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26 13:19:59

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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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寶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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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1.jpg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4. 보물 제491호

1. 개요

梁山 龍華寺 石造如來坐像. 현 경상남도 양산시 용화사에 있는 9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불상. 현재 용화사(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원동로 199-133)에 소재 중이며, 대한민국 보물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파일: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2.jpg

불상 높이 1.25m, 대좌 높이 0.95m.

현재 양산 용화사에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불상으로, 원래는 이 절이 아니라 과거 김해시 상동면에 존재했던 김해 최대 사찰 감로사(甘露寺)에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불상을 '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이 아니라 '김해 감로사 석조여래좌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본디 낙동강에 접한 상동면 감로리 신곡마을 444-1번지의 감로사(甘露寺)에 있었던 신라시대 불상으로, 감로사는 조선시대 김해지역에 존재하던 사찰 중에서 규모나 인지도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장 큰 사찰이었고, 고려 충렬왕 송광사의 주지로 유명한 원감국사 충지가 1266년부터 주지를 지내는 등 중량감 있는 스님들이 거쳐 간 거대 고찰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 '감로사의 노비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절의 세력도 컸고, 조선금속총람에도 ' 영조 때 김해 감로사에서 '진남루'라는 누각을 24개 돌기둥으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조선 후기까지도 존재감을 가진 사찰이었다. 김해읍지에도 '감로사는 남암, 중암, 서암, 도솔암, 백련암, 석수암 등의 다양한 암좌를 거느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렇게 통일신라 때부터 천 여년간 김해 내에서 가장 거대했던 감로사는 조선 말에 들어 유학자들의 집중 공격으로 폐사되었고 이젠 옛 흔적조차 거의 찾을 수 없는 상태다. 폐사지터로 추정되는 곳은 1970년대 개인에게 불하됐고, 이후 매립되어 공장이 들어서 있다. 현재 감로사와 관련된 작품으로는 본 불상과 1970년대 동아대 석당박물관으로 이전한 감로사지 3층석탑. 동아대 석당박물관 정원에 있는 감로사지 귀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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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김해뉴스 - 가야불교 뿌리를 찾아서 김해 최대 사찰 감로사, 왜 ‘허황옥’ 유래 장군차 군락지 옆에 세웠을까

기록에 따르면 이 석조 불상은 김해 감로사가 파괴된 후 그 폐사지에 뒹굴고 있다가 대한제국 말엽에 강변으로 옮긴 것이다. 이후 불상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던 중 1947년에 양산 용화사를 중창하다가 해당 불상이 재발견되자 강변에 있던 것을 옮겨와 주존으로 봉안하고 있다. 현재 양산 용화사는 본 불상을 모신 대웅전 1채와 작은 요사채 2동, 그리고 1칸짜리 산신각이 전부인 작디작은 단촐한 사찰이고, 절 앞에는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면서 주변 경관과도 단절된 상태기 때문에 해당 사찰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 불상을 보러 오는 것이라고 한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 #

특히 절이 경부선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피해가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라 불상에 대한 정밀안전진단이 실시되고 있다. 양산신문 :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철길 피해여부 조사

파일: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4.jpg

본 불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를 하고 있다. 광배의 형태는 주형 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로서 두 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한 후 광배 윗부분에 작은 부처 1구와 비천상을 조각해놓았는데, 우리나라 옛 불상의 광배에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예이다. 연화문, 비천보살상 등 8부중이 조각된 8각대좌도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불상의 짧은 목에는 신라 특유의 삼도가 뚜렷히 드러나있고, 신체는 당당한 어깨, 풍만한 가슴, 양감이 풍부한 팔과 다리 등에 볼륨감이 있으나, 대신 육계(肉髻)가 파손되어 조금밖에 없고 얼굴은 사각형으로 코·입·귀가 작아서 퇴화한 모습을 하고 있어 세부적인 기법에서는 이상적인 면이 사라지고 형식화되어 가는 측면을 보이고 있다.

파일: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3.jpg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석조 불상으로, 신라시대 경상남도 김해시, 양산시 지역의 석조공예술 및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에 1968년 12월 19일 '용화사석조여래좌상(龍華寺石造如來坐像)'이란 명칭으로 대한민국 보물 제491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8월 25일에 현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491호

원래는 김해군 상동면 감로리 절터에 있던 것을 조선시대 말에 부근의 강변으로 옮겼으며, 1947년 2월에 법당을 다시 지으면서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춘 완전한 불상이다.

당당한 어깨, 양감있는 가슴, 양감있는 팔다리의 표현에는 입체감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으나 손이나 목 등 세부표현에서는 형식화된 면이 엿보인다. 얼굴은 네모지고 튀어나온 이마로 인해 힘이 있으나 가늘게 뜬 눈, 작은 코와 입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시대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 왼쪽 어깨만 감싸고 있는 옷은 신체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의 표현 역시 간략하게 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에는 불꽃무늬, 연꽃무늬, 구름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광배 윗부분에는 작은 부처 1구와 비천상(飛天像)이 새겨져 있다. 특히 광배에 비천상이 새겨진 경우는 매우 드문 예로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의 광배와 동일한 형식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는 연꽃무늬와 비천보살상 등이 새겨져 있으며 8각으로 되어 있다.

통일신라 중기의 불상양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세부에서는 이상적인 면이 사라지고 형식화되어 가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