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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307년, 로마군이 삼니움군을 격파한 전투.2. 상세
기원전 313년, 삼니움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로마군은 삼니움 측으로부터 평화 협약을 맺자는 제안을 받자 공세를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상이 이어지던 기원전 312년, 로마가 삼니움을 복속시키면 그 다음은 자기들 차례라고 판단한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다. 삼니움인들은 이에 호응해 평화 협상을 취소했고, 로마는 북쪽의 에트루리아, 남쪽의 삼니움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이에 원로원은 기원전 311년 집정관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에게 삼니움을 상대하게 했고, 또다른 집정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에게 에트루리아인들을 상대하게 했다. 삼니움인들이 크루발레 시를 공략하고 사로잡은 로마 수비대를 채찍질하자, 브루투스는 크루발레를 탈환한 뒤 보비아눔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삼니움인들은 접근하기 힘든 산간 초원에 양떼가 많다는 거짓 정보를 줘서 브루투스가 그곳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한 뒤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브루투스가 병사들을 비탈길로 올려보내 매복한 적병을 공격하게 하는 바람에 또다시 패배했다.
기원전 310년,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는 알리파에 등 삼니움의 많은 요새와 마을을 파괴하거나 점령했다. 한편 로마의 소규모 선박들이 캄파니아의 폼페이 시로 보내진 뒤 루케리아의 시골 지역을 약탈하다가 지나치게 깊숙이 진군했다가 시골 사람들이 결성한 민병대의 습격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이후 삼니움인들은 루틸루스를 회피해 북상하여 에트루리아인과 연합하기로 했다. 루틸루스는 북상하는 적군을 급히 추격해 알려지지 않은 지점에서 따라잡았으나 뒤이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여러 장교를 상실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기원전 309년, 로마 원로원은 북상해오는 적을 막기 위해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를 독재관으로 선임했다. 쿠르소르는 삼니움과의 국경 인근의 볼스키인 마을인 롱구라에서 마르키우스와 합류해 병력을 추스린 뒤 삼니움인을 상대로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맞붙어 승리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308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가 삼니움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들이 전투를 회피하고 산악 지대와 성채에 의존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에트루리아와 휴전 협약을 맺고 귀환하던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움브리아인들에 의해 저지되고 다른 움브리아군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쿠르소르는 즉각 북상하여 메바니아 전투에서 움브리아인들을 격파했다.
이렇듯 삼니움과 전쟁을 재개한 뒤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도 다른 세력의 공격으로 인해 삼니움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던 로마는 에트루리아와 움브리아를 잠잠하게 만든 직후인 기원전 307년 삼니움을 향한 새로운 공세를 개시했다.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는 삼니움에 가담한 아풀리아의 살렌티니인들을 공격해 여러 마을을 점령했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는 총독의 자격으로 삼니움인과의 전쟁을 주도했다. 그는 알리파에로 쳐들어온 삼니움인과 맞붙어 격파하고 그들의 진영을 포위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룰리아누스는 삼니움인들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하자 그들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옷 한 벌만 입은 채 멍에 아래로 지나가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는 카우디움 협곡 전투 당시 로마군이 겪었던 굴욕을 복수한 것이었다. 이때 포로들 중에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헤르니키인 몇 명이 있자, 그는 이들을 로마로 보내 이들이 징집벙인지 삼니움을 위해 자진해서 가담했는지 조사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헤르니키인들은 로마가 장차 자신들을 징벌하러 들 거라 여기고 반기를 들었다. 파비우스는 급히 삼니움을 떠났고, 삼니움인들은 이 때를 틈타 칼라티아와 소라를 공략하고 로마 수비대를 포로로 삼았다. 삼니움족은 이후에도 계속 저항했지만, 기원전 305년 보비아눔 전투에서 참패하자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고 요청했고, 기나긴 전쟁에 지친 로마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제2차 삼니움 전쟁이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