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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정치 | <colcolor=#000,#fff> 칼리파 | 역대 파티마 칼리파 |
행정구역 | 마흐디야 | 카이로 | |
경제 | 디나르 | 이슬람 황금기 | |
종교 | 이스마일파 | |
문화 | 비마리스탄 | 알 아즈하르 모스크 |
대학-사원 단지의 전체적인 모습
이슬람 건축의 걸작인 내부 중정
1. 개요
아랍어 الجامع الأزهر영어 Al-Azhar Mosque
이집트 카이로 구도심의 모스크. 카바, 예언자 모스크, 우마이야 모스크 등과 함께 이슬람권에서 가장 유서깊고 상징적인 사원 중 하나이다. 부지 내에 있는 이슬람권 최고의 신학교인 알아즈하르 대학교[1] 역시 유명하다. 알 아즈하르는 '가장 고결한'이란 뜻이다.
970 ~ 972년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무이즈의 명으로 카이로 (알 까히라) 시의 중심 사원으로 건설되었다. 그후 2세기 가량 이스마일리 시아파 모스크 & 마드라사로 기능했으나[2] 1172년 살라흐 앗 딘 유수프가 수니파로 전환시킨 후 현재까지 수니파 이슬람 신학의 중심지로 남아있다. 모스크의 대표자인 알아즈하르 대이맘은 수니파 이슬람의 최고 권위자로 여겨지며, 파트와[3]를 내린다.
2. 역사
파티마 시기의 건축이 잘 남아있는 내부 예배당
알 하피즈 시기에 더해진 돔
970년 4월에 착공 후 972년 6월에 완곹된 알 아즈하르 모스크는, 973년의 이둘 피트르에 알 무이즈가 예배를 인도하며 공식적으로 금요 사원으로 거듭났다. 본래 이름은 만수리야 혹은 까히라 모스크였으나 알 무이즈가 파티마 앗 자흐라의 이름에서 딴 알 아즈하르로 정하였다. 989년, 알 아즈하르는 카디 (법관) 앗 누만 빈 무함마드 등 45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울라마가 조직되며 신학교로 거듭났다. 초기 이름은 도시 이름을 따서 알 만수리야, 알 까히라 모스크 등으로 불렸으나 칼리파가 파티마의 호칭인 자흐라를 응용한 알 아즈하르로 고정되었다. 쉬아 울라마는 기존에 비밀로 치부되던 이스마일리 교리를 대중에게 가르쳤고, 그러한 강의는 남녀 구분으로 진행되었다. 알 무이즈와 알 아지즈 등의 칼리파들은 라마단 기간에 최소 한 번은 금요 예배를 인도했다.
이후 칼리파들은 모스크의 확장에 나섰다. 알 아지즈는 천장을 높였고, 알 하킴은 중수 후 1005년에 수천 권의 필사본을 지닌 도서관을 더하였다.[4] 다만 1009년 완공된 알 하킴 모스크가 칼리파의 딘독 설교지가 되었고[5], 이후 서서히 소외되어 쇠퇴하던 알 아즈하르 모스크는 알 무스탄시르에게 보수되었다. 1138년에는 알 하피즈가 중정에 뾰족한 아치와 석고 부조를 더하고 예배당 입구에 돔을 세우는 등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하지만 12세기 후반, 내분과 십자군의 침공 등의 혼란기에 도서관의 장서들은 흩어졌고 알 아즈하르는 재차 쇠퇴했다. 1169년 이집트를 장악한 살라흐 앗 딘 유수프는 쉬아 울라마를 축출하고 수니파 모스크로 개조했다.[6]
2.1. 수니파 전환
1309년에 세워진 타이바르시야 마드라사의 미흐랍
1440년, 수단인 대내관 가우하르 엘카나크바이가 세운 자우하리야 마드라사 & 영묘
새로 부임한 카디 사드르 앗 딘 빈 디르바스는 여전히 쉬아 세력이 있던 모스크가 부담스러웠는지 금요 예배 진행을 금하였고, 비교적 규모가 크고 최근에 세워진 알 하킴 모스크에서 진행했다. 살라흐 앗 딘은 미나렛 하나를 추가한 것 외에는 알 아즈하르를 무시했다. 그나마 아랍 철학 강의만이 지속되었고, 일부 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수업을 열 뿐이었다.[7] 한편 알 아즈하르는 아이유브 시기 이집트 각지에 세워진 26개의 수니파 마드라사 교육 체제를 수용했다. 특히 기존의 쉬아 사상에게서 더욱 차별화 및 반박하는 신학 교육을 중심으로 논증학, 수학 ,과학 등도 가르치며 종합 대학으로 나아갈 기초를 마련했다.
아이유브 왕조기 소외되었던 알 아즈하르는 맘루크 왕조기에 대대적으로 증축되어 현재의 웅장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1266년 1월, 술탄 바이바르스는 약 한세기 만에 금요 예배 진행을 허가했다.[8] 이는 아이유브 시기 도시마다 하나의 회중 사원만 있어야 한다고 본 샤피이파 대신 그러한 제약이 없는 하나피파가 맘루크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맘루크 조는 학생 및 교수진에 대한 재정 지원을 부활시켰고, 아미르 이즈 앗 딘 아이다무르 알 힐리는 부근에 사저를 지으며 알 아즈하르 모스크의 외벽과 천장 등을 보수했다. 그는 또한 카펫을 전면 교체했다.
1302년, 이집트의 지진으로 모스크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미르 사이프 앗 딘 살라르가 보수했다. 1309년에는 북서벽을 일부 허물어 아크부가위야 마드라사가, 1332-40년에 타이바르시야 마드라사[9]가 더해지며 부지가 넓어졌다. 다만 두 마드라사 모두 별개의 문과 예배당이 있었다. 알 아즈하르는 1397년 바르쿠크, 1424년 알 무아야드 샤이크를 시작으로 술탄들의 직접적인 증축을 받으며 확장되었다.[10] 특히 15세기 말의 카이트베이와 깐수 알 구리는 선대에 실패한 석조 미나렛 건립 등 증축을 통해 울라마의 환심을 사려 했다.
2.2.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
맘루크-오스만 시기에 지어진 돔과 미나렛
18세기 무렵에 세워진 무자이닌 문 일대
14세기까지만 해도 알 아즈하르는 (살라딘이 세운) 이집트의 다른 마드라사들과 달리 공교육 체계에 포함되지 않고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했다. 카이로의 엘리트층은 주로 그러한 마드라사에서 수학하였다. 그럼에도 수세기간 축적된 지식을 기반으로 법학, 신학, 아랍어 등에서 높은 수준을 보였기에 명성을 듣고 이집트 뿐만 아니라 이슬람권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어 학생 수에서는 알 아즈하르가 최대였다. 학생들은 국적에 따라 모스크 주변에 세워진 리와크 (기숙사)에 배정되었고, 평균 6년 과정 후 학위를 취득했다. 14세기 후반에는 대학자 이븐 칼둔이 강학하기도 했다. 15세기 무렵 이집트의 울라마 중 1/3이 알 아즈하르의 학생 혹은 교수 출신이었다. 다만 맘루크 시기까지는 아직 카이로 내에서는 살리히야 마드라사가 알 아즈하르 보다 더 명문으로 여겨졌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의 정복 후, 존중은 있었지만 직접적인 조정의 후원은 끊겼다. 셀림 1세는 카이로를 떠나기 전, 알 아즈하르의 금요 예배에 참석했고 이후의 총독들도 자주 찾았지만 후원을 한 경우는 2명 뿐으로 거의 없었다. 그나마 가끔 학생 및 교수들에게 급여를 주는 정도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1523년 등 맘루크들의 잦은 반란에도 그들에게 베이 작위를 주며 체제를 크게 바꾸지 않았고, 18세기 들어 맘루크 계급은 사실상 자치를 얻게 되었다. 그들 중 알 카즈두글리 베이는 1735년 장님 리와크를 신설하고 카이트베이가 세웠던 튀르크, 시리아 리와크를 재건하였다. 이는 2세기 만에 최대의 증축이었다. 1748년에는 카트쿠바 (예니체리 대장) 압둘라흐만이 밥 알 무자이닌 (이발사들의 문)[11], 밥 앗 사이다 (사이디들의 문)[12], 밥 앗 슈르바 (죽의 문)[13]을 세웠고 기존 예배당 남쪽에 하나를 추가하여 기도 공간을 2배로 늘렸다. 그외에 여러 리와크를 보수한 그는 1776년 사망한 후, 미리 알 아즈하르 내에 지어놓은 영묘에 묻혔다.[14]
오스만 시기 알 아즈하르는 살리히야 마드라사를 제치고 이집트 최고 명문대로의 입지를 굳혔고, 18세기 말까지 이집트 울라마의 중심이 되었다. 알 아즈하르의 셰이크 (교수)들은 1년마다 교체됭 파샤 (총독)의 조언자로써 정치에 관여할 수 있었다. 학생들 역시 정치적 의견을 내어 자주 시위를 했고, 이에 인근 상점들이 휴점하는 등 연대를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울라마까지 가세하면 걷잡을 수 없었다. 1730-31년, 튀르크 아가 (장교)들은 3명의 범인을 추격하다 알 아즈하르 인근 주민들에 피해를 줬다. 이에 학교 측이 항의 차원에서 대문을대 걸어 잠그자 놀란 총독이 사태를 키우지 않기 위해 아가들의 알 아즈하르 접근을 금지하기도 했다. 1791년에는 왈리 (총독)이 후세인 모스크 주변의 주민들을 폭행하자 그들은 알 아즈하르로 가서 시위했고, 해당 왈리는 곧 해임되었다. 한편 오스만 시기 알 아즈하르의 총장은 대부분 말리키파에 속했는데, 이는 18세기 말엽 샤피이파의 압둘라 앗 슈브라위의 임명으로 깨지게 된다.[15] 또한 이 시기 알 아즈하르에는 공식 교과 과정에 신학 외에 논리학, 철학 등이 더해져 근대적인 종합 대학으로 나아갔다.
2.3. 근대
19세기 중반에 묘사된 알 아즈하르
1798년 7월, 카이로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9인의 알 아즈하르 셰이크들로 구성된 디완 (국무회의)을 구성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동맹임을 강조하면서도 알 아즈하르 이맘들에게 이슬람 법 하에서 자신에 복속하는 파트와를 내게 요구했으나 거절되었다. 그해 9월, 오스만 조정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자 여론은 싸늘해졌고 결국 10월 21일 알 아즈하르를 중심으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창, 식칼, 돌 등으로 무장한 주민들은 거리를 뒤덮었다. 다음날 디완에서 셰이크들은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을 촉구했고, 나폴레옹은 화를 내다가 마지못해 수용했다. 하지만 그들의 설득에도 민병대는 프랑스 측이 약화되었다 여겨 봉기를 지속했고, 나폴레옹은 시타델에 배치한 포병대에게 알 아즈하르를 표적으로 삼아 포격을 명령했다. 이후 진압이 벌어진 결과, 3백여 프랑스 군과 3천여 주민이 사망했다.
무력 진압 과정에서 프랑스 군의 포격과 내부 진입으로 알 아즈하르는 일부 파괴를 겪었고, 6명의 울라마가 약식 재판 후 처형되었다.[16] 또한 프랑스 군인들은 신발을 벗어야 하는 모스크 예배당에 군화를 신은 채로 출입하고, 무기 휴대가 금지되었음에도 총을 쏘기도 했다. 또한 미흐랍에 말을 묶어두고, 기숙사 및 도서관을 습격했으며 쿠란을 바닥에 던지는 등 현지 무슬림들에게 불경하고 모욕적인 행동으로 불만을 키웠다. 나폴레옹은 더이상의 헙상을 거부했고, 프랑스 군은 이집트인은 눈에 보이는대로 체포하여 감금함 후 무기가 발견되면 즉시 처형하는 등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결국 1799년 나폴레옹이 떠난 후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이 된 클레베르는 이듬해 3월, 알 아즈하르 학생 술라이만 알 할라비에게 암살되었다. 그후 모스크는 1년 넘게 폐쇄되었고, 1801년 8월 영국-오스만 군이 당도한 후에야 재차 열렸다.
한편 나폴레옹의 침공과 함께 전해진 근대적 인쇄술은 기존에 구술 및 암기 중심이던 알 아즈하르의 교육을 교재와 필기 중심으로 전환시켰다. 다만 알 아즈하르 자체에 인쇄소가 생긴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또한 서양의 강력한 군사력을 경험한 울라마는 기존에 경시하던 과학 교육을 강화했고, 전후 집권한 메흐메드 알리 파샤 역시 세속적인 교육을 강조했다. 따라서 역사, 수학, 근대 과학 등의 교과가 추가되었고 1872년에는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가 유럽 철학을 교과 과정에 도입하였다. 다만 정교분리 국가를 지향했던 메흐메드 알리는 알 아즈하르 울라마의 정치 개입을 제한했고, 기존에 면세였던 리즈카와 마드라사 부지에 토지세를 매기는 등 알 아즈하르 재정에 타격을 주었다. 1809년 6월에는 리즈카의 땅문서를 압수했고 이에 분노한 나킵 알 라슈라프 ( 샤리프[17] 지도자)이자 울라마들의 동맹인 우마르 마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다미에타로 유래되었다.
메흐메드 알리는 기존에 알 아즈하르 셰이크들이 맡던 자리에 근대적 교육을 받은 신지식인들을 임명했고, 학생들을 프랑스로 유학 보냈다. 이로써 알 아즈하르는 교육계에서의 주도권을 잃었고, 이스마일 파샤 시기에는 카이로를 유럽식 도시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소외되었다. 한편 그의 막대한 지출은 일시적인 목화 생산량으로 감당할 수 없었고, 영국은 차관을 명분 삼아 1882년 이집트를 속국화하였다. 다만 정식 군주를 자처한 이스마일 파샤 때부터 밥 앗 사이다와 아크바가위야 마드라사가 보수되고 테우피크 파샤 대에는 카트쿠다 예배당의 보수 및 외벽을 길과 평행하게 맞추는 등 국가 정체성의 강화와 함께 알 아즈하르의 관리에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보수는 압바스 2세가 외벽을 중건하고 동남쪽 모서리에 1901년까지 신맘루크 양식의 3층짜리 리와크 알 압바시를 신설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그의 치세에 설립된 아랍 예술 기념물 보존 위원회는 파티마 시기의 원형에 맞춰 중정을 복원했다.
19세기 후반은 건축 뿐만 아니라 교육 체계의 개혁기이기도 했다. 1872년 총장 무함마드 마흐디 알 압바시는 교원 채용과 시험을 표준화했고, 도서 관리 및 위생 문제도 신경 썼다. 이러한 학제 개혁 후 1885년, 알 아즈하르는 이집트 내 모든 대학들의 운영을 총괄하게 되었다.[18] 한편 알 아즈하르는 보수적이면서도 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원리주의에는 반대했다. 교통의 발달로 알 아즈하르에는 인도네시아 등 남아시아 학생들도 대거 수학하였고, 이들은 후일 와하비즘의 대항마를 이루게 된다. 1919년 이집트 혁명 당시 재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했고, 이로써 성립된 이집트 왕국의 푸아드 1세는 알 아즈하르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1930년 알 아즈하르는 아랍어, 샤리아, 신학의 세 학부로 나뉘어 모스크 밖의 시가지에 각각 강의동을 배정받았고 졸업시험이 생겼다. 1936년에는 대학 본부가 모스크의 길 건너편 건물로 이전되며 교육과 종교가 점차 분리되었다.
2.4. 현대
최근 모습. 우측은 18세기에 세워진 아불 다합 모스크
20세기 초엽 알 아즈하르에서는 무함마드 압두, 무함마드 알 자와히리 등의 이슬람 모더니즘 및 범이슬람주의 학풍이 유행했다. 특히 1928년에 취임한 총장 무스타파 알 마라기는 무함마드 압두의 추종자였고, 그는 일시적 해임을 제외하면 무려 1945년까지 재임하며 비아랍 언어들과 현대 과학 등의 교과를 추가하는 등 알 아즈하르 교육의 현대화를 이끌었다.[19] 1952년 자유장교단의 이집트 혁명 후 세속주의 공화정 하에서 모스크와 대학교의 완전한 분리가 추진되었다. 1955년까지 모스크 인근 건물들이 구입 후 철거되어 새 캠퍼스 부지가 확보되었다. 1961년, 알 아즈하르 대학이 공식 개교하며 모스크에선 더이상 강의가 열리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의대, 공대, 경상대 등 세속 학과들이 생겼고 부설 중고등 학교들도 개교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알 아즈하르를 종교적, 세속적인 측면 모두에서 이집트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키우면서도 울라마의 정치 배제 및 와크프 국유화 (1952년) 및 샤리아 법원 폐지 (1955년) 등의 양면 정책을 펼쳤다. 이는 1936년에 알 아즈하르의 독립성을 보장한 법을 폐기한 것이지만, 국민적 지지를 받던 나세르는 강행했고 울라마 대신 샤리아를 해석할 부서까지 신설했다. 다만 여전히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권위는 필요했기에, 아예 공대로 전환하자는 의견은 무시했다. 이렇듯 관영화된 알 아즈하르는 기존에 사회주의가 비이슬람적이라는 파트와를 뒤엎고 '이슬람 사회주의'를 용인했다. 동시에 울라마는 무슬림 형제단과 와하비즘 등 이슬람 원리주의를 배격했고, 그 대가로 나세르는 무슬림 형제 숙청 시에 알 아즈하르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주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시에 알 아즈하르는 이스라엘에 대한 지하드 (성전)를 선포했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는 '아랍 세계는 이집트와 아즈하르 없이는 기능할 수 없다'고 장담하며 알 아즈하르를 후원, 충실한 정부의 도구로 삼는 동시에 이집트의 대표 브랜드로 선전하였다. 따라서 1967년 이스라엘에 지하드를 선포했던 알 아즈하르는 1978년 그와의 평화 협상을 지지하는 파트와를 내었다. 이때 여론은 울라마가 정권의 개라며 조롱하였다. 사다트의 후계자인 호스니 무바라크는 정권의 정당성을 보장해 준 알 아즈하르에 자치권을 상당 부분 돌려주었고, 1982 ~ 1994년간 총장을 지낸 자둘 학크는 종종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를 띄었다. 1990년대 알 아즈하르에는 인쇄물 및 전자 미디어에 대한 검열권이 주어졌고, 방송사들은 사전에 대본을 검사받아야 했다.
한편 글로벌 시대에 알 아즈하르의 권위는 이슬람권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일례로 사우디의 파흐드 국왕은 걸프전 직전, 미군이 두 성지의 땅에 주둔해도 되는지 여부를 자국의 그랜드 무프티가 아닌 알아즈하르 대이맘에게 물었다. 2003년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 역시 무슬림 여학생들의 히잡 금지에 대해 자국의 이슬람 위원회 대신 알 아즈하르에 문의했다. 이에 대해 알아즈하르 대이맘은 히잡 착용은 무슬리마의 의무이나, 프랑스의 무슬림들은 현지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파격적인 파트와에 이집트의 여론은 반발했다. 2011년 이집트 혁명 당시 알 아즈하라는 침묵했는데, 직후 학생 회장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 계열이 당선되었다. 울라마 내에서도 살라피즘 정부에 협력하거나, 견제하거나, 신경 끄고 자립하자는 의견이 난립했다. 다만 엘시시의 쿠데타 후 알 아즈하르는 재차 관영 기관이 되었고, 2018년 사우디의 후원 하에 외벽 등에 대한 보수가 있었다. 2020년 울라마는 이집트 내의 성폭력 반대 운동에 지지를 보냈다.
3. 알 아즈하르 대학
알 아즈하르 대학교는 페스의 알 카라위인 대학에 이어 현존하는 세계에서 2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특히 수니파 신학과 샤리아 학문에 있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졸업생들은 이슬람권 전역 및 이집트 내에서 존경을 받는다. 본래 마드라사라 불리던 알 아즈하르 대학은 1962년 국유화 된 후 공립대학교로 전환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곳의 신학 대학 과정을 수료하면 산타 모자처럼 생긴 이맘 의복을 얻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에도 알 아즈하르 대학교가 있다.
3.1. 주요 동문
[1]
메디나 신학 대학교와 쌍벽을 이루며, 동시에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이다
[2]
알 아즈하르란 이름도
파티마의 칭호인 앗 자흐라에서 유래되었다
[3]
법률 해석문
[4]
1010년에는 목재 대문을 달았다.
[5]
설교 전에 모스크를 한 바퀴 돌았다고
[6]
미흐랍에 파티마 칼리파들이 새겨진 은판을 제거했고, 쉬아 교리서들은 폐기되었다.
[7]
다만 이러한 학자들을 아이유브 술탄들이 후원하기도 했다
[8]
쿠트바는 5일 전에 신축된 새 민바르에서 진행됨
[9]
샤피이, 말리키 마드하브가 있었다
[10]
다만 둘다 새로운 석조 미나렛 건설에는 실패한다. 맘루크 술탄들은 시내의 경관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고 자신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미나렛 건설에 열심이었다.
[11]
이발소 근처에 있는 정문
[12]
상이집트 학생들이 주로 출입
[13]
학생들에게 쌀죽 등이 제공됨
[14]
그는 1588년경 안장된 여성 수피 나피사 알 바크리야 이후 마지막으로 일 아즈하르에 묻힌 인물이다
[15]
그후 말리키파는 1899년 살림 알 비슈리의 임명으로 부활한다
[16]
더 많은 수는 비판되었다
[17]
무함마드의 후손
[18]
즉 알 아즈하르의 총장은 거의 교육부 장관급이 된 것
[19]
울라마의 반대는 물론, 푸아드1세가 별로 안 좋아해서 1938년 잠깐 알 자와히리로 교체됨