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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25년, 로마군이 삼니움족을 격파한 전투.2. 상세
제2차 삼니움 전쟁 2년째인 기원전 325년, 원로원은 삼니움인과 아드리아 해 인근에 거주하는 켈트 계열 민족인 베스티니인들이 연합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원로원은 당해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에게 베스티니인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겼고,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게 삼니움인을 격파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런데 카밀루스가 곧 병에 걸려서 군대를 이끌 수 없게 되자, 원로원은 그를 대신할 독재관과 기병장관을 선임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를 독재관으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를 기병장관으로 선택했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파피리우스는 전투를 치르기 전에 닭 점괘를 쳐봤는데 결과가 좋지 않자 '신성한 닭'을 관리하는 사제와 상의한 뒤 신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로마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룰리아누스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절대로 전투를 벌이지 말고 숙영지를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정찰병들이 삼니움인들의 경계가 느슨하다고 보고하자, 룰리아누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삼니움 진영으로 진격했다.
로마군은 임브라니움 마을(위치 불명) 인근에서 대규모 삼니움군과 마주쳤다.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기 위해 몇 차례의 기병 돌격을 벌였으나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자,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을 맡고 있던 루키우스 코미니우스가 말에서 재갈을 제거한 뒤 새로운 돌격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룰리아누스가 이를 허락하자, 기병들은 말의 재갈을 제거한 뒤 훨씬 빠른 속도로 돌격했고, 삼니움군의 전열은 무너졌다. 리비우스는 이 전투에서 삼니움족 20,000명이 전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군법에 따르면, 승리를 거둔 독재관과 기병장관은 전리품을 나눠 가져야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는 독재관 몫으로 돌아갈 전리품을 모조리 불태우게 했다. 그 후 독재관이 아닌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승리를 보고했다. 이에 격노한 파피리우스는 군대로 돌아와서 룰리아누스를 체포해 사형에 처하려 했다. 룰리아누스는 가까스로 탈출해 로마로 피신했고, 원로원과 평민 모두가 룰리아누스를 용서해달라고 청원했다. 파피리우스는 룰리아누스를 기필코 죽여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룰리아누스와 그의 아버지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자 명령을 철회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파피리우스는 삼니움족을 상대로 2번 더 전투를 치렀다. 룰리아누스에 대한 그의 강압적인 태도와 군법을 혹독하게 적용하는 모습은 병사들의 반감을 샀고, 첫번째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 않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그는 좀더 너그러운 대우와 전리품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고, 병사들은 그제야 전의를 되찾았다. 그 결과 며칠 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확실히 승리했고, 이후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퀴리누스 신전을 건설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이 신전은 그의 아들 루키누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가 집정관을 맡은 기원전 293년에 건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