지를 설명해주기 위해 달아둔 주석들이다.
[18]
신약이 구약을 인용한것에 대해 민희식 박사도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 였는지 자신의 저서에서 구약은 고대 수메르 신화와 바빌로니아 신화를 섞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
데미언 키온(Damien Keown),
"불교"
[20]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과거엔 이사전이라 알려져 있다.
[21]
Issa는 예수의 아랍식 명칭이다.
[22]
이런 뜻으로는 테오필로스Θεόφιλος라는 인명이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