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時代 年代論
1. 개요
고고학, 특히 역사고고학에 있어서 시간에 따른 분류는 분석에서 선행되어야할 작업이다. 이를 바탕으로 해석이 도출되는 바, 시간 즉, 연대는 역사고고학의 분야에서 여전히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는 주제이다.삼국시대 연대론은 그러한 역사고고학 관련 문서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대론에 관한 논쟁들을 집성해놓은 문서이다. 역사 고고학의 기본은 유물과 유구의 정확한 편년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시대 연대론에 대해서 50년에서 100년간의 차이가 나며, 역사고고학의 목적인 역사상의 복원에 당연히 해가 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금관국, 비자벌 문서에서 보다시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연대론으로 인해 문서 가독성이 많이 해쳐진 상태이다. 앞으로 연대론과 관련된 것들은 여기서 토론하도록 하자.
2. 중국
3. 고구려
4. 백제
4.1. 분묘 출토자료
4.1.1. 원주 법천리 4호분 출토 양형청자
4.1.2. 공주 수촌리 고분군 출토 마구류와 중국도자
5. 신라
6. 가야권역
6.1. 금관국
6.1.1. 대성동 29호분
대성동 29호분은 대형 목곽묘로써 구야국에서 금관가야로의 전환을 나타내는 중요한 고분이다. 29호분의 연대는 연구자들 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크게 두 가지 설로 양분되는데 3세기 말과 3세기 중엽으로 나눠진다. 전자는 신경철의 연대관이고 후자는 박천수의 연대관이다. 양자의 견해 간의 연대 폭은 대략 50년 차이가 난다. 이들의 연대관에 대해 서술하기로 한다.- 신경철은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을 주도한 발굴자로서 일련의 논고[1] 등을 통해서 금관가야의 고고학 자료에 대한 절대연대 근거를 제시 했는데 다음과 같다.
- 첫 번째로 제시한 근거는 경질토기의 출현시기이다. 원삼국시대 와질토기에서 삼국시대 회청색경질토기의 전환을 양동리235호분과 대성동29호분의 출현을 그 획기로 잡았는데. 대성동29호분 출토 양이부원저단경호를 중국 북방의 서진 무렵에 남방의 월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아 한반도에 전파 발생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晉書』 四夷傳 馬韓辰韓조 西晉 교섭기사와 『通典』 東夷傳 夫餘조 『秦書』 사이전 부여조의 太康6년조 기사 등의 문헌기록을 통해서 A.D 280년 전후의 부여족 남하로 인하여 회청색경질토기가 제작기술에 이입, 영남지방 전역에 전파 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 두 번째는 대성동 29호분에서 출토되는 정각식철촉(定角式鐵鏃)[2]이 일본의 쓰바이오쓰카야마고분(椿井大塚古墳)의 출토품과 비슷하며, 이는 이 고분의 일본측 연대관과 교차연대가 성립한다고 보고 있다 . 이 쓰바이오쓰카야마고분의 연대는 고바야시 유키오(小林行雄)가 이 고분 출토 삼각연신수경(三角綠神獸鏡)의 고식경군 가운데 가장 늦은 형식이 있는 것으로 보고 히미코가 239년 위(魏)에 입경할 때 사여 받은 경이 일정 기간의 전세를 거쳐 부장되는 것으로 판단하여 그 연대를 A.D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엽으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신경철이 세운 연대와 이 고분의 연대가 부합함으로 자신의 연대관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신경철의 연대관은 ①회청색경질토기의 출현, ②29호분 출토 동복 등의 오르도스 청동기의 부장과 ③대형 목곽묘의 출현은 280년 전후의 부여족의 남하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고바야시 유키오등이 설정한 1960년대 고분 연대관에 의거한 일본측 자료와의 교차연대를 통해서 뒷받침된다는 것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