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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 Koninklijk Concertgebouworkest | |||
다른 이름 |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 | |||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 | ||||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 영어) | ||||
RCO (약칭) | ||||
창단 | 1888년 ([age(1888-07-01)]주년) | |||
정식 데뷔 | 1888년 11월 3일 | |||
거점 지역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
장르 | 클래식(고전 음악) | |||
콘서트 홀 | 콘서트허바우(Concertgebouw) | |||
상임지휘자 | 공석 | |||
링크 | | | | | |
1. 개요
국내에서는 보편적으로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로 통용되고 있다.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관현악단이자, 세계 최상위권으로 꼽히는 본좌 악단.[1] 암스테르담을 본거지로 하고 있다.
2. 연혁
악단 이름에 들어 있는 '콘서트헤보(Concertgebouw)[2]' 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연주회 전문 공연장의 명칭이기도 한데, 1888년 4월에 개관했다. 여기 상주하게 되는 이 악단은 몇 달 뒤에 창단되었고, 공연장 이름을 따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라고 명명되었다.첫 공연은 그 해 11월에 빌럼 케스의 지휘로 개최되었고, 케스는 동시에 초대 상임 지휘자로도 취임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연주회 감상 매너는 그야말로 막장이어서, 대중 콘서트가 아니라 정기 연주회에서조차 음식이나 음료수를 싸들고와 먹고 시끄럽게 잡담을 나누는 청중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케스는 많은 논란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의 이러한 비매너 행위를 엄격히 금지시켰고, 악단에도 엄정한 태도를 취하면서 양자의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케스가 1895년에 스코틀랜드 관현악단(현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으로 이임한 뒤에는 미래에 거장이 된 빌렘 멩겔베르크라는 지휘자가 뒤를 이었는데, 부임 당시 겨우 스물네 살이라는 젖 뉴비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악단 측으로도 이런 별 경험없어 보이는 듣보잡이 등장한 것에 별로 탐탁지 않은 것 같았지만, 멩겔베르크는 전임자 못지 않게 단원들을 갈궈대면서 분위기를 다잡아갔다. 애송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멩겔베르크는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 주어 그리그에게 격찬을 받았고,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단번에 급상승시켰다. 단원들과 궁합이 어찌되었든 멩겔베르크는 취임한 이래로 무려 50년 동안이나 상임 지휘자 자리를 지켰다.[3]
멩겔베르크는 기존 레퍼토리 외에도 생전에 친교가 있었던 구스타프 말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들을 발빠르게 네덜란드에 소개했고, 음반 녹음도 적극적으로 진행해 악단과 HMV(현 EMI)와 텔레풍켄(현 텔덱)에 상당량의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자신 외에도 부수석 급의 직책인 '제1지휘자' 와 부지휘자 급인 '제2지휘자' 라는 직책을 만들어 동료나 후배 지휘자들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악단은 1차대전 때도 해단되는 일 없이 계속 활동할 수 있었지만, 2차대전이 터지자 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독일군에 점령된 네덜란드는 나치 총독의 엄한 통제를 받게 되었고, 악단도 이런저런 친나치 집회의 들러리나 독일군 위문 연주회 등 관제 행사의 참여를 강요받았다.
이 상황 속에서 멩겔베르크는 나치에 협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멩겔베르크의 부모가 독일에서 건너온 이민자였던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4] 멩겔베르크는 그냥 협조하는 수준에서 몇 발짝 나가서 친나치 발언을 공공연히 하는 등의 네덜란드의 반나치 레지스탕스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어버렸다.
종전 후 몇몇 애호가들의 쉴드에도 불구하고 멩겔베르크는 네덜란드 법정에서 나치 부역자로 단죄되었고, 그 동안 네덜란드에서 받아왔던 모든 명예와 혜택을 박탈당하고 지휘 활동을 영구적으로 금지당했다. 독일 등에서 연주 금지당했던 지휘자들이 1947년 순차적으로 복귀하자 네덜란드 법정도 종신 지휘금지 조치를 6년으로 단축했다. 그러나 멩겔베르크는 스위스에서 은둔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멩겔베르크의 후임은 대전 중 제2지휘자로 재직했던 에두아르드 판 베이눔이 맡았는데, 베이눔은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제약을 받았으나 전후 어려운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전후 네덜란드에 설립된 필립스 레코드를 통해 녹음 활동을 재개했다. 전임자에 비해 유려함은 덜했지만 좀 더 명쾌하고 현대적인 면모의 연주를 끌어내면서 악단의 체질을 개선시키기도 했다.
베이눔이 1959년 4월에 악단과 리허설을 하던 중 심장 발작으로 급서하자, 네덜란드 내에서 촉망받던 젊은 지휘자 베르나르드 하이팅크가 제1지휘자 역할로 공백기의 활동을 대신했다. 오케스트라는 하이팅크를 장기적인 차기상임지휘자로 여겼지만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전 중 제1지휘자로 초빙되었던 독일의 오이겐 요훔를 초청하여 하이팅크와 공동 상임지휘자 제도를 운영했다.
하이팅크와 요훔이 1961년에 공동 상임지휘자에 취임했고, 1963년에 요훔이 물러나고 하이팅크가 단독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하이팅크 역시 필립스를 중심으로 상당량의 녹음을 남겼다. 1980년대 초반에는 재정난에 빠진 네덜란드 정부가 악단 재정 감축과 함께 20여 명의 악단원들을 해고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빡친 하이팅크가 대놓고 정부를 디스하면서 자신도 때려치겠다고 강하게 나왔고, 정부 측에서 버로우 타면서 하이팅크에 대한 악단의 신뢰도 크게 상승했다.
1988년에는 네덜란드의 군주인 베아트릭스 여왕으로부터 '왕립' 호칭을 받아 공식 명칭이 현재의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하이팅크는 왕립 칭호를 받은 그 해에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단 음악 감독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했고, 후임으로는 1985년부터 정기적으로 객원 출연 중이었던 이탈리아 출신의 리카르도 샤이가 창단 이래 최초의 외국인 지휘자로 부임했다. 샤이 역시 취임 전부터 단원들로부터 평판이 좋았고, 하이팅크가 다루었던 레퍼토리 대부분을 넘겨받으면서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샤이는 2004년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으로 이임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고, 후임으로는 라트비아 출신의 마리스 얀손스가 부임했다. 얀손스는 부임 당시 3년 계약을 맺었지만, 이후 계속 계약이 추가 갱신되어 2014년 현재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얀손스도 베이눔과 마찬가지로 심장이 그리 좋지 않아서 공연 취소크리가 종종 벌어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 마리스 얀손스는 2015년까지만 상임을 맡고 퇴임하기로 2014년 4월 결정했으며, 이에 악단은 얀손스의 뒤를 이을 상임지휘자로 이탈리아 출신의 다니엘레 가티를 선택했으나 2018년 가티의 여성 뮤지션 2명에 대한 성추행 혐의가 드러나 피소되면서 해임당했다. 현재 악단은 오케스트라 모차르트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가티 대신 제1객원 지휘자인 헝가리의 이반 피셔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3. 역대 상임 지휘자(Chief condu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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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1888–1895) |
2대 (1895–1945) |
3대 (1945–1959) |
4대 (1961–1963) |
빌럼 케스 | 빌렘 멩겔베르크 | 에두아르드 판 베이눔 | 오이겐 요훔 | |
4대 (1961-1988) |
5대 (1988–2004) |
6대 (2004–2015) |
7대 (2015-2018) |
|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 리카르도 샤이 | 마리스 얀손스 | 다니엘레 가티 |
- 빌럼 케스 (Willem Kes, 재임 기간 1888-1895)
- 빌렘 멩겔베르크 (Willem Mengelberg, 재임 기간 1895-1945)
- 에두아르드 판 베이눔 (Eduard van Beinum, 재임 기간 1945-1959)
- 오이겐 요훔 (Eugen Jochum, 재임 기간 1961-1963. 하이팅크와 공동 상임지휘자)
-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Bernard Haitink, 재임 기간 1961-1988. 1999년에 계관 지휘자 호칭 수여)
- 리카르도 샤이 (Riccardo Chailly, 재임 기간 1988-2004. 퇴임 후 명예 지휘자 호칭 수여)
- 마리스 얀손스 (Mariss Jansons, 재임 기간 2004-2015)
- 다니엘레 가티 (Daniele Gatti, 재임 기간 2016-2018)
이외에도 2000년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2021년 이반 피셔가 명예 객원 지휘자 칭호를 받았다.
4. 특징
네덜란드 클래식계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있는 단체인데, 합주력도 합주력이거니와 각 파트 별로도 상당한 실력의 인물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서 실내악 활동도 활발한 편이다. 창단 이래로 줄곧 콘서트 전문 악단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지만, 샤이 재임기에는 네덜란드 오페라단의 공연에서 관현악 연주를 맡는 등 오페라 영역에도 진출해 활동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전방위급 악단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네임드 오케스트라 답게 많은 음반을 녹음했으며 명반이 많기로 유명하다. 샤이 이전까지 대부분의 녹음은 네덜란드의 필립스에서 이루졌다.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와 필립스 음반사 사이의 관계는 땔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필립스가 음반산업에 진출한 것 자체가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를 크게 염두에 둔 것이었다. DG가 초기에 베를린 필과 파트너쉽을 맺고 거의 모든 녹음을 베를린 필과 했던 것과 유사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녹음뿐만 아니라 필립스가 콘서트헤보 홀에 각종 음향장비를 상주시켜놓고 음향에 관한 여러 기술적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필립스의 녹음은 당대의 EMI 등에 비해 확실히 선명하고 깨끗한 음향을 들려줬으나 너무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는 음향이 좋고 잔향이 많은 콘서트헤보에서 선명한 음을 뽑아내기 위한 결과로 보여진다. 나중에 콘서트헤보와 계약을 맺게된 DG나 DECCA가 녹음한 음반들은 잔향이 크고 디테일이 다소 죽어있는 소리를 들려준다.
지금 들어보면 꽤 느끼하고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멩겔베르크의 녹음도 나름대로 괜찮은 연주를 들려준다.
베이눔은 새로 설립된 필립스와 제휴를 맺고 여러 음반을 녹음했다. 멩겔베르크 시절의 느끼함과 질척함에서 많이 벗어나 꽤 깔끔한 연주를 들을 수 있는데, 이는 베이눔의 스타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필립스의 특유의 선명하고 샤프한 사운드가 반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노 사운드의 한계 때문에 때론 지나치게 건조하고 거칠게 들리기도 한다.
베이눔 사후의 공백을 잘 메꿔준 요훔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라든가 바흐의 4대 종교음악 녹음 같은 경우에도 올드팬들에게 나름대로 소장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이팅크는 스테레오 녹음 기술 방식이 막 정착하여 각 음반사들이 레퍼토리 구축에 들어간 시기에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덕분에 필립스에서 막대한 녹음을 남겼는데 아예 교향곡 전곡단위로 녹음을 했다. 특히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선 녹음 중 하나였던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 녹음은 큰 주목을 받았고,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녹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들 하이팅크의 녹음들도 필립스의 특징이 반영되어 상당히 현대화된 샤프한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하이팅크가 다소 유한 해석을 들려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나름 상보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샤이 재임기에는 지휘자가 데카 전속이었던 관계로 음반사도 그 쪽으로 옮겼는데,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말러 교향곡 전집과 브루크너 교향곡들의 녹음이 화제가 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녹음들이 있으며, 바레즈의 작품 전집이나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앨범 같은 진귀한 근현대음악 녹음들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데카에서 녹음한 음반들은 필립스와는 달리 상당히 잔향이 있는 사운드를 들려주는데, 이는 DG가 콘서트헤보에서 녹음한 음반들과도 비슷하다. 이런 사운드가 콘서트헤보의 원래 사운드에 더 근접한 사운드로 여겨진다. 연주를 어지간히 말아먹지 않는 이상, 일단 음반을 내면 대개 보통 이상의 평가는 받고 있는 듯.
다만 샤이 말기부터 음반사들이 매출 부진으로 영 좋지 않은 상태라, 다른 메이저 악단들과 마찬가지로 2000년대 중반 부터 'RCO Live' 라는 자체 음반사를 차려서 실황 연주 중심으로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상주 공연장은 창단 이래 변함없이 콘서트헤보의 그로테 잘(대강당)을 사용하고 있는데, 양차 세계대전에도 폭격 등으로 개발살나지 않고 잘 버텨와 고풍스러운 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내부 음향 상태도 꽤 좋은 편이라, 유럽 유수의 콘서트홀을 꼽을 때 늘 상위권에 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연상하는 공연장의 구조, 즉 평평한 무대와 계단형의 청중석이 아니라 평평한 청중석과 계단형의 무대라는 살짝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연주자들의 출입구 역시 좌우 측면이 아니라 무대 뒤쪽 계단 꼭대기. 따라서 빠른 걸음으로 등장하는 지휘자나 연주자를 보면 굴러내려올 것 같은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종종 발을 살짝 헛딛으며 아찔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 콜에 응하기 위해서 지휘자나 협연자는 그 가파른 계단을 올라왔다가 내려와야 하는 수고를 반복해야 한다. 사실 그로테 잘만의 특징은 아니고 19세기 혹은 그 이전에 지어진 연주장이 이런 형태인 경우가 많다. '신발상자' 스타일이라고도 하며, 대표적인 것이 빈 필의 빈 무지크페라인. 지어진 시기나 형태를 보면 짐작하겠지만, 객석의 규모가 작은 것이 단점이다. 2000석이 채 안된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입체적으로 지어진 현대식 콘서트 홀( 베를린 필하모니나 예술의 전당 등)보다 음향효과는 좋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수수께끼다.
5. 기타
내한 공연은 상당히 비싸다. 콘세르트헤바우 공연장에서는 25유로 부터 90유로까지이며, 만 26세 미만은 12.5유로로 공연을 볼 수 있다.2020년 6월 13일 올리버 헬덴스가 여기서 무관중 DJ잉 라이브를 펼쳤다.
[1]
21세기 들어서 해외 음악 잡지등에서 전문가들이 평가순위를 매기면,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속칭 '4대 필'이 아닌, 이들이 십중팔구 1위를 차지한다.
[2]
'(Concert-연주회 + gebouw-건물/네덜란드어)'. 즉, '음악당' 이라는 뜻이다.
[3]
메이저 악단에서 이 정도로 오래 대빵질을 한 지휘자는 정말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기껏해야 레닌그라드 필의 상임이었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정도가 경쟁자로 눈에 띌 뿐이었다.
[4]
애초에 멩겔베르크의 본명도 독일식인 빌헬름이다. 다만 일종에 예명으로 네덜란드식인 빌렘이란 이름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