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歷 史 考 古 學 / Historical Archaeology선사시대 이후의 역사시대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고고학의 하위 분야.
한국 고고학에서는 역사고고학이라고함은 대체로 원삼국시대 또는 삼한시대(또는 철기 시대)와 같은 역사시대로의 전환기부터 시작하여 근세시대까지를 대상으로 한다.[1] 그 중에서도 원삼국시대/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2]
현실적으로 역사고고학이 중세 이상을 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록은 풍부해지고 비단 정치와 관련된 사서뿐만이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한 문자기록이 늘어나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분석과정을 거지치 않고서도 원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근세 고고학의 장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문헌사 연구의 여러 방법론 중 하나로써 보조적인 방법론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3]
하지만 반대로 원사[4]부터 고대의 시간은 문헌기록은 분명 있지만 상세하지 않으며 또 기록의 내용이 삼국유사처럼 바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해석과 정황에 대한 검토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고대사 연구에 있어 고고학적인 분석 방법이 공히 학문 분야로 존재하고 있다.
2. 연구 대상
역사시대의 모든 고고학적 물질자료를 대상으로 한다. 물질자료의 형태적 정보와 공간적 정보 그 수량과, 그를 바탕으로한 시간에 대해 분석하고 일련의 해석을 도출한다. 주된 분석의 대상은 아래와 같다.
유물, 유구, 유적의 공통점은 인간 생활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 대상은 이동 가능한 유물과 이동 불가한 유구, 유적으로 나뉜다. 그런데 유구는 고분이나 주거지처럼 장소에 있는 개별 잔존물을 말하고, 유적은 고분군이나 취락처럼 유구들의 집합을 말한다는 차이가 있다.
* 유물
* 유물
*
토기(土器)
토기 자료는 형식학적 연구 방법의 주된 대상으로 원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확인되는 자료이다. 토기는 고배(高杯)를 비롯하여 항아리[短頸壺/長頸壺(단경호/장경호)], 옹(甕) 등의 그릇의 기종으로 구분되며 시대마다 유행하는 기종과 그 형태가 다르다. 또한 특정한 집단별로도 사용하였던 토기의 종류와 형태가 같거나 다른 등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특히 토기는 금공품(金工品)과는 달리 수량적으로 매우 많은데, 단순히 수량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고고학자가 형태적인 변화를 판별하거나 분석할 때의 신뢰도가 금공품과 같은 위신재에 비해서 높은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 통상 역사고고학의 분야에서 가장 근본적인 시간 정보를 주는 것이 토기 분석의 결과이다.
철에 의해 만들어진 물품으로 간단하게 무기류와 농공구류로 대별된다. 고대의 철은 토기처럼[11]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금, 은 마냥 따로 채굴과 정제의 작업을 거쳐야하는 재료이다. 쉽게 말하자면 토기와 금공품, 일상재와 위신재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다.
* 금공품(金工品)
금이나 은, 청동 등으로 장식된 물품을 뜻한다. 허리띠 장식[대금구], 신발[식리][12], 관(冠), 관모(冠帽) 등의 장식된 금속 유물들이 금공품이라고 불린다. 환두대도(環頭大刀)도 도신은 철이지만 그 밖의 장식으로 인해 사실상 금공품의 범주에서 분석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토기 분석의 결과가 살이라고 한다면 금공품 분석의 결과는 뼈에 비유할 수 있다. 금공품들은 위신재(Prestige Goods)로써 최상위의 신분들에 의해 향유되었다. 특히 고대 사회는 이러한 금공품의 하사와 수여 속에서 정치적 관계가 맺어지고 이루어졌던 바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교류의 흔적들이 금공품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 마구(馬具, 말갖춤새)
말을 타기 위한 일체의 갖춤들을 지칭한다. 한반도의 기승문화 자체가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퍼지며 동북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성립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마구류들의 변천은 개별적으로 분석하기엔 어려움이 따르고 동북아 내지는 남한이나 한반도 등의 거시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금공품과 더불어 교차 연대의 주된 근거 중의 하나이다.
* 고인골
토기 자료는 형식학적 연구 방법의 주된 대상으로 원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확인되는 자료이다. 토기는 고배(高杯)를 비롯하여 항아리[短頸壺/長頸壺(단경호/장경호)], 옹(甕) 등의 그릇의 기종으로 구분되며 시대마다 유행하는 기종과 그 형태가 다르다. 또한 특정한 집단별로도 사용하였던 토기의 종류와 형태가 같거나 다른 등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특히 토기는 금공품(金工品)과는 달리 수량적으로 매우 많은데, 단순히 수량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고고학자가 형태적인 변화를 판별하거나 분석할 때의 신뢰도가 금공품과 같은 위신재에 비해서 높은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 통상 역사고고학의 분야에서 가장 근본적인 시간 정보를 주는 것이 토기 분석의 결과이다.
*
신라 토기 - 자기(瓷器)로 변화하기 전의 토기 문화를 가장 오래 향유하였던 세력은 바로 신라로써 독자적인 토기 문화를 형성하였다. 특히 신라 고분의 특징으로 인해서 수량적으로 가장 많아서 비교적 안정적인 연대를 유지하고 있다.[5]
* 가야 토기 - 신라 토기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야들 또한 각 가야만의 토기문화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가야의 토기는 신라처럼 통일[6]되지 않았을 뿐더러 여러 가야의 향방은 비교적 다이나믹하게 흘러갔으므로 여전히 토기 문화를 중심으로한 해석과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7]
* 백제/고구려 토기 - 백제나 고구려도 각자 토기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나 가야에 비해서는 토기 자료가 많지는 않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묘제(墓制)가 당시에도 이미 도굴을 쉽게 당할 수 있는 구조[8]인데다 봉토의 위에 무덤이 있는 형태[9]로 후대에 의해서 상부가 날아가버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라토기 만큼 안정적인 구분이 확립되어 있진 않다.[10]
* 철기(鐵器)* 가야 토기 - 신라 토기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야들 또한 각 가야만의 토기문화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가야의 토기는 신라처럼 통일[6]되지 않았을 뿐더러 여러 가야의 향방은 비교적 다이나믹하게 흘러갔으므로 여전히 토기 문화를 중심으로한 해석과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7]
* 백제/고구려 토기 - 백제나 고구려도 각자 토기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나 가야에 비해서는 토기 자료가 많지는 않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묘제(墓制)가 당시에도 이미 도굴을 쉽게 당할 수 있는 구조[8]인데다 봉토의 위에 무덤이 있는 형태[9]로 후대에 의해서 상부가 날아가버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라토기 만큼 안정적인 구분이 확립되어 있진 않다.[10]
철에 의해 만들어진 물품으로 간단하게 무기류와 농공구류로 대별된다. 고대의 철은 토기처럼[11]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금, 은 마냥 따로 채굴과 정제의 작업을 거쳐야하는 재료이다. 쉽게 말하자면 토기와 금공품, 일상재와 위신재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다.
* 금공품(金工品)
금이나 은, 청동 등으로 장식된 물품을 뜻한다. 허리띠 장식[대금구], 신발[식리][12], 관(冠), 관모(冠帽) 등의 장식된 금속 유물들이 금공품이라고 불린다. 환두대도(環頭大刀)도 도신은 철이지만 그 밖의 장식으로 인해 사실상 금공품의 범주에서 분석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토기 분석의 결과가 살이라고 한다면 금공품 분석의 결과는 뼈에 비유할 수 있다. 금공품들은 위신재(Prestige Goods)로써 최상위의 신분들에 의해 향유되었다. 특히 고대 사회는 이러한 금공품의 하사와 수여 속에서 정치적 관계가 맺어지고 이루어졌던 바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교류의 흔적들이 금공품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 마구(馬具, 말갖춤새)
말을 타기 위한 일체의 갖춤들을 지칭한다. 한반도의 기승문화 자체가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퍼지며 동북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성립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마구류들의 변천은 개별적으로 분석하기엔 어려움이 따르고 동북아 내지는 남한이나 한반도 등의 거시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금공품과 더불어 교차 연대의 주된 근거 중의 하나이다.
* 고인골
- 유구
-
고분
고대에는 무덤을 만들고 피장자(被葬者)[13]의 생전 지위에 따라서 그에 걸맞은 각종 생활품과 금공 위신재들을 함께 부장[14]하였다. 또 특정한 신분에 따라서 봉토(封土)를 크게한다거나 높은 곳에 묻는다거나 그에 걸맞은 옵션에 따라 장사를 지냈다. 이는 현대에 남겨진 그들의 흔적이지만 뿐만아니라 위의 과정을 실현하는데에 실제로 이뤄졌을 제사[15]까지도 염두에 둔다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가 고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대의 자료 가운데서 가장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고 그 양도 굉장히 많다. 일부 개설서의 제목이 '죽음의 고고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주거지
주거지는 고분과 대부분의 속성이 반대에 해당한다. 직접 사람이 살았지만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점에서 주거지에서 나온 유물이 폐기의 동시성을 갖지 않는 것 때문에 연구와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주거지의 형태적인 부분 또한 속성화될 수 있는 요소인데다 보통 군집을 이루며 연속적으로 축조되기 때문에 개별 주거지에 대해서보다는 주거지의 군집 즉, 취락 전체에 대한 연구로 보통 이뤄진다. 고분자료가 정치적인 요소를 다룬다면 주거지자료는 사회, 경제적인 요소를 중점적으로 다룬다.[16]
- 유적
-
고분군
상술한 개별 고분 하나의 의미가 피장자 개인 또는 피장자와 같이 묻힌 사람 둘 이상의 개별 사람에 대한 정보를 뜻한다면, 그 고분들이 배치되고 얽혀진 고분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즉, 하나의 집단, 사회를 표상한다. 또 고고학 자료에서 시간성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시간에 따라서 고분군의 축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문제는 사회가 어떻게 성장하느냐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고분군간의 상사성과 상이성을 바탕으로 여러 고분군간의 비교 및 그룹화를 통해서 사회 전체 및 국가의 추이를 설명해 나갈 수 있다.[17] 이와 같은 의미 속에서 고분문화라는 포괄적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취락
고분군과 취락은 상술한 고분과 주거지의 차이가 있을 뿐 이론적 확장과정은 같다. 취락의 형성과 취락과 취락과의 관계, 시공간적 변천, 취락의 등장과 소멸 등의 여러 이유들을 바탕으로 일련의 해석을 도출한다.
3. 연구 방법
- 형식학적 방법
- 과학적 분석 방법
4. 관련 하위 분야
통상 역사고고학을 한다고 하면 원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를 지칭한다. 또 한 전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간적으로 조금만 이동해도 다른 국가나 집단이 나타나고 시대적으로도 상황이 금방 변하기 때문에 아래의 구분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전공에 있어 국가간의 구분은 약간 있는 편이다.[18]- 원삼국시대/삼한시대 고고학 - 고조선 / 부여 / 낙랑 / 남한 중부 지역 / 남한 남부 지역
- 삼국시대 고고학 - 고구려 / 백제( 전남 서부) / 신라 / 가야( 가 야 각 국)
-
통일신라 및
발해 고고학
그 외에도 선비, 말갈, 흉노 등을 다루기도 한다. [19]
광역의 시공간적 범위 내에서 역사시대를 다루는 경우도 있다.
- 동북아고고학[20]
- 중국 · 일본 고고학 - 해당 국가의 역사시대 고고학 연구 및 대상 국가와 한반도의 교류사 중심의 고고학 연구
5. 학문적 성격
원래 고고학 자체가 복합적 학문으로써 인문학적 요소와 사회학적 요소를 모두 갖고 있으며, 또 일부 과학적 분석방법으로 인해 자연과학적 요소 또한 포함되어 있다. 영미권 내지 북미의 인류학의 관점에서는 인류학의 하위 분야로 고고학이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유럽 및 동양권에서는 고고학은 역사학의 하위 분야와 같은 인식 내지는 역사학에 더 가까운 학문으로 구분된다.[21]특히 한국고고학은 중국과 일본과 함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역사고고학의 파이가 선사고고학이나 인류학에 비해서 조금 더 넓다. 따라서 역사시대의 고고학 분야에서 인류학적인 연구[22]보다는 역사학적인 연구[23]가 보편적이다. [24] 다만 역사고고학의 분야에 한하여 그러한 구분이 되는 것이지 한국고고학 전체를 놓고볼 때는 단순히 역사학에 치우친 것은 아니다.
한편 고고학에서는 과정주의 고고학(Processual Archaeology)의 관점과 과정주의에서 진일보한
역사고고학은 한편 문헌을 중심으로한 사학에 비해서 후발주자에 해당한다. 초창기엔 역사고고학의 해석과 방법이 일부 사학자들에게 무시받는 경향이 있었지만 현재는 고대사 복원에 있어 역사학만큼 중요한 분야가 되기도 하였다.
6. 관련 문서
- 고고학
- 고고학과
- 삼국시대 연대론 - 고고자료는 문자기록과는 달리 명시적인 연대에 대한 정보가 없다. 따라서 고고학에서 이를 분석, 판단하여 시간을 결정하게되고 해석을 도출하기 때문에 역사고고학에서는 고고자료의 시간성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다.[27]
- 인류학
- 역사학
[1]
사실 현대에도 엄연히 고고학적 분석은 유효하다. 1980년대 건물, 패션, 텍스트 등의 여러 스타일과 지금의 2010년대의 스타일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보면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역사고고학에서 다루는 분석과 해석들이 쉽게말하자면 그런 것과 같다.
[2]
관용적으로도 역사고고학이라고하면 원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를 다루는 고고학을 의미한다.
[3]
또는 특정한 연구 대상이 해당한다. 조선시대 읍성(邑城) 연구가 대표적이다. 고고학계 및 역사학계 모두의 접점과도 같은 주제랄까..
[4]
선대시대로부터 역사시대로의 전환기를 원사라고도 한다.
[5]
이는 신라의 무덤들이 봉토의 아래에 지하에 묻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도굴의 피해가 적다. 꼭 적석목곽묘가 아니더라도 석실이 되기 이전의 석곽묘들은 전반적으로 도굴피해가 적다.
[6]
물론 신라도 지역양식이라 부르는 재지 신라토기가 있었다. 하지만 신라 토기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나중엔 단각고배, 인화문토기로 통일된다.
[7]
참고로 신라토기 연대관으로는 이미 다 싸워서 어느정도 방향이 정해졌다. 가야도 어느 정도는 방향은 다 정해져 있긴 하다. 그러나 신라는 시종일관 확장 일변도의 흐름이었다면 가야는 여러 가야들이 치열하게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바 아직도 부산이라던지 창녕, 소가야권 일대의 논쟁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8]
대체로 봉토분의 아래지만 입구가 지상에 있는 형태이거나 반지하식 정도이다. 즉, 문열고 들어가서 들고오면 된다.
[9]
분구묘의 형태가 이렇다. 적석총 또한 마찬가지다.
[10]
시간에 관한 문제일 뿐, 고구려토기와 백제토기의 분류와 이해, 특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11]
흙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다.
[12]
그냥 나막신 같은게 아니라 금이나 금동 등으로 만들거나 도금한 매장의례에 사용된 신발을 뜻한다.
[13]
무덤에 묻히는 사람
[14]
석곽묘처럼 한번 장사지내고 난 뒤 무덤을 덮어버린 경우 발굴할때 나오는 유물들에 대해서 '폐기의 동시성'이 있다고 표현한다.
[15]
화려한 물품이 들어가는 끝없는 부장행렬, 높고 거대한 무덤, 동원된 무수한 사람들. 이런 부분까지도 경관고고학의 차원에서 다뤄지기도 한다.
[16]
다만 고분 자료가 부족한 일부 시대, 지역에서는 주거지 출토 토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남한 중부지방의 중도식 문화유형이 대표적인 예
[17]
사실
토기 하나만 놓고 정치성을 어떻게 표출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토기 자료를 포함한 고분과 그 피장자의 성격, 그 고분군의 성격, 고분의 고분군 내에서의 위계적인 위치가 어떠한지, 나아가 전체 국가 및 사회에서 어떤 위치인지 등을 종합한 뒤여야만 예를들어 "대가야의 몇 세기 대의 어떤 집단의 진출 과정을 설명해주는 토기"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8]
각 주제마다 변화의
테크트리가 있다. 낙랑 목곽묘에서 고조선을 전공한다던지, 고구려에서 발해라던지, 신라에서 가야로의 전공 변화 및 확장이 조금씩 있다.
[19]
밑의 동북아 고고학의 범주에도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20]
당장 동북지역의 테마를 다루더라도 동북아 고고학의 범주에 들어가긴 한다. 다만 신라나 가야 고고학을 하더라도 낙랑이나 중원과의 관련성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금관가야를 주제로 하게되면 동북아 전체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이런 경향이 강하다.
[21]
단적으로 대학교만 놓고 보더라도 인문대학에 포함된 고고학과가 있고 사회과학대학에 포함된 고고학과가 있다. 이름 또한 순수 고고학과도 아니다. 대부분 고고인류 아니면 고고미술사학과
[22]
광범한 범위의 변화에 대한 정의나 물질 뒤에 가려진 인간의 행위와 현상들에 대한 초점
[23]
인류학의 관점보다는 더욱 세부적이고 직접적인 사건과 원인에 초점
[24]
인류학이 약간 추상적이라면 역사학은 그 보다는 구체적이다.
[25]
물론 엄밀히 인지고고학이 후기 과정주의 고고학은 아니다. 하지만 후기과정주의의 사조의 속에서 나타난 연구방법이긴 하다.
[26]
또한 단순한 역사적 해석, 형식학적 비교만이 아니라 복합적인 연구방법과 해석들이 나타나고 있다. GIS적 분석기법만 하더라도 기존의 연구방법에서는 많이 변화한 양태다.
[27]
역사학에서는 시간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해석(또는 판독)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는 반면, 고고학에서는 해석에 대한 논의 뿐만아니라 그 근거가되는 고고자료에 대한 논의가 많다. 주로 시간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뿐 해석적인 면에서도 당연히 논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